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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법(末法)에 와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를 홍통(弘通)하는 자(者)는 남녀(男女)를 가리지 말지니라. 모두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의 출현(出現)이 아니고서는 부르기 어려운 제목(題目)이니라. 처음엔 니치렌(日蓮) 한 사람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불렀으나 이인(二人)·삼인(三人)·백인(百人) 이렇게 차례로 불러서 전(傳)하느니라. 미래(未來)도 또 그러하리라, 이 어찌 지용(地涌)의 의(義)가 아니리오. 더구나 광선유포(廣宣流布)의 때는 일본일동(日本一同)으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게 될 것은 대지(大地)를 과녁으로 하는 것과 같으리라.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법화경(法華經)에다 이름을 세우고 몸을 맡기시라. 석가불(釋迦佛) 다보불(多寶佛)·시방(十方)의 제불(諸佛)·보살(菩薩)·허공(虛空)에서 이불(二佛)이 서로 수긍(首肯)하여 정(定)하신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오로지 말법(末法)의 영법구주(令法久住) 때문이니라. 이미 다보불(多寶佛)은 반좌(半座)를 나누어서 석가여래(釋迦如來)께 드릴 때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기(旗)를 꽂아 나타내시고, 석가(釋迦)·다보(多寶)의 이불(二佛)이 대장(大將)으로서 정(定)하신 일이 어찌 헛되리오. 이는 오로지 우리들 중생(衆生)을 성불(成佛)시키고자 하는 담합(談合)이시니라.일염부제(一閻浮提) 제일(第一)의 어본존(御本尊)을 믿으실지어다. 기필(期必)코 기필(期必)코 신심(信心)을 강성(强盛)히 하여 삼불(三佛)의 수호(守護)를 받도록 하시라.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 행학(行學)이 끊어지면 불법(佛法)은 없느니라. 나도 행(行)하고 남도 교화(敎化)하시라. 행학(行學)은 신심(信心)에서 일어나는 것이로다. 힘이 있는 한 일문일구(一文一句)라도 설(說)할지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니치렌대성인님의 제자들을 걱정하시는 의중..
본적(本迹)의 부동(不同)은 처처(處處)에 이를 썼는데, 그렇다 해도 숙습(宿習)이 나쁜 자(者)는 본적(本迹)에 미혹전도(迷惑轉倒)함인가. 만약(萬若) 본적승렬(本迹勝劣)을 모른다면 미래(未來)의 악도(惡道)가 가장 불쌍하니라. 숙업(宿業)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원망(怨望)할 것인가. 나의 제자(弟子)들 중(中)에도 천태(天台) 전교(傳敎)의 해료(解了)의 이관(理觀)을 벗어나지 못함이라. 본적(本迹)에 대해서 일왕승렬(一往勝劣) 재왕일치(再往一致)의 유의(謬義)가 있어서 자타(自他)를 미혹(迷惑)케 하는 조목(條目)은 숙습(宿習)이 그렇게 한 것인가. 염부제(閻浮提) 제일(第一)의 비사(秘事)라 해도 만년구호(萬年救護)를 위(爲)해 이것을 기술(記述)하여 남겨두는 바이니라. 나의 미래(未來)에 있어서 나의 불법(佛法)을 파(破)하기 위(爲)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원품(元品)의 대석(大石)·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사자신중(師子身中)의 황충(蝗蟲)으로 되어 이름을 니치렌(日蓮)에게 빗대어 본적일치(本迹一致)라고 하는 사의(邪義)를 주장하여 많은 중생(衆生)을 바야흐로 악도(惡道)로 이끌 것이니라. 만약(萬若) 도심(道心)이 있는 자(者)는 그들 사사(邪師)를 버리고 마땅히 나의 정의(正義)에 따를지어다. 정의(正義)란 본적승렬(本迹勝劣)의 심비(深秘)·구등본종(具騰本種)의 실리(實理)이니라. 니치렌(日蓮)일기(一期)의 대사(大事)이므로 제자(弟子)들에게도 조석(朝夕)으로 가르치고 또한 일기(一期)의 소조(所造) 등(等)은 모두가 이 의(意)이니라. 그럼에도 적집(迹執)을 벗어나지 못하여·혹(或)은 경(輕) 견혹(見惑) 혹(或)은 멸(滅) 사혹(思惑) 혹(或)은 치(癡) 진사혹(塵沙惑) 혹(或)은 미(迷) 무명혹(無明惑), 고(故)로 니치렌(日蓮)이 입의(立義)를 사용(使用)하지 않는 것이니라. 나의 교상(敎相)·관심(觀心)은 이즉(理卽)·명자(名字)·우악우견(愚惡愚見)을 위(爲)함이니라.
