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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시요,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원의이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죽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서한 중에서...)
▼신부님의 강복과 함께 순례를 떠납니다.
▼마원성지
박상근 마티아 복자와 칼레 신부님의 우정어린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사랑하고 순명하는 평신도와 사제, 두 분의 우정...
▼진안리성지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선종지
▼문경성당 미사
인원이 몇 명 안되어 전화를 드렸더니 한 명이라도 미사를 드리겠다는 문경성당 주임신부님.
감사했습니다. 산채 비빔밥 맛있었고요.
정바오로 형제의 독서... 성령이 임하셨는지 주님의 말씀이 귀에 속 속 들어왔습니다. 라우렌시오 총무님 해설하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여우목성지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이신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의 삶의 터전
▼열정적으로 성지 해설을 해주시는 이열 아오스딩 형제님(문경성당)
▼홍 베로니카 치명터
"믿고 있는데 어찌 안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 그렇게는 못한다"
끌려가던 도중에 80 노인으로 인해 행렬이 늦어지자 포졸이 안 믿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하자 하신 말씀. 화가 난 포졸이 그자리에서 바로 홍베로니카를 죽였다.
▼연풍성지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이며 묘소가 모셔져 있는 곳
[여우목성지]
·간략설명 성 이윤일과 서치보 가정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96
·전화번호 (054)572-0531
·팩스번호 (054)572-0530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gcatholic
·관련기관 문경 성당 (054)572-0532
·관련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청운로 95
여우목 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인근의 교우촌인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와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여우목 교우촌은 소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청북도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북도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여우목은 대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이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년)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서치보 요셉(徐致輔, 1791-1840년) 가정도 충청도 청풍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 여우목 교우촌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또한 1827년 정해박해 때 멍에목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朴~, 1757-1827년)와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1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朴士儀, 1792-1839년) 가정도 고향을 떠나 단양 가마기에서 살다가 여우목과 건학 교우촌과 인접한 멍에목으로 피신 와서 살았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공소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부친 대(代)부터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의 본분인 수계 생활에 충실하였다. 상주 갈골에서 살다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처갓집 식구들(순교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 문경 여우목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이윤일의 아들인 이 시몬은 부친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 건학 교우촌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윤일은 마을의 대표자를 묻는 포졸들에게 선뜻 나서 신분을 밝히고 가족 8명을 포함해 모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문경에서 3일 후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았다. 여기서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 모친과 누이는 풀려났지만 그는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윤일은 대구로 이송되기 전 자손들을 불러 놓고, “나는 이제 치명하러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고 훈계한 후 치명하는 장소까지 따라오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결국 대구로 끌려온 지 3일째 되는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함께 잡혀온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와 함께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관덕정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후 아들 이의서와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12년 경기도 용인군 묵리(먹뱅이)에 살고 있던 동생 이시영에 의해 이동면 묵리 산으로 옮겨 모셨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이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聖 이윤일(李尹一) 요한 (1815~1867)
성 윤일(尹一) 이제현(李齊賢) 요한은 충청도 내포지역의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태어날 당시 시작된 을해박해(1815년)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많은 이들이 잡혔고 그중에 몇 명은 경상감영에서 옥사하였다. 대구지역 박해 시작과 더불어 성인은 탄생하신 것이다. 성인의 부친 대(代)에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성인의 가족들은 신앙과 용기로 항상 빛났던 사람들이었다. 성인의 아들 시몬은 아버지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에 예천 건학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하였다.
성인은 키가 큰데다가 길고도 숱이 많은 수염까지 기르고 있어 위풍이 당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인의 성품은 순량하여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한 번도 성내는 일이 없었던 성인은 부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동네 외인들이 그를 위하여 효자문을 세워야 마땅하다고 할 정도였다.
