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 황선영
공간을 초월한 인간은 없다. 다 매여 있다. 자궁에서 시작해 수 없는 곳을 경험하다, 끝엔 다시 좁고 음습한 곳으로 들어간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인간은 자연 상태에 있던 돌이나 모래 따위의 쓸모를 알아봤다. 저들은 머리가 참 비상하다. 거기에 자기 공간을 향한 엄청난 소유욕이 기술을 발전시켰다. 다양한 건축물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 공간이 있다. 나다. 사람이 들어와 가정을 꾸려 살면 집이라고 한다.
나는 2007년 4월 생이다. 사람 나이론 아직 애지만 건물은 그렇지 않다. 특히 아파트는 노땅 취급을 받는다. 외벽 칠도 다시 했고 창틀 실리콘도 삭아 교체했다. 장판과 벽지도 구식이다. 장마철만 되면 이 집 여자는 살림살이에 신경질을 부린다. 싹 다 바꾸고 싶단다. 부엌, 화장실 리모델링 얘기를 여름 내내 입에 달고 살았다. 돈이 없는 것인지 가을이 주는 산뜻한 기분에 잊어버린 것인지 요샌 조용하다.
앞으로 부흥산, 뒤로 부주산이 있다. 저것들은 늙지도 않고 철철이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신의 창조물과 인간의 제조물 차이랄까? 저 앞쪽으로 영산강 하구둑이다. 여기 103동에서는 바다가 병아리 눈물만큼이나 보인다. 이걸 어떤 부동산은 '오션뷰'라고 광고했다. 거실, 부엌, 방 세 칸, 화장실 두 개, 앞뒤 베란다. 내 안에 부모와 자녀 사이인 여섯 명이 들어와 산다. 내가 만들어지고 네 번째 이사 온 가족이다.
건물은 대부분 남자의 힘으로 짓지만 공간은 여자가 만든다. 이 집 여자가 내 색깔을 결정한다. '미니멀 라이프' 뭐 그런 걸 추구하나 보다. 공간을 차지한 사물이 간단하다. 거실에는 소파도 없이 작은 텔레비전만 덩그러니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 아줌마는 정리정돈에 약하다. 버리고 채우지 않는 것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요새는 뭘 하는지 작은아들 방에 틀어박혀 나올 줄 모른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책과 노트북을 번갈아 보며 웃다, 울다 한다. 그러다 식구들이 올 때쯤 부랴부랴 집안일을 한다.
나는 술 안 마시는 남자 어른을 처음 봤다. 술로 싸우는 부부가 여럿이었다. 벽에 상처도 있다. 이 인간은 퇴근하면 책장으로 둘러 쌓인 자기 방에 엎드려 핸드폰을 하다가 저녁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본다. 그가 거실 복판에 누워있으면 아이들은 다 각자 공간으로 들어가 버린다. 기습적으로 피부 접촉을 시도하거나 장난을 거는데 받아 주는 자식이 없다. 쓸쓸한 중년이다. 그렇게 잠을 자고 다시 아침이면 마누라 뱃살과 궁뎅이를 쪼물딱거리다 출근한다.
아이들이 자랐다. 만나, 처음 한 말이 "와, 넓다" 였다. 신나서 방방 뛰고 구석구석 누볐었는데. 더이상 나에게 감동하지 않는다. 이젠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올라오는 일도 없어졌고 벽에 작품을 남기지도 않는다. 거실에 모여 노는 일마저 드물다. 조용하니 심심하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침대 2층이다. 천장과 가까워 다락처럼 아늑하고 침대와 창 붙어 있어 풍경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도 내 몸에서 이곳이 제일 좋다.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청호초등학교 6학년 연애사를 나는 다 알고 있다. 매트리스 아래에 돈이 있다. 누구 것인지 말하지 않겠다. 아이들은 부모 눈을 피해 무럭무럭 크고 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난다. 고스톱을 치러 모였다. 이 사람들은 느닷없다. 적막이 흐르다가도 누군가 '화투'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면 눈에 생기가 돈다. 초등학생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모두 진지하게 임하고 돈은 철저하게 오간다. 나한테서 아직 도박중독자는 배출되지 않았는데 걱정스럽다.
가스통 바슐라드라는 사람이 '집이란 풍경보다도 한 영혼의 상태'라고 했다. 나는 내가 아니고 저 인간들이다. 모쪼록 건강하길.
첫댓글 황 선생님, 혹시 푸르지오 사시나요? 저도 푸르지오 사는데, 조금 비슷한 느낌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하하
황선생님 댓글에 또 웃습니다.
애시앙이에요. 하하.
아! 이제 보니 푸르지오는 리버 뷰네요. 그래도 이웃사촌이네요.
단란한 가족 이야기군요.
재미있어요.
늘 둥근해가 떠오를 집이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집이란 공간을 재미있게 표현했네요. 남다른 시선이 돋보입니다.
진짜요? 고맙습니다.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멋진 발상이네요. 재밌어요.
고맙습니다!!!
청호초 6학년 연애사가 궁금하네요.
저도 궁금해요. 하하.
언제쯤이면 저도 버리고 채우지 않는 것으로 제 약점을 보완하게 될까요?
독특한 시선 따라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늘 버리면 내일 그만큼 다시 쌓이는 마법 같은 살림살이.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집이 이런 존재군요. 재미있게 잘 쓰셨어요.
저는 아직 어린가 봐요. 5문단 마지막 문장 읽다가 부끄러웠어요.
저는 다 커서리. 하하하하하.
역시 재밌네요.
고맙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황선영쌤! 하하하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파트는 이런 생각하면서 사는군요.호호
고맙습니다. 선생님!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내가사는 공간에 대해서 다시 힌 번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버리고 채우지 않는 것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것. 흠!! 괜찮은데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