니치렌(日蓮)은 명자즉(名字卽)의 위(位)이고, 제자단나(弟子檀那)는 이즉(理卽)의 위(位)이니라. 상행소전(上行所傳) 결요부촉(結要付屬)의 행의(行儀)는 교관판승(敎觀判乘)·개명자즉(皆名字卽)·오미(五味)의 주(主)의 수행(修行)이니라. 그러므로 교상(敎相)의 순서·요용(要用)에 의(依)할지니라.오직 대강(大綱)이 있을 때는 다른 망목(網目)은 소용(所用) 없느니라. 그는 망목(網目)·이는 대강(大綱)·그는 망목(網目)의 교상(敎相)의 주(主)·이는 대강(大綱)·수제(首題)의 주(主)·아마도 니치렌(日蓮)의 행의(行儀)에는 천태(天台) 전교(傳敎)도 미치지 못하리라, 어찌 하물며 타사(他師)의 행의(行儀)에 있어서랴. 다만 재세(在世) 팔개년(八箇年)의 의식(儀式)을 옮겨 멸후(滅後)·말법(末法)의 행의(行儀)로 함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부처는 숙탈(熟脫)의 교주(敎主)·나는 하종(下種)의 법주(法主)이니라. 그의 일품이반(一品二半)은 사리불(舍利弗) 등(等)을 위(爲)해서는 관심(觀心)이고, 우리들 범부(凡夫)를 위(爲)해서는 교상(敎相)이니라, 이즉(理卽)·단망(短妄)의 범부(凡夫)를 위(爲)한 관심(觀心)은 여행(餘行)에 걸치지 않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이와 같이 심의(深義)를 모르는 벽인(僻人)이 나타나서 나의 입의(立義)는 교상(敎相)에서 벗어난 외(外)라고 생각하는 것이니라. 이들은 모두 숙업(宿業)이 나쁜 수인감과(修因感果)가 지극(至極)한 것이니라. 저 천태대사(天台大師)에게는 삼천인(三千人)의 제자(弟子)가 있었는데 장안(章安) 일인(一人)이 분명(分明)하니라. 전교대사(傳敎大師)는 삼천인(三千人)의 중도(衆徒)를 두었는데 기신(義眞) 이후(以後)는 그것이 없는 것과 같다. 지금도 또한 그와 같아서 수많은 제자(弟子)가 있다 해도 의심(疑心) 없이 정의(正義)를 전(傳)하는 자(者)는 드문 것이어서 일(一) 이(二)의 소석(小石)과 같으니 비장(秘藏)해야 할 법문(法門)이니라. 제육(第六)에 주교현관(住敎顯觀)·칠(七)에 주교비관(住敎非觀)·팔(八)에 복교현관(覆敎顯觀)·구(九)에 주교용관(住敎用觀)·십(十)에 주관용교(住觀用敎)·이 오중(五重)은 상(上)의 오중(五重)과 같으니 사유(思惟)할지어다.
물어 가로되, 본적수수불가사의(本迹雖殊不可思議) 일(一)·본적(本迹)의 교(敎)에 있어서 별(別)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관리(觀理)를 나타내는 고(故)로 라고 운운(云云). 기정(機情)에 입각(立脚)하면 본적(本迹)에 있어서 구근(久近)의 이(異)가 있는 것이니 이는 일왕(一往)의 천의(淺義)이니라, 내증(內證)에 입각(立脚)해서 이것을 논(論)하면 승렬(勝劣)은 있을 수 없느니라. 재왕(再往)의 심의(深義)는 불가사의일(不可思議一)이니라 운운(云云). 여하(如何)히 의(意)를 알아야 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주교현관(住敎顯觀)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주교비관(住敎非觀)은 법성적연(法性寂然)·복교현관(覆敎顯觀)은 명자판교(名字判敎)·주교용관(住敎用觀)은 불가사의일(不可思議一)·주관용교(住觀用敎)는 이현묘원(以顯妙圓)이라고 하는 대사(大事)가 이것이니라. 교관불가사의(敎觀不可思議)·천연본성(天然本性)의 곳에 독일법계(獨一法界)의 묘관(妙觀)을 세우니, 이를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본적승렬(本迹勝劣)이라고 하느니라. 또한 절대불가사의(絶對不可思議)의 내증(內證)·불가득(不可得)·언어도단(言語道斷)의 승렬(勝劣)은 천태(天台)·묘락(妙樂)·전교(傳敎)가 남긴 바·아가(我家)의 비밀(秘密)·관심직달(觀心直達)의 승렬(勝劣)이니라. 적(迹)이라는 명칭(名稱)이 있다 해도 유명무실(有名無實)·본무금유(本無今有)의 적문(迹門)이니라. 실(實)로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묘법(妙法)은 오직 수량품(壽量品)에 한(限)하는 고(故)로 불가사의일(不可思議一)이라 해석(解釋)하느니라. 적문(迹門)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제호(題號)는 본문(本門)의 상사(相似)하다 할지라도 의리(義理)는 천지(天地)의 격차(隔差)가 있으며, 성불(成佛) 또한 수화(水火)와 같은 부동(不同)이니라. 구원명자(久遠名字)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가 목탄서(木炭書)인 까닭을 나타내기 위(爲)해 일(一)이라고 해석(解釋)하는 것이니 말학(末學)은 의망(疑網)을 남기지 말지어다. 니치렌(日蓮)·영산회상(靈山會上)·다보탑중(多寶塔中)에 있어서 어버이이신 석존(釋尊)으로부터 직수(直授)해 받든 바 비법(秘法)이니라. 깊이 깊이 비장(秘藏)하고 비장(秘藏)하라, 전(傳)하고 전(傳)할지어다.