성인은 고향이었던 홍주를 떠나 상주 갈골에 살다가 부친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성인의 처가 집 식구들(순교자 박사의 후손)이 많이 살던 문경 호항리(여우목)로 이사를 갔다. 여우목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성인은 온후한 성품과 독실한 신앙으로 수계 생활도 열심히 하였다. 성인은 그곳에서 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천주교회에 입교시켰고 신자들을 잘 이끌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포졸들이 여우목으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올 때가 온 것이라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의 대표자가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 하고 묻자 성인은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포졸들이 와서 성인의 손을 묶자, 성인은 침착하게 “이렇게 아니하여도 나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수갑을 늦추어 달라.”하였다. 그리고 성인의 여덟 식구와 동네 교우들을 합쳐 약 30여 명이 문경 아문에 갇혔다. 당시 문경 현감은 신자들을 잡지 아니한 죄로 면직이 되어 현감 자리는 공석 중이었다. 현감이 없자 포졸들이 성인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하였고, 때리지는 않았지만 세간은 다 빼앗겼다. 문경에서 3일 동안 있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갔다. 성인이 상주 진영에 잡혀 있을 때 잡혀 온 이들은 약 70여 명이 되었다. 그 중에서 약 20여 명 이상이 치명하였다.
이미지 상주 진영에서 성인은 큰 칼을 쓰고 차꼬를 채인 상태로 한 두어 달 갇혀 있으면서 문목을 받았다. 성인이 상주 감영에 있을 때 원(牧使) 앞에 3차례 문목을 받는다. 원이 “교우들이 어디에 있느냐?” 묻자 “교우들은 여기 들어 온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지금도 성교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아니 할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원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네가 회장이니, 네만 아니하면 다른 사람도 아니할 것이다.” 포졸들에게 큰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에 성인의 두 살 난 손녀가 죽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성인은 교우들 중에서 마음이 변하는 자가 있으면 열심히 권면하여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고, 성인의 지도로 함께 옥중에서 아침저녁 기도를 그치지 않고 하였고, 항상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상주감영에서는 끌고 온 신자들을 세 편으로 갈라놓는다. 빈곤한 사람과 여자와 어린 아이들처럼 풀어 줄 사람,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을 하여 죽어야 될 사람, 성인과 한실 공소 회장 김예기 형제처럼 사학 괴수라 하여 따로 사형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 때 성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와 모친과 누이가 풀려 나온다. 그러다가 성인이 대구로 참수 당하러 갈 때 자손들을 불러 이렇게 훈계한다. “나는 이제 치명하려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 그리고 치명하는 장소에는 따라오지도 말고 치명하는 장면은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인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다시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성록’ 고종 병인년 11월 29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금 경상 감사 이삼현의 장계를 보니, ‘문경 고을에서 잡힌 사학 무리 중에 이제현, 김예기, 김인기 세 명은 사학에 매우 깊게 빠진 자들이니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많이 모은 뒤 효수(梟首)하여 모든 사람들을 경각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사학 무리들을 먼저 목 베고 후에 장계함이 일찍이 행한 일이 있은즉 이후로는 굳이 품처하지 말고 해당되는 율로써 형벌을 행한 후에 장계하여 드릴 것을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의정부에서 왕께 아뢰니 왕이 윤허하였다.
