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우면 당당하게 / 최종호
엊그제, 점심시간을 앞두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뭣 한가? 텃밭을 경작할 생각이 있으면 경로당 뒤쪽으로 오소.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네.” 자신은 지금 땅을 파고 있다고 했다. 아파트 한가운데에 있는 경로당 앞은 몇 번 지나쳤지만 뒤쪽에 빈 터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반신반의하며 서둘러 나갔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있었다.
그의 말대로 빈터는 세 구역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첫 번째 구역에만 너대섯 명이 상추 몇 포기와 고추 몇 개를 심어놓았지, 두 곳은 전혀 손 대지 않은 상태다. 친구는 일하다 잠시 쉬고 있는 듯했다. 밭의 크기가 고작해야 가로, 세로 1.2미터쯤 밖에 되지 않는다. 꼭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넓게 해도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조금씩 재미로 하잔다. 그게 처음 시작한 사람의 뜻이라며. 그 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지 도중에 와서 자신은 바로 앞동 1층에 사는데 예쁘게만 만들면 된다며 훈수를 했다.
잠깐 얘기하다 친구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그의 아내가 호미로 땅을 팠다. 돌멩이와 자갈은 가장자리로 빙 둘러 경계를 짓는 데 썼다. 채소를 심어 놓은 밭도 모두 그리 되어 있다.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인다. 나도 손잡이가 짧은 쇠스랑을 빌려 땅을 팠다. 텃밭에 작물을 심어본 사람은 역시 다르다며 칭찬한다. 작은 면적이지만 땀이 났다. 30분쯤 지났을까 열두 시가 가까워진다. 오후에 일정이 있어 대충 마무리하고 먼저 들어왔다.
오후 늦은 시각, 집에 와서 낮에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궁금한지 같이 가보자고 한다. 맞은편에 아들 땅에 심을 것까지 대충 무슨 모종을 얼마만큼 살 것인지 얘기했다.
다음날 아침, 화순 시장으로 갔다. 가게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 차례가 되자 이것저것 주문했더니 복잡한지 주인아주머니가 종이에 적어 주란다. 뿌린 다음 바로 심어도 되는 거름 한 포와 호미도 샀다. 철물점을 찾아 삽, 레기, 물조루, 작업용 장갑까지 장만했더니 돈이 꽤 들어갔다.
집으로 오자마자 텃밭으로 갔다. 삽으로 깊게 파고 거름을 골고루 뿌린 다음 레기로 흙을 골랐다. 이랑이 만들어진 곳에는 아내가 모종을 심었다. 한참 진행하고 있는데 “그만, 그만하세요.”라고 소리치며 관리소 아저씨가 뛰어온다. 그러더니 팔로 엑스(X)자까지 해 보인다. ‘해도 괜찮다고 허락 받았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
관리사무소에 민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거름을 뿌리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관리사무소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있냐?”라며 빨리 가보라고 전화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입주자 대표 회의에서 활용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더 이상 하지 말란다. “그럼 이 모종을 다 버리란 말인가요? 이 코딱지 많한 곳에 5만원이 넘게 투자했는데.”라고 맞받았더니 그 민원인이 지금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것이라며 자기 사정을 봐주란다. 그러면서 저녁에 심으면 어찌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단 알았다며 정리하고 집으로 왔다.
아내는 “민원을 넣은 사람이 참 못났다.”라고 하며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그리 부러우면 자신도 빈 땅을 차지하고 심으면 될 일이다. 어느 세월에 규정을 만든다는 말인가, 공평하게 구획을 정리하고 희망자를 모집하는 것은 또 어떻고? 올해는 이미 늦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온라인 공부를 마치고 거실에 나갔더니 열한 시에나 나가자고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슨 도적질이라 되는가? 얼른 심고 와서 쉬는게 나아.”라고 했더니 민원인이 쳐다보면 어떻게 하냐며 아무도 없는 시각이 좋겠단다. 그러려면 혼자 가라고 했더니 그리할 수는 없다며 내 뜻에 따랐다. 대신 물은 주지 말자고 했다. 다음날 비가 예고되어 있을뿐더러 동네방네 소문내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일은 금방 끝났다. 어려운 숙제를 마친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이제 심어 놓은 것을 뽑아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날, 다행히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아내는 궁금한지 벌써 두 번이나 가 봤단다. "우리 것이 제일 잘 살고 있어요."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녀석들이 수난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첫댓글 얼마나 귀여울까 상상되어 집니다.
부디 잘 자라길 저도 바라요!
사 가지고 온 것을 버릴 수 없어 심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궁금해 나가 보는 사모님 마음 이해합니다. 하하 나쁜 짓하는 것도 아닌데 그 늦은 시간에 심다니요.
그러게요. 도둑질 한 것도 아닌데 야반에 모종 심기라니요. 하하.
아이고, 뭔 오밤중에 모종이다요.
그렇게 민원인의 관심까지 받았으니 잘 자라 수확의 기쁨을 안겨 주겠지요.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입니다. 남의 눈치 보는 거 엄청 싫어하는데.
진짜 재밌네요. 한 밤중의 모종 심기. 이미 심어 놓은 건 못 건드리지요. 커 가는 것 보는 즐거움이 크겠어요. 매일 볼 수 있어서.
심어 놓은 채소를 건드리면 천당에는 못 갈 겁니다. 그러니 손 못 대겠지요.
달 보면서 모종 심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열매 달릴 일만 남있네요.
텃밭 가꾸는 재미가 있거든요. 상추가 크면 뜯어다 조촐하게 가족 파티를 할 계획입니다. 흐흐흐.
밤에 몰래 모종 심는 모습을 상상하며 재밌게 읽었습니다.
뉴스에 나올 만하지요. 그것도 코딱지만한 곳에 심으려면서.
혹시 텃밭이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오고 가다 채소가 자라는 것을 보려구요. 재미있잖아요.
제가 텃밭을 한뙤기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네요. 잘 해결되어 텃밭에 무성한 작물 자랑도 듣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