본인묘초(本因妙抄) 미노부에서 53세에 술작 873~4쪽실상(實相)이라고 함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이명(異名)이요, 제법(諸法)이라 함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말하는 것이니라. 지옥(地獄)은 지옥(地獄)의 상(相)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실(實)의 상(相)이요, 아귀(餓鬼)로 변(變)하면 지옥(地獄)의 실(實)의 상(相)은 아니로다. 부처는 부처의 상(相) 범부(凡夫)는 범부(凡夫)의 상(相), 만법(萬法)의 당체(當體)의 상(相)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당체(當體)라고 하는 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하느니라.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면 멸(滅)하지 않는 죄(罪)가 있겠는가, 오지 않는 복(福)이 있겠는가. 진실(眞實)이고 심심(甚深)하니 이를 신수(信受)할지어다."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 497쪽 어서말씀대로
현재 우리들은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하는 창제근본으로 말법만년진미래제에 걸친 입정안국의 세계광선유포를 실현해내겠다고 스스로 원겸어업한대로 지용보살의 본지를 밝히고 목숨을 걸고 발적현본하여 길없는 길을 개척해가려 하고 있습니다.제경(諸經)에서 퇴박맞던 여인(女人)이,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묘(妙)의 일자(一字)를 설(說)하시자, 당장에 부처가 되었느니라. 부처라고 함은 정직(正直)을 본(本)으로 하기 때문에 구부러진 여인(女人)은 부처가 되지 못하며, 오장삼종(五障三從)이라고 해서, 다섯 가지의 장해(障害), 세 가지의 따라야 할 일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은색녀경(銀色女經)에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눈은 대지(大地)에 떨어질지라도 여인(女人)은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고 설(說)해졌으며, 대론(大論)에는 「청풍(淸風)은 잡을 수 있다고 해도, 여인(女人)의 마음은 잡기 어렵다」고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제경(諸經)에서 퇴박맞던 여인(女人)이,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묘(妙)의 일자(一字)를 설(說)하시자, 당장에 부처가 되었느니라. 너무나 불심(不審)했기 때문에 보정세계(寶淨世界)의 다보불(多寶佛)의 제일(第一)의 제자(弟子)인 지적보살(智積菩薩),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제자(弟子)인 지혜제일(智慧第一)의 사리불존자(舍利佛尊者)가 사십여년(四十餘年)의 대소승경(大小乘經)의 경문(經文)으로써 용녀(龍女)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힐난(詰難)했으나, 끝내 당하지 못하여 부처가 되었느니라. 초성도(初成道)의 「능(能)히 부처의 종자(種子)를 단절(斷切)함」 쌍림(雙林) 최후(最後)의 「일체(一切)의 강하(江河)는 반드시 회곡(回曲)이 있음」이라는 글월도 타파(打破)되었고, 은색녀경(銀色女經) 및 대론(大論)의 귀경(龜鏡)도 헛되게 되었더라. 지적(智積)·사리불(舍利佛)은 혀를 내두르고 입을 다물었으며, 인천대회(人天大會)는 환희(歡喜)한 나머지 합장(合掌)했느니라. 이는 오로지 묘(妙)의 일자(一字)의 덕(德)이로다. 이 남염부제(南閻浮提) 안에 이천(二千) 오백(五百)의 강하(江河)가 있는데, 일일(一一)이 모두 구부러졌으며 남염부제(南閻浮提)의 여인(女人)의 마음이 구부러진것과 같다. 그러나 사바야(娑婆耶)라고 하는 강하(江河)가 있어서, 새끼줄을 끌어 늘여뜨린 것처럼 똑바로 서해(西海)로 들어가는데,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여인(女人)도 역시 이와 같이 곧바로 서방정토(西方淨土)로 들어가게 되니 이는 묘(妙)의 일자(一字)의 덕(德)이니라. 묘(妙)란 소생(蘇生)의 의(義)이고, 소생(蘇生)이라 함은 되살아난다는 의(義)이니라. 비유컨대 황곡(黃鵠)의 새끼가 죽었을 때 어미 학(鶴)이 자안(子安)하고 울면, 죽은 새끼가 다시 되살아나고, 짐조(鴆鳥)가 물에 들어가면 어방(魚蚌)이 모조리 죽고, 서우(犀牛)의 뿔이 이것에 닿으면 죽은 자(者)가 모두 되살아나는 것과 같이, 이전(爾前)의 경(經)들에서 불종(佛種)을 볶아 버려 죽은 이승(二乘)·천제(闡提)·여인(女人) 등(等)이 묘(妙)의 일자(一字)를 간직하면 볶인 불종(佛種)도 다시 싹트는 것과 같다. 천태(天台) 가로되 「천제(闡提)는 마음이 있어서 역시 작불(作佛)하리라, 이승(二乘)은 지(智)를 멸(滅)하여 마음이 생길 수 없으나, 법화(法華)는 능(能)히 고치니, 또한 칭(稱)하여 묘(妙)라고 한다」고, 묘락(妙樂) 가로되 「단지 대(大)라고 하되 묘(妙)라고 이름하지 않음은, 일(一)에는 유심(有心)은 고치기 쉽고 무심(無心)은 고치기 어려운데 고치기 어려운 것을 능(能)히 고치기 때문에 묘(妙)라고 칭(稱)함」 등(等) 운운(云云). 이들의 글월의 뜻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대집경(大集經)·대품경(大品經)·대열반경(大涅槃經) 등(等)은 제목(題目)에 대(大)의 자(字)만 있고, 묘(妙)의 자(字)가 없다. 다만 산 것을 고치고 죽은 것을 고치지 못하나, 법화경(法華經)은 죽은 것도 고치기 때문에 묘(妙)라고 한다는 석(釋)이니라. 그러므로 제경(諸經)에서는 부처가 될 자(者)도 부처가 되지 않느니라. 그 까닭은 법화(法華)는 부처가 되기 어려운 자(者)조차도 역시 부처가 되었다. 되기 쉬운 자(者)는 말해 무엇하랴 라는 도리(道理)가 성립(成立)하니,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신 뒤는 제경(諸經)을 지향(指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정상이천년(正像二千年)이 지나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당세(當世)의 중생(衆生)이 성불왕생(成佛往生)을 이룩하기 어려운 것은, 재세(在世)의 이승(二乘) 천제(闡提) 등(等)보다도 백천만억배(百千萬億倍) 더한 중생(衆生)이 관경(觀經) 등(等)의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經)들에 의하여 생사(生死)를 떠나려고 생각함은 허무하도다, 허무하도다. 여인(女人)은 재세(在世)·정상말(正像末), 통틀어 일체(一切) 제불(諸佛)의 일체경(一切經) 중(中)에 법화경(法華經)을 떠나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 영산(靈山)의 청중(聽衆)으로서 도량(道場)에서 개오(開悟)한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가 결정(決定)하여 가로되 「타경(他經)은 다만 남자(男子)에게 기(記)하고, 여자(女子)에게 기(記)하지 않았으나 금경(今經)은 모두 기(記)한다」 등(等) 운운(云云). 석가여래(釋迦如來)·다보불(多寶佛)·시방제불(十方諸佛)의 어전(御前)에서 마갈제국(摩竭提國) 왕사성(王舍城)의 간방(艮方) 독수리산(山)이라고 하는 곳에서, 팔개년(八個年) 동안, 설(說)하신 법화경(法華經)을 지자대사(智者大師)가 친히 들으시기를, 내가 오십여년(五十餘年)의 일대성교(一代聖敎)를 설(說)해 두는 것은 모두 중생(衆生)의 이익(利益)을 위해서이니라. 그러나 그 중(中)에 사십이년(四十二年)의 경(經)들에는 여인(女人)은 부처가 될 수 없노라고 설(說)하시었다. 지금 법화경(法華經)에 와서 여인(女人)이 부처가 된다고 설(說)하노라 하고, 선언(宣言)하신 것을 불멸후(佛滅後)·일천오백여년(一千五百餘年)을 맞아, 독수리산(山)에서 동북(東北)·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의 산해(山海)를 건너서, 마하시나(摩訶尸那)라고 하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진단국(震旦國)이니라. 이 나라에 부처의 사자(使者)로 나오시어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라고 이름하시고 여인(女人)은 법화경(法華經)을 떠나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정(定)하시었느니라.