이미지 상주에서 경상감영으로 끌려온 지 3일 째 되는 날,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에 각각 그 날 음식상을 한 상 씩 받았다. 그러자 김회장 형제 두 사람은 먹지 않고 울었다. 그러자 성인이 “천주가 먹으라 하신 음식을 먹지 않고 울긴 무슨 연고이냐?”며 권면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다 먹었다고 한다. 성인과 김예기, 김인기 형제는 영장이 먼저 나와 앉아 있던 관덕당 앞으로 묶인 채 끌려 나왔다. 사형 터에는 막대기 넷이 땅에 박혀 있었다. 포졸들이 묶인 것을 풀어 주었고 첫 차례로 성인이 죽을 때가 되자 성인은 자기 주머니에서 엽전 닷 냥을 자신에게 쓸데없는 것이라며 희광이에게 주면서 “여보게 이것 받아 주게. 내가 죽는 마당에 이것을 품속에 넣은 채 죽겠는가? 저승에서는 이런 것이 필요 없다네. 그러니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들에게 주는 게니 받아주게. 자네들이나 나나 고생하지 않기 위해 한 칼 단번에 내 목을 잘라주게.”고 하였다. 그 후 희광이가 성인을 엎드리라고 하면서 손으로 치자, 성인은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성호를 긋고는 스스로 엎드려 나무토막을 목에 괴고, 사지를 각각 잡아매라 하였다. 이렇게 성인은 관덕당 형장에서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당시 성인의 나이는 52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처음에는 이곳 관덕당 형장 근처에 임시로 묻혔다. 성인의 머리를 따로 효수하지 않아서 몸과 함께 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두 달 후(음력 2월) 성인의 아들 마티아와 마티아의 형과 외숙부와 이 토마스가 와서 봉분을 크게 만들었다. 2년 후 후손들에 의해서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다가 그 후손들이 경기도 용인군 묵리(墨里 = 먹방이 = 먹뱅이 = 묵뱅이)로 이사를 가서 1912년에 그곳으로 이장을 했다. 이미지 그 후 다시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성지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이장했다. 1985년 대구교구 신자들이 미리내 성지 순례를 할 때 해설자에 의해서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된 18위 중 한 분이 성인이라는 것을 듣고, 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신부님이 조사 검증하고 확인하였다. 성인의 묘소가 확임 됨에 따라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와 수원교구장인 김남수 주교, 미리내 성지 정행만 신부의 합의에 의해서 대구대교구로 이장하게 되었다. 대구로 이장된 성인의 유해는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구내 성모당으로 안치했었고, 대구대교구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이날 성인을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모실 것을 반포하셨다. 그러다가 성인의 유해는 1991년 1월 20일(일)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하였다.
한국의 병인 순교자 24위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김수환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1968년 10월 6일 시복될 때, 성인도 복자가 되었다. 그 때 교황은 바오로 6세였다. 이후 성인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서울 여의도에서 더불어 시성(諡聖)되셨다. 성인은 우리나라 103위 성인 중 가장 끝에 소개되어 있는 분이다.
※ 성 이윤일 요한과 관련된 순례지
가. 충남 홍주, 덕산
나. 경북 상주 갈골
다. 경북 문경 여우목
라. 경북 문경 관청
마. 경북 상주 감옥터
바. 대구 중구 아미산(관덕정)
사. 대구 서구 날뫼(비산동)
아. 경기 용인 묵리(먹뱅이, 이동면)
자. 경기 용인 미리내
차. 대구 중구 성모당(남산동)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
관덕정 형장 근처에 가매장 ⇨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으로 이장 ⇨ 1912년 경기도 용인 묵리(먹뱅이) ⇨ 1976년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 ⇨ 1987년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 ⇨ 1991년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안치
[진안리성지]
진안리는 영남의 관문인 새재와 이화령 고개 갈림 길에 위치해 있으며 사목 보고차 서울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이다. 12년 동안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포교 활동을 한 위대한 사목자의 선종지이다.
'새재'라고 하는 조령은 옛날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이다. 그러므로 조선조 숙종 34년
(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 1관문인 주흘관, 제 2관문인 조곡관, 제 3관문인 조령관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과거 보는 과객은 물론, 최양업(1821~1861, 토마스) 신부와 칼레(Calais, 1833~1884, 아돌프)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구교우 집안에 태어났으며 그는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최방제(1820~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가서 신학 공부를 한 뒤 한국 교회에서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1849년 4월 15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해(1849년) 12월 변문을 떠나 입국에 성공하였다. 실로 마카오 신학교를 떠나 조선 귀국을 시도한 1842년 6월부터 계산해 볼 때, 그 다섯 번째인 7년 6개월 만에 입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 후 12년 동안 매년 5,000~7,000리를 걸어 다니거나 또는 말을 타고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교우촌과 외교인들이 살고 있는 반촌과 빈촌을 사도 바오로처럼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찾아 다녔고 그렇게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59년 말부터 1860년 경신박해를 맞아 경남 언양의 간월산 동굴에서 3개월간 피신을 하였다.
