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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바짝 차려!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참 안녕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데 있습니다. 자는지 깼는지, 정신이 흐리멍텅해서 뒹굴고 있는 것이 참 건강이 아닌 것같이, 한 나라의 씨알들이 나라가 어떤 길을 달리고 있는지, 문명이 어떤 물결 위를 밀려내려가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고, 그저 밤낮으로 자고 깨고 먹고 노는 일에만 멍청하고 있는 것이 참 평안은 아닙니다. 정신의 초점을 모아 내 선 자리가 어디며, 내 잘못이 무엇이며, 내 할 의무가 무엇인지, 거기 대해 다급한 마음을 가진 것이 정말 산 씨알이요, 살아있어 역사를 지어갈수 있는 씨알입니다.
나는 지난 일년 동안 소위 3.1사건(분명히 3.1절에, 3.1정신을 기억하고 한 선언이었는데, 어째서 굳이굳이 명동사건이라는지, 그 심리를 모르겠습니다. 누가 무슨 간악한 말장난을 한다 해도 씨알의 가슴에서 금강촉으로 새겨진 3.1의 자죽을 긁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으로 인해 재판받으러 왔다갔다 하노라고 거의 모든 시간을 다 써 버렸고, 이제 5년 징역 5년 자격정지에 형집행정지라는 처분을 받았습니다만,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해 죄를 지었다는 생각과 그 때문에 공민권을 정지당했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나는 재판을 받을 때마다「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서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제 손으로 독배를 잡아다려 마신 것은 결코 그 법을 옳다 생각해서도, 자기가 정말 죄를 지었다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기의 옳은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자기를 죄주고 죽이는 그 아테네 국민을 불쌍히 여겨 그들로 하여금 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재판에 왔다갔다 하는 동안 나는 여러 외국 신문, 잡지의 기자들을 만났는데 국내의 기자는 정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신문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 민주투쟁의 전망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나는 내게 조직의 능력과 성패의 앞을 내다볼만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솔직히 말했고, 그러면서도 나는 성공이거나 실패거나 그 때문에 마음을 쓰는 일은 없고, 다만 이것이 내 할 의무이기 때문에 할 뿐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악에 대해 싸우는 것) 옳은 이상, 몇 해가 되겠는지 몇 십백년이 되겠는지 그것은 알 수 없어도, 마침내는 우리가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에는 까딱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낯빛을 고쳐서 알았노라 동의를 했고, 그중 어떤 사람들은 새삼 손을 꽉 쥐어주고 눈물을 닦기까지 했습니다.
책임은 네게
씨알 여러분, 착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내가 이 말씀을 왜 하는지 아십니까? 책임을 우리가 스스로 지자고 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생각이 한층 깊어집니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아테네의 법관이나 정치가가 아니라 그 씨알이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빌라도나 제사장들이 아니라 유대의 씨알이었습니다. 참새 하나도 하나님이 허락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질 수 없는, 이 정의의 법칙이 다스리고 있는 이 우주에, 제까진 놈들이 무엇이기에,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꾀가 있어, 감히 철인 소크라테스를 죽일 수 있으며,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달 수 있습니까? 사람이 아무 사심이 없이 이것이 참이라하는 결정의 확신 위에 설 때, 누구나 다 스스로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음을 압니다. 목에 칼이 견주어지는 순간에도, 그때야말로 정말, 예는 예라 하고 아니는 아니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뺏을 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 뺏는데 누가 감히 뺏습니까? 모가지와 정신은 서로 딴 것입니다. 목이 떨어진다고 자유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도 맨발로 세계의 거리를 걷고 있지만, 그놈의 궤변학자들을 강아지로 부려먹던 정치가들은 오늘 어디 있습니까? 스물 한살에 신앙에 들어가, 겨우 서른 두 살에 죽게됐던 승조(僧肇)의 유명한 글귀 아십니까?「이수림백도(以首臨白刀) 유여참춘풍(猶如斬春風)」이라 했습니다.〈목을 내밀어 흰 칼날 받으니 제법 봄바람을 베는 듯 선뜻 지나가는구나〉그렇습니다.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죽을 수 없는 정신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죽을 수 없는 정신의 사람들의 몸이 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의 말대로, 그런 사람들의 있을 곳이 이미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씨알이 그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정신이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하면, 씨알 속에 사는 것입니다. 씨알이 그를 받아주는 한 그는 씨알 속에서 새처럼 참을 노래하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씨알이 자기를 버리는 날 그는 구차한 육신을 그 속에 붙여두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떨어지는 별처럼 몸으로써 씨알에 대해 항의를 하고 제 영원한 집 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목숨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명령입니다.”(요한 10;1718)