시나국(尸那國)으로부터 삼천리(三千里)나 떨어져서 동방(東方)에 나라가 있으니, 일본국(日本國)이라고 불렀다. 천태대사(天台大師)가 입멸(入滅)한지 이백여년(二百餘年)이 되어, 이 나라에 태어나서 전교대사(傳敎大師)라고 이름하시어, 수구(秀句)라고 하는 서(書)를 만드셨는데 「능화(能化)·소화(所化) 다같이 역겁(歷劫)이 없으며, 묘법경(妙法經)의 힘으로 즉신(卽身)으로 성불(成佛)함」이라고 용녀(龍女)의 성불(成佛)을 정(定)해 두시었다. 그런데 당세(當世)의 여인(女人)은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어렵겠지만, 왕생극락(往生極樂)은 법화(法華)를 의지하면 의심(疑心)할 바 없으니, 비유컨대 강하(江河)가 대해(大海)에 들어가기 보다도 쉽고, 비가 공중(空中)에서 떨어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되는 일이니라. 그런데 일본국(日本國)의 일체(一切)의 여인(女人)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는 부르지 않고, 여인(女人)의 왕생성불(往生成佛)을 이룰 수 없는 쌍관(雙觀)·관경(觀經) 등(等)에 의하여 미타(彌陀)의 명호(名號)를 하루에 육만(六萬)번·십만(十萬)번 등, 부르는 것은 부처의 명호(名號)이고 보면 교혜(巧慧)로운 듯하지만, 여인불성불(女人不成佛)·불왕생(不往生)의 경(經)에 의하기 때문에, 헛되이 남의 재물(財物)을 셈한 여인(女人)이니라. 이는 오로지 악지식(惡知識)에게 기만(欺瞞)당한 것이로다. 그러므로 일본국(日本國)의 일체(一切)의 여인(女人)의 원수는 호랑(虎狼)보다도 산적(山賊)·해적(海賊)보다도 부모(父母)의 적(敵)이나 유녀(遊女) 등(等)보다도, 법화경(法華經)은 가르치지 않고, 염불(念佛)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일체(一切)의 여인(女人)의 원수이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루에 육만(六萬)·십만(十萬)·천만(千萬) 등(等)이나 부른 뒤에 여가(餘暇)가 있으면, 이따금씩 아미타(阿彌陀) 등(等)의 제불(諸佛)의 명호(名號)도 중얼거린다. 이렇게 하여야만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여인(女人)일텐데 당세(當世)의 여인(女人)은 평생(平生) 동안 미타(彌陀)의 명호(名號)를 열심히 부르고 염불(念佛)의 불사(佛事)를 쉴새 없이 행(行)하되 법화경(法華經)은 전(全)혀 부르지 않고, 공양(供養)하지 않으며 혹은 약간 법화경(法華經)을 지경자(持經者)에게 읽게 하지만, 염불자(念佛者)를 부모(父母)·형제(兄弟)들인냥 생각하고, 지경자(持經者)는 소종권속(所從眷屬)보다도 경(輕)히 여기었다. 그와 같이 하면서도 법화경(法華經)을 믿노라고 자칭(自稱)하느니라. 그런데 정덕부인(淨德夫人)은 이인(二人)의 태자(太子)의 출가(出家)를 허락하여 법화경(法華經)을 홍통(弘通)시켰으며, 용녀(龍女)는 「아천대승교(我闡大乘敎)·도탈고중생(度脫苦衆生)」이라고 맹서하였으나, 전연 타경(他經)만을 행하되, 이 경(經)을 행(行)하지 않겠다고는 맹서하지 않았다. 지금의 여인(女人)은 오로지 타경(他經)을 행(行)하고, 법화경(法華經)을 행(行)한다는 것을 모르니 서둘러 마음을 바꿀지어다·마음을 바꿀지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법화경제목초(法華經題目抄) 기요스미(淸澄)에서 45세에 술작 946~9쪽어떻게하면 진정한 의미의 견보탑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위대한 보탑을 우주대로 열어서 24시간 환희 중의 대환희의 위대한 생명의 경애를 보여주시고 계신 대어본존님과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 직결해서 경지명합된 상태에서 하나되어 사제불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을 부를 때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서 발적현본하신 다쓰노구치 형장에서 부르셨을 일념과 속도대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그대로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과 하나되어 목숨을 걸고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대어본존님이라 하더라도 이 본존님을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 "불단의 어본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잘못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니치렌대성인님께서는 "만약 기심의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전혀 묘법이 아니니라"라고 어서 383쪽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법화경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또 다른 어서에서도 "이 어본존을 결코 타처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 하는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라고 어서 1244쪽에 '흉중에, 자신의 생명에,'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법화경 즉 남묘호렌게쿄는 다릅니다.