마침내 1860년 8월 박해가 끝난 후에 매일 80~100리를 걸으면서 밀린 교구 방문과 사목 활동을 하고서 그 이듬해인 1861년 사목 보고를 하러 가다가 문경 새재와 이화령 고개의 넓은 갈림길인 문경시 진안리의 오리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와 장티푸스의 합병증으로 문경읍내 교우 약국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선종하기 전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 신부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최 신부의 시신을 푸르티에 신부의 지도로 상여를 꾸며 배론으로 운구하여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뒷산에 안장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
같은 시기의 선교사들의 서한에도 구체적인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대의 증언 자료를 가지고 선종 지역을 추정하는데, 현재까지 문경이었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청주교구 진천군 지역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경 지역 내에서도 문경 새재의 주막이 있던 진안리와 문경 읍내 약국 이씨 집에서 선종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설에는 최 신부가 문경에서 발병하였으나 말을 타고 배티 또는 진천군의 어느 교우촌까지 버티며 가서 결국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와 관련된 논란은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2007년 12월에 펴낸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에 상세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마원성지]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만큼 험한 고갯길, 해발 1천17미터의 새재에는 그 옛날 박해를 피해 산으로 산으로 깊숙이 숨어들어야 했던 슬픈 탄식이 서려 있다. 충주에서 문경, 괴산에서 제천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올라야 하는 새재는 영남의 관문이다. 그 밑으로 30여 분 거리에 위치 한 경북 문경군 문경읍 마원1리는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빼앗긴 박상근 마티아 등 30여 명 순교자들이 살았던 신앙의 터이다. 본래 조선 시대 마포원(馬包院)이 있었던 터라 '마포원','마원' 또는 '마판'이라고 불린 이 지역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신동면 우어리 일부를 병합해 '마원'이라 하고 문경군에 편입돼 오늘에 이른다.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들면 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악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그러던 중 이곳에 박해의 회오리가 불어온 것이 1866년 병인년, 서슬 퍼런 탄압은 새재를 넘어 이곳 마원에까지 들이 닥치게 됐고 이 때 마을의 교우 30여 명은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돼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고 전한다. 특히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이곳에 남아 있어 생생한 신앙의 숨결을 되새기게 해준다. 문경 토박이로 아전이었다고 전해지는 그는 아마도 신유박해(1801년) 이후 이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의 신자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지방인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입교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칼레 신부의 전교 기록에 보면 문경에서 가까운 백화산 중허리에 자리 잡은 한실에 신자 집이 서너 집씩 무리 지어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 신자들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칼레 신부는 그의 출중한 신앙심과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은신시킨 용기에 대해 치하하고 있다. 결국 병인년 12월에 체포된 그는 평소 친분을 가졌던 문경 현감의 간곡한 배교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칼을 받았던 것이다.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발굴된 것은 1985년 9월의 일이다. 마원리 박씨 문중산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가 있었는데 여러 정황과 중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치명 일기」에서 말한던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인 것으로 확인됐다. 안동 교우는 마원에 순교 성지를 조성키로 결의하고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다각적인 성지 개발 계획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한편 순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현양 대회를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복자 박상근 마티아(1837-1867.1)
출생지:경상도 문경
신분:아전
연령:30
순교형식:교수
순교지:경상도 상주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박 마티아는 평소에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주곤 하였다. 이후 그는, 칼래(N. Calais, 姜)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그해 3월 중순경에 좁쌀을 사려고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에 갔다가 칼래 신부를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와서 숨겨 주었다.
3일 뒤 박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으려고 다시 한실로 갔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면서 박 마티아에게 집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되돌아와 있던 박 마티아는, 얼마 뒤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를 봉행한다.”고 명백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박 마티아는 형벌을 받고 옥으로 돌아오면 함께 있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그러한 모습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렀다. 박상근 마티아는 마침내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하기 직전에 박상근 마티아는 성호를 긋고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순교한 다음,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가 고향에 안장하였다.
첫댓글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육손이 엄마의 기도 - 최인호의 '흑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