非我也라 兵也라
씨알 여러분, 귀를 불고 들으십시오. 내게다가 5년 징역,5년 자격정지를 선언한 것은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형집행정지 처분을 한 것도 여러분입니다. 징역을 시키면 시켰지, 또 정지처분이란 무엇입니까? 구차합니다. 시시합니다. 악하려거던 아주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고, 선하려거던 선선히 선하지. 선도 악도 아니게 그게 무엇입니까? 70 아니라 100살이라도 징역할 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정부라 하십니까? 대통령의 지시로 된 것이라 하십니까? 모르는 말씀입니다. 맹자의 유명한「非我也라 兵也」라는 말 아십니까? 사람을 칼로 죽여 놓고, 책망을 하면 대답하기를「뭐, 내가 죽였나, 칼이 죽였지」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때의 임금들이 관리 놈들이 백성을 학대하고 긁어먹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는, 그 책임을 물으면 그 관리들에게 돌리는 것을 지적해서 책망한 말입니다. 오늘 나라의 임금은 누구입니까?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통령이 자신을 말할 때 는「나라의 공복」이라 합니다. 요새 대통령이 새삼 충효를 강조하는 데 자기를 스스로 임금으로 생각한다면야 어찌 차마 그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옛날의 임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씨알 여러분입니다. 나라는 여러분의 나라요, 그 주권은 여러분께 있습니다. 그러면 일의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합니다. 내가 재판을 받으려 서울 길거리를 걸어 다닐 때에 상복을 왜 입었는지 아십니까? 재판관이나 대통령이 보라고 입었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일본제국에 쫓겨 다니고 공산당에 쫓겨 다니노라고 아버지의 상도 어머니의 상도 못입었습니다. 아마 보다 더 큰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 애절한 마음을 가지라고 그렇게 해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정말 큰 아버지요 큰 어머니입니까? 이 나라요 이 민족이지, 그런데 그 나라 그 민족이 나를 죄인이라 정죄하려 드니 어찌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자유가 과연 있느냐, 평등이 과연 있느냐, 평화가 과연 있느냐고, 나는 대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의 표시가 굵은 베옷, 옛날의 모든 예언자들이 일이 있을 때는 눈물로 입고 씨알 앞에 나섰던 그 베옷입니다.
대통령이나 가엾은 벼슬아치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괴롭다면 내 마음이 터질 듯하고 여러분을 향해 몸부림을 하고 싶을 뿐이지,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고 자유생각 평화생각이 나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어리석어도 물거품과 시비를 할 나는 아닙니다. 그 거품이 얼마나 가다가 꺼지겠습니까? 그 거품을 일으키고 또 꺼지게 하는 그 흐름, 맑았거나 흐렸거나, 그 흐름과 씨름을 하는 것이 내 일입니다.
대통령이요, 정치인이요, 관리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옛날 종살이에 젖은 눈에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뵐른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은 여러분 허리에 찬 큰 칼 작은 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써서 선한 일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3.1사건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칼보다는 크다는 것, 모든 칼의 주인이란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한 한 꿈틀거림이었습니다.
싸우자!
그러기 때문에 나는 싸우렵니다. 끝까지 씨알과 싸울 것입니다. 싸움은 사랑하는 이와 하는 것입니다. 짐승과는 싸우지 않습니다. 짐승과 싸우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마음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정부와 싸워왔습니다. 그것은 그 속에 적게나마 나의 어느 부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인정·이성이 있음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조금 더 참아보기는 하겠지만 3.1사건에 관련 된 인권 문제의 처리를 보고 그 믿어오던 줄이 거의 다 끊어져 갑니다. 그 이유는 잘못을 저지를 뿐 아니라,그대로 주저앉으려 하고, 주저앉을 뿐 아니라 따라가며 설명하여 합리화하려 하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어도단입니다. 믿어지는 한 가닥이 있을 때 싸움이라도 하지, 그 가는 한 가닥도 없는 때에 말을 아직도 하려는 것은 자기 아첨, 자기 기만이요, 진리에 대한 모욕입니다. 일러 말하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지 말라」했습니다.