견보탑품입니다.
견(見)=보다, 보탑(寶塔)=보물의 탑.
보탑을 보는 것입니다.
우주규모의 위대한 보탑, 이 보탑이라는 것은 법화경에 나와 있습니다.
높이 500유순, 계산하면 히말라야의 약 500배 이상의 높이입니다.
후지산도 높은데, 히말라야는 후지산의 2배 이상입니다.
그 500배 이상이니까 어마어마하지요.
게다가 잡동사니의 산이 아닙니다.
보물의 탑입니다.
대단히 장엄합니다, 장대합니다. 우주규모입니다.
이 위대한 보탑.
그것이 사실은 우리들 생명의 위대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생명이 우주규모의 장대한, 또 영원성을 가진 그러한 존재이다라고 실감하는 것을 견보탑이라고 합니다.
대성인은 이 보탑품의 의식을 빌어 대어본존님을 도현하셨습니다.어떻게하면 진정한 의미의 견보탑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위대한 보탑을 우주대로 열어서 24시간 환희 중의 대환희의 위대한 생명의 경애를 보여주시고 계신 대어본존님과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 직결해서 경지명합된 상태에서 하나되어 사제불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을 부를 때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서 발적현본하신 다쓰노구치 형장에서 부르셨을 일념과 속도대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그대로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과 하나되어 목숨을 걸고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부처가 기록(記錄)하여 가로되 「나의 멸후(滅後)·정상二천년(正像二千年)이 지나서 말법(末法)의 초(初)에 이 법화경(法華經)의 간심(肝心)인 제목(題目)의 오자(五字)만을 홍통(弘通)하는 자(者)가 출래(出來)하리라,그렇게 창제할 때 드디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게 되어 24시간 내내 환희 중의 대환희의 금강불괴의 생명상태에서 삶을 즐기며 또 자연스레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여 대환희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타인에게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행이고 화타행 즉 절복행이 되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790쪽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이 홍통(弘通)하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체(體)이고 심(心)이니라,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용(用)이고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조행(助行)이며 제목(題目)은 정행(正行)이니라. 정행(正行)에다 조행(助行)을 포함(包含)시켜야 하느니라 운운(云云)."
어의구전 794쪽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면 멸(滅)하지 않는 죄(罪)가 있겠는가, 오지 않는 복(福)이 있겠는가. 진실(眞實)이고 심심(甚深)하니 이를 신수(信受)할지어다."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 497쪽 어서말씀대로
현재 우리들은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하는 창제근본으로 말법만년진미래제에 걸친 입정안국의 세계광선유포를 실현해내겠다고 스스로 원겸어업한대로 지용보살의 본지를 밝히고 목숨을 걸고 발적현본하여 길없는 길을 개척해가려 하고 있습니다.
대어본존님이라 하더라도 이 본존님을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 "불단의 어본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잘못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니치렌대성인님께서는 "만약 기심의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전혀 묘법이 아니니라"라고 어서 383쪽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법화경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또 다른 어서에서도 "이 어본존을 결코 타처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 하는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라고 어서 1244쪽에 '흉중에, 자신의 생명에,'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은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가사의합니다.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외도인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 사상입니다.
외도나 염불 사상란 자신은 미약하기 때문에 하느님이나 아미타불 등 만을 절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운이 없고, 경애가 낮고, 힘이 없는 우리들은 위대한 하느님이나 어본존에게 의지해서 그 공덕을, 그 지혜를 나눠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외도나 염불 사상이라고 합니다.
대어본존님을 하느님이나 아미타불로 바꾸면 그대로 기독교나 염불종을 믿는 것과 같이 됩니다.
"미약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이나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지합시다"라는 구조입니다.
법화경 즉 남묘호렌게쿄는 다릅니다.
견보탑품입니다.
견(見)=보다, 보탑(寶塔)=보물의 탑.
보탑을 보는 것입니다.
우주규모의 위대한 보탑, 이 보탑이라는 것은 법화경에 나와 있습니다.
높이 500유순, 계산하면 히말라야의 약 500배 이상의 높이입니다.
후지산도 높은데, 히말라야는 후지산의 2배 이상입니다.
그 500배 이상이니까 어마어마하지요.
게다가 잡동사니의 산이 아닙니다.
보물의 탑입니다.
대단히 장엄합니다, 장대합니다. 우주규모입니다.
이 위대한 보탑.
그것이 사실은 우리들 생명의 위대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생명이 우주규모의 장대한, 또 영원성을 가진 그러한 존재이다라고 실감하는 것을 견보탑이라고 합니다.
대성인은 이 보탑품의 의식을 빌어 대어본존님을 도현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본존은 우리 자신을 위대한 보탑이라고 보기 위한 명경, 깨끗한 거울, 대경이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읽어도, 거울을 숭상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사종사의에 너무나 깊이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 참으면"이라는 방향으로 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지 못하고, 즐거워하지 못합니다.
좋을 때는 기뻐하지만, 실패하면 "이렇게 한심한다니"라고 말해버립니다.
법화경이라는 것은 "최악의 상태의 자신이 위대하다"라고 설해진 경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화경과 이전경의 차이. 이것을 권실상대라고 합니다.
어째서 법화경이 뛰어나고, 이전경이 열등한가.
교학적으로는 이승성불, 악인성불, 여인성불이 설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인이나 여인들이, 이승(성문, 연각) 이러한 사람들은 대승경전이 설해졌던 시대,
세간에서도 상대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대승경전은 그러한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법화경은 세간이 상대도 하지 않는 차별 받은 사람들을, 실은 위대하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주이지요.
그것을 생명론 적으로 보면, 이승, 악인,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자기자신의 가장 실망스런 모습입니다.
가장 한심한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도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비참한 경우의 자신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위대한 묘법의 당체이다라고 믿는 것, 그것이 법화경을 수지 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난신난해입니다.
건강한 자신, 최상의 상태의 자신, 또 타인에게 인기 있는 자신을 위대하다고 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대실패하고, 타인에게 바보 취급당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자신을 위대하다고 보는 것은 난신난해,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거기에 서야만 법화경인 것입니다.
어떻게하면 진정한 의미의 견보탑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위대한 보탑을 우주대로 열어서 24시간 환희 중의 대환희의 위대한 생명의 경애를 보여주시고 계신 대어본존님과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 직결해서 경지명합된 상태에서 하나되어 사제불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을 부를 때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서 발적현본하신 다쓰노구치 형장에서 부르셨을 일념과 속도대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그대로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과 하나되어 목숨을 걸고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제할 때 드디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게 되어 24시간 내내 환희 중의 대환희의 금강불괴의 생명상태에서 삶을 즐기며 또 자연스레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여 대환희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타인에게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행이고 화타행 즉 절복행이 되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790쪽
제목 :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란 달과 바람과 같은 생시(生時)인 이 몸의 심성(心性)의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이니라. 이 극락(極樂)이란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정보(正報)인 유정(有情)과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의보(依報)인 국토(國土)가 화합(和合)하여 일체삼신즉일(一體三身卽一)이니라. 사토불이(四土不二)로서 법신(法身)의 일불(一佛)이며, 십계(十界)를 신(身)으로 함은 법신(法身)이니라. 십계(十界)를 심(心)으로 함은 보신(報身)이니라. 십계(十界)를 형(形)으로 함은 응신(應身)이니라. 십계외(十界外)에 부처는 없고 부처 외(外)에 십계(十界)가 없어서 의정불이(依正不二)이고 신토불이(身土不二)니라. 일불(一佛)의 신체(身體)임을 가지고 적광토(寂光土)라 하며, 이런 고(故)로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라 하느니라.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법성(法性)의 연저(淵底)·현종(玄宗)의 극지(極地)인 고(故)로 극리(極理)라고 하느니라, 이 무상(無相)의 극리(極理)인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심성(心性)속에 있어서 청정무루(淸淨無漏)이니라. 이를 이름하여 묘법(妙法)의 심연대(心蓮臺)라 하며, 이런 고(故)로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一切法)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고 통달해료(通達解了)함이라 하느니라. 생(生)과 사(死)의 둘의 이(理)는 생사(生死)의 꿈의 이(理)이고, 망상(妄想)이며 전도(顚倒)이니라.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가지고 나의 심성(心性)을 밝히면 생(生)할 시초(始初)도 없는 고(故)로 죽게 될 끝도 없으니, 이미 생사(生死)를 떠난 심법(心法)이 아니겠느뇨.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수재(水災)에도 썩지 않으며, 검도(劍刀)에도 잘리지 않고, 궁전(弓箭)에도 맞지 않고, 개자(芥子)속에 들어가도 개자(芥子)도 넓어지지 않고, 심법(心法)도 줄어들지 않고, 허공(虛空)속에 꽉 차도 허공(虛空)도 넓지 않고, 심법(心法)도 좁지 않으며, 선(善)에 배반(背反)함을 악(惡)이라 하고, 악(惡)에 배반(背反)함을 선(善)이라고 한다. 고(故)로 심외(心外)에 선(善)이 없고 악(惡)이 없으며, 이 선(善)과 악(惡)에서 떨어짐을 무기(無記)라고 하느니라. 선악무기(善惡無記)·이 외(外)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외(外)에는 법(法)이 없는 고(故)로 선악(善惡)도 정예(淨穢)도 범부(凡夫)·성인(聖人)도 천지(天地)도 대소(大小)도 동서(東西)도 남북(南北)도 사유(四維)도 상하(上下)도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소멸(心行所滅)함이라. 마음에 분별(分別)하여 생각해서 말하여 나타내는 언어(言語)이므로 마음의 외(外)에는 분별(分別)도 무분별(無分別)도 없느니라. 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 범부(凡夫)는 나의 마음에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니라. 부처는 이를 깨달아 나타내서 신통(神通)이라 이름하니 신통(神通)이란 혼신(魂神)이 일체법(一切法)에 통(通)하여 장애(障碍)가 없음이라. 이 자재(自在)의 신통(神通)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마음인 고(故)로 호리(狐狸)도 응분(應分)으로 신통(神通)을 나타냄은 모두 마음의 혼신(魂神)의 응분(應分)의 깨달음이며, 이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國土世間)도 출래(出來)하는 것이니라. 일대성교(一代聖敎)란 이 일을 설(說)한 것이며, 이것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모두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의 법문(法門)이니라, 그러므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 화엄경(華嚴經)에 가로되「마음은 솜씨 좋은 화사(畵師)가 종종(種種)의 오음(五陰)을 만들 듯이 일체세간중(一切世間中)에 법(法)으로서 만들지 않음이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衆生)도 그러하니 삼계(三界)는 오직 일심(一心)이니라. 마음 외(外)에 다른 법(法)이 없고, 심불(心佛) 및 중생(衆生)·이 삼차별(三差別)이 없느니라」이상(已上). 