옛날 봉건시대에 났더라면 나도 임금을 위하고 사직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웠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는 임금, 사직을 아래 두고 그보다 위에 올라와 섰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로 싸울 것은 씨알입니다. 3.1 사건의 책임도, 인권 문제의 책임도 씨알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끈미끈한 아름드리가 하늘이 뵈지 않도록 들어서는 울창한 숲 속에 가시 넝쿨이 아무리 자라라한들 어찌 자랄 수 있겠습니까? 씨알 전체가 제 권리 제 의무에 충실하여 발을 대지에 디디고 머리를 하늘에 두고 설 때에 독재와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부가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가시 넝쿨이 땅을 뒤덮은 것은 숲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은 가시 넝쿨에는 둥지를 틀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남은 그루터기를 보호하고 夜氣에 맡겨 자라게 두십시오. 그러면 가시 넝쿨은 베는 나무군 없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학은 다시 와서 새끼를 칠 것입니다.
내가 정부와 싸워온 것은 씨알의 하나로서 전체를 대표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둘을 믿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이요 아래로는 씨알입니다. 열다섯의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감히 나섰을 때 믿은 것도 그 둘입니다. 하나님에는 물론 변하심이 없습니다. 씨알 전체가 같이 하나님 편에 섰을 때 골리앗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야심을 가지고 씨알을 충동해 분열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이스라엘 씨알의 전적인 지지를 얻을 때까지 죽음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씨알이라고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씨알 전체가 지배자와 하나가 되어 잘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씨알 속에 그 죽게 된 양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몇 사람의 의로운 씨알도 없을 때는, 하나님은 한 큰 시련을 주기 위해 흉악한 적국의 손에 아주 내주어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의인을 감당 못한다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부끄러운 경험을 가진 민족입니다. 또 한 번 하렵니까?
씨알 여러분,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 갑니다. 나의 부족을 모르는 척 감히 나서서 정부와 싸웠을 때 나는 사실 씨알 전체가 지지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처사가 인간의 떳떳한 도리의 길을 벗어난 것이 분명한 것을 보고도 여러분이 잠잠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약과 침 뜸의 힘이 다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데 병이 들어간 것을 본 의사의 심정 같은 심정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싸우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인간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싸웁니까? 나는 그가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 해도 무조건 순종할 수밖에 없는 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절대 순종을 해야 하느니만큼 나는 여러분과, 곧 나 자신과,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도록 싸워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죽도록이지요. 여러분 속에 나의 있을 곳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다른 말로 해서, 내 속에 여러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말로 해서, 몸 안에서 하느님을 모실 곳이 없다면, 차라리 이 몸을 제물로 바쳐서까지라도 하나님의 품을 찾아야지요. 그러니 마음이 어찌 무겁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상하게도 신앙의 눈이 띄어 첨으로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할 때, 예레미야의 사적을 공부하는 것을 계기로 되었는데, 원지 모르게 앞에 오는 것도 그렇게 슬픈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여, 하는 말의 뜻이 뭔지도 모르고 하는 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슬픔
韓非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 들어가서 撲玉(다듬지 않은 거치른 옥돌)을 얻어 가지고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 다루는 사람을 시켜서 보라 했더니 옥 다루는 사람이 말하기를 돌입니다 했다. 왕은 자기를 속였다 생각하고 화씨의 왼 발을 잘라 버렸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들어서자 화씨는 또 박옥을 가지고 가서 무왕에게 바쳤다. 무왕이 옥 다루는 사람을 시켜 보라한즉 또 돌이라고 했다. 왕은 또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 생각하고 그 오른 발을 잘라버렸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위에 오르자 화씨는 박옥을 안고 초산 밑에 가 통곡을 하는데, 밤낮 사흘을 우니, 울다 울다 못해 나중에는 피가 흘러나왔다. 왕이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 우는 까닭을 물어 말하기를, 천하에 발 잘린 놈이 하도 많은데 네가 그렇게도 슬퍼하는 것은 웬일이냐 했다. 화씨가 대답하기를「내가 발을 잘렸다고 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배를 가지고 돌이라 하고, 곧은 사내를 가지고 거짓말쟁이라 하는 것이 슬퍼서 그럽니다」했다. 그래서 왕이 옥 다루는 사람을 시켜서 다듬었더니 정말 보배를 얻었다. 그래 그 이름을 화씨의 구슬이라 했다.”