무량의경(無量義經)에 가로되「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에서 무량의(無量義)를 출생(出生)함」이상(已上), 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일념(一念)의 마음 이것이니라. 문구(文句)에 석(釋)하여 가로되「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이 없는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이승(二乘)의 유여(有餘)·무여(無餘)의 두 가지의 열반(涅槃)의 상(相)을 떠나는 고(故)로 불상(不相)이라 하느니라」운운(云云), 마음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가지고 경론(經論)의 전요(詮要)로 하느니라. 이 마음을 깨달아 앎을 이름하여 여래(如來)라 하며, 이를 깨달아 알고나면 십계(十界)는 나의 몸이고, 나의 마음이고 나의 모습이니라.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나의 신심(身心)이기 때문이니라. 이를 알지 못하는 때를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 하며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다고 읽느니라. 나의 마음의 모습을 분명(分明)하게 깨닫지 못함이라. 이것을 깨달아 아는 때를 이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니, 고(故)로 무명(無明)과 법성(法性)은 일심(一心)의 이명(異名)이니라. 이름과 말은 둘일지라도 마음은 오직 하나의 마음이며, 이런 까닭에 무명(無明)을 단절(斷切)해서는 안 되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3~4쪽행복(幸福)한지고, 법화경(法華經)을 위(爲)하여 몸을 버리게 되다니 추(醜)한 목을 잘리게 된다면 모래를 금(金)과 바꾸고 돌로 옥(玉)을 사는 것과 같으니라.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비방(誹謗)하여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져야 할 것을 구제(救濟)하기 위하여 말하는 법문(法門)이니라.이를 이름하여 묘법(妙法)의 심연대(心蓮臺)라 하며, 이런 고(故)로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一切法)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고 통달해료(通達解了)함이라 하느니라. 제목 :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무상(無相)의 극리(極理)란 달과 바람과 같은 생시(生時)인 이 몸의 심성(心性)의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이니라. 이 극락(極樂)이란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정보(正報)인 유정(有情)과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의보(依報)인 국토(國土)가 화합(和合)하여 일체삼신즉일(一體三身卽一)이니라. 사토불이(四土不二)로서 법신(法身)의 일불(一佛)이며, 십계(十界)를 신(身)으로 함은 법신(法身)이니라. 십계(十界)를 심(心)으로 함은 보신(報身)이니라. 십계(十界)를 형(形)으로 함은 응신(應身)이니라. 십계외(十界外)에 부처는 없고 부처 외(外)에 십계(十界)가 없어서 의정불이(依正不二)이고 신토불이(身土不二)니라. 일불(一佛)의 신체(身體)임을 가지고 적광토(寂光土)라 하며, 이런 고(故)로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라 하느니라.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법성(法性)의 연저(淵底)·현종(玄宗)의 극지(極地)인 고(故)로 극리(極理)라고 하느니라, 이 무상(無相)의 극리(極理)인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심성(心性)속에 있어서 청정무루(淸淨無漏)이니라. 이를 이름하여 묘법(妙法)의 심연대(心蓮臺)라 하며, 이런 고(故)로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一切法)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고 통달해료(通達解了)함이라 하느니라. 생(生)과 사(死)의 둘의 이(理)는 생사(生死)의 꿈의 이(理)이고, 망상(妄想)이며 전도(顚倒)이니라.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가지고 나의 심성(心性)을 밝히면 생(生)할 시초(始初)도 없는 고(故)로 죽게 될 끝도 없으니, 이미 생사(生死)를 떠난 심법(心法)이 아니겠느뇨.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수재(水災)에도 썩지 않으며, 검도(劍刀)에도 잘리지 않고, 궁전(弓箭)에도 맞지 않고, 개자(芥子)속에 들어가도 개자(芥子)도 넓어지지 않고, 심법(心法)도 줄어들지 않고, 허공(虛空)속에 꽉 차도 허공(虛空)도 넓지 않고, 심법(心法)도 좁지 않으며, 선(善)에 배반(背反)함을 악(惡)이라 하고, 악(惡)에 배반(背反)함을 선(善)이라고 한다. 고(故)로 심외(心外)에 선(善)이 없고 악(惡)이 없으며, 이 선(善)과 악(惡)에서 떨어짐을 무기(無記)라고 하느니라. 선악무기(善惡無記)·이 외(外)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외(外)에는 법(法)이 없는 고(故)로 선악(善惡)도 정예(淨穢)도 범부(凡夫)·성인(聖人)도 천지(天地)도 대소(大小)도 동서(東西)도 남북(南北)도 사유(四維)도 상하(上下)도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소멸(心行所滅)함이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 화엄경(華嚴經)에 가로되「마음은 솜씨 좋은 화사(畵師)가 종종(種種)의 오음(五陰)을 만들 듯이 일체세간중(一切世間中)에 법(法)으로서 만들지 않음이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衆生)도 그러하니 삼계(三界)는 오직 일심(一心)이니라. 마음 외(外)에 다른 법(法)이 없고, 심불(心佛) 및 중생(衆生)·이 삼차별(三差別)이 없느니라」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 범부(凡夫)는 나의 마음에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니라. 부처는 이를 깨달아 나타내서 신통(神通)이라 이름하니 신통(神通)이란 혼신(魂神)이 일체법(一切法)에 통(通)하여 장애(障碍)가 없음이라. 이 자재(自在)의 신통(神通)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마음인 고(故)로 호리(狐狸)도 응분(應分)으로 신통(神通)을 나타냄은 모두 마음의 혼신(魂神)의 응분(應分)의 깨달음이며, 이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國土世間)도 출래(出來)하는 것이니라. 일대성교(一代聖敎)란 이 일을 설(說)한 것이며, 이것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모두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의 법문(法門)이니라,마음에 분별(分別)하여 생각해서 말하여 나타내는 언어(言語)이므로 마음의 외(外)에는 분별(分別)도 무분별(無分別)도 없느니라. 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 범부(凡夫)는 나의 마음에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니라. 부처는 이를 깨달아 나타내서 신통(神通)이라 이름하니 신통(神通)이란 혼신(魂神)이 일체법(一切法)에 통(通)하여 장애(障碍)가 없음이라. 이 자재(自在)의 신통(神通)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마음인 고(故)로 호리(狐狸)도 응분(應分)으로 신통(神通)을 나타냄은 모두 마음의 혼신(魂神)의 응분(應分)의 깨달음이며, 이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國土世間)도 출래(出來)하는 것이니라. 