나는 이날까지 소위 국가 권력이란 것에 걸려 옥에 가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동경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다만 조선 놈으로 난 것이 죄가 되어 유치장에 하룻밤 들어갔고, 그 다음은 오산서 교사노릇을 할 때 졸업생 둘을 몇 달 밥을 먹여 준 일이 있었더니 공산주의라는 혐의로 한 주일 가 있다 왔고, 그 다음은 정말식 국민고등학교를 하며 학생들과 같이 일하며 살았더니 독립운동 한다 해서 잡혀가 일년 동안, 그때 경찰의 말대로, 썩다가 나왔고, 그 다음은 세월이 그리 뒤숭숭하지 않을 때에 다 미리 원고 검열 맡고 잡지에 발표한 글인데,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저희 일이 어려워지니, 조선 민족이란 것을 아주 뿌리 채 뽑자는 바람에 그 글들로 말썽을 일으켜 잡아가므로 서대문 형무소에 일년 예심으로 걸려 있다가 나왔고, 그 다음은 해방후 민중들에게 끌려 자치위원회에 나갔다가 소련군이 진주하는 바람에 하룻밤 사이에 공산 천지가 되자 학생들이 의분을 일으켜 데모했는데, 그 책임 당시 문교부장이었던 내게 있다 해서 소련군에 끌려가서 50일 있다가 영 못나올 줄 알았는데, 거기도 법은 노상 없지 않은 듯, 나가라 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일년 있더니 또 이유 없이 잡아가므로 또 가서 한 달 있다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죽기로써 38선을 넘어 1947년 3월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이리로 와서 그 이듬해에 대한민국의 탄생을 보았고, 이제는 그런 일 없으려니 했는데 겨우 10년 지나 1958년 되니 이번에는 이승만 정권에 끌려 낯익은 서대문 형무소에 또 가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터무니도 없이 어마어마하 게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운운 하더니 웬일인지 또 설명 없이 나가라 해서 나왔습니다. 5.16 정권에 대하여서는 처음부터 반대하는 사람이니 좋아하지 않을 것은 정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반대하는 것은 조금도 무슨 악의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나는 옛 어진이들의 교훈을 지키자는 사람인데, 동서고금을 통해 군인이 정치에 참여하면 안된다는 것이 하나의 철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장래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자는 의미에서 경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가 아닌가는 17년의 역사더러 말하라면 될 것입니다. 그후 한일회담, 월남참전, 삼선개헌 등등 사건을 통해 남산에 출입한 것은 열 번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늘 무사히 돌아왔는데 이번만은 달리 영광의 형을 졌습니다.
그 속에서 공동인자를 뽑아낸다면「양심은 못속인다」뿐입니다. 나는 아직 화씨 같이 두 다리를 잘리지는 않았습니다. 또 그 같이 삼일 삼야를 울어 피가 나오도록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내 발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사나이를 거짓말쟁이라 하는 것이 슬프다」하는 심정에서는 같습니다. 이날까지 번번이 무사히 돌아온 것도 이「양심은 못속인」때문이지만, 또 번번이 끌려가고 종시 문제가 되고야 만 것도 이「양심은 못속인다」입니다. 사람은 양심 때문에 살고 양심 때문에 죽습니다. 화씨는 두 발을 잘리우고 박옥은「帝王璞」이 됐습니다. 사람은 살고 죽음으로 양심을 닦아 영원하신 하나님의 목에 목걸이를 겁니다.
씨알아 나오너라,나와 싸우자!
씨알의소리 1977년 4,5월호 63호 (금지된 씨알의소리 생각사)
저작집30; 9-117
전집20; 8-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