일대성교(一代聖敎)란 이 일을 설(說)한 것이며, 이것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모두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의 법문(法門)이니라, 그러므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무명(無明)을 단절(斷切)해서는 안 되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3~4쪽무량의경(無量義經)에 가로되「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에서 무량의(無量義)를 출생(出生)함」이상(已上), 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일념(一念)의 마음 이것이니라. 문구(文句)에 석(釋)하여 가로되「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이 없는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이승(二乘)의 유여(有餘)·무여(無餘)의 두 가지의 열반(涅槃)의 상(相)을 떠나는 고(故)로 불상(不相)이라 하느니라」운운(云云), 마음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가지고 경론(經論)의 전요(詮要)로 하느니라. 이 마음을 깨달아 앎을 이름하여 여래(如來)라 하며, 이를 깨달아 알고나면 십계(十界)는 나의 몸이고, 나의 마음이고 나의 모습이니라.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나의 신심(身心)이기 때문이니라. 이를 알지 못하는 때를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 하며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다고 읽느니라. 나의 마음의 모습을 분명(分明)하게 깨닫지 못함이라. 이것을 깨달아 아는 때를 이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니, 고(故)로 무명(無明)과 법성(法性)은 일심(一心)의 이명(異名)이니라. 이름과 말은 둘일지라도 마음은 오직 하나의 마음이며, 이런 까닭에 무명(無明)을 단절(斷切)해서는 안 되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3~4쪽"묘각(妙覺)의 산(山)에 달려 올라가 사방(四方)을 쫙 바라보니 아아, 유쾌하도다, 법계(法界)는 적광토(寂光土)로서 유리(瑠璃)를 가지고 땅으로 하고 금의 밧줄로써 팔(八)의 길에 경계(境界)를 했으며, 천(天)으로 부터 사종(四種)의 꽃이 내리고 허공(虛空)에서 음악(音樂)이 들리며,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바람에 산들거리고 오락(娛樂) 쾌락(快樂)하시느니라. 우리들도 그 수(數)에 들어가서 유희(遊戱)하고 즐기게 될 것은 벌써 다가왔도다. 신심(信心)이 약(弱)해서는 이와 같이 가장 좋은 곳에는 갈 수 없다, 갈 수 없느니라. 궁금한 일은 더 더욱 물어보시라, 황송하고 황송하오."
건치이년(建治二年) 병자(丙子) 十二月 九日 日蓮花押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 미노부에서 55세에 술작 1386~7쪽"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790쪽조행(助行)으로는 사용(使用)할 것이로되, 정행(正行)에는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본인묘의 불법이기에 구원즉말법이 되고 말법즉구원이 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상항 즉 삼세상항으로 언제든 발적현본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대어본존님과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과 경지명합하여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한 창제로 하나가 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즉시로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게 되어 즉신성불되고 변독위약 난즉안온 번뇌즉보리.. 환희중(歡喜中)의 대환희(大歡喜)의 자유자재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위대한 경애에 머물게 되는 것이지요.
이 모든게 본인묘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기에 가능한 것이지요."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이 홍통(弘通)하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체(體)이고 심(心)이니라,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용(用)이고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조행(助行)이며 제목(題目)은 정행(正行)이니라. 정행(正行)에다 조행(助行)을 포함(包含)시켜야 하느니라 운운(云云)."
어의구전 794쪽
"정행(正行)에다 조행(助行)을 포함(包含)시켜야 하느니라" 말씀처럼..
"결국(結局)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문(法門)은 무익(無益)하니라. 조행(助行)으로는 사용(使用)할 것이로되, 정행(正行)에는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을 홍통(弘通)하여 정행(正行)으로 하려는 자(者)는 반드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질 것은 의심(疑心)이 없도다."
십팔원만초(十八圓滿抄)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3678쪽
"결국(結局)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문(法門)은 무익(無益)하니라"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을 홍통(弘通)하여 정행(正行)으로 하려는 자(者)는 반드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질 것은 의심(疑心)이 없도다" 말씀처럼.."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이 홍통(弘通)하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체(體)이고 심(心)이니라,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용(用)이고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조행(助行)이며 제목(題目)은 정행(正行)이니라. 정행(正行)에다 조행(助行)을 포함(包含)시켜야 하느니라 운운(云云)."
어의구전 794쪽
"정행(正行)에다 조행(助行)을 포함(包含)시켜야 하느니라" 말씀처럼..
"결국(結局)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문(法門)은 무익(無益)하니라. 조행(助行)으로는 사용(使用)할 것이로되, 정행(正行)에는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중략>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을 홍통(弘通)하여 정행(正行)으로 하려는 자(者)는 반드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질 것은 의심(疑心)이 없도다."
십팔원만초(十八圓滿抄)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3678쪽
"결국(結局)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문(法門)은 무익(無益)하니라"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을 홍통(弘通)하여 정행(正行)으로 하려는 자(者)는 반드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질 것은 의심(疑心)이 없도다" 말씀처럼..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면 멸(滅)하지 않는 죄(罪)가 있겠는가, 오지 않는 복(福)이 있겠는가. 진실(眞實)이고 심심(甚深)하니 이를 신수(信受)할지어다."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 497쪽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말씀처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창제근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