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달리고 싶다 / 정희연
도로를 개선한다. 꾸불꾸불한 왕복 2차선을 바르게 펴고 넓혀서 4차선으로 만든다. 고속도로와 산업 단지를 연결하는 것이다. 교통을 원활하게 하고 물류비용을 줄이는 등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려고 ‘도시 계획 시설 사업’ 인가를 받아 시작되었다.
우리 현장은 기본 설계 시점에 ‘재해 영향 평가 협의’를 이행했다. 주변 지역보다 도로가 낮고 펌프장 시설이 부족해 「우수 펌프장」을 추가하는 것으로 설계에 반영했다. 비가 많이 오면 도로에 물이 고이고, 펌프 용량이 부족해 상습 침수지역에 속했다. 설계대로 시공하면 원활하게 진행되겠지만 일이라는 게 맘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펌프장은 지하에 위치해있어 구조물을 시공하려면 가시설을 설치하여 흙을 모두 걷어내야 한다. 하지만 설계와 다르게 지반이 연약하고(점질토, 뻘) 지하수위가 높아 토압과 수압을 견디지 못해, 굴착면에 변위가 발생해 바닥까지 파지 못하고 공사를 중지했다. 지질조사는 대표 되는 지역에서 제외되었고, 펌프장 규모도 적어 시험 굴착이 설계에 반영되지 않았다.
설계 변경을 해야 한다. 도면과 현장이 다를 때 이를 일치 시켜야 한다. 구조물에는 문제가 없어 가시설만 보완한다. 재설계에 들어갔다. 보링(boring)으로 지층의 구조와 상태를 조사하고, 시료를 채취하여 지반의 특성과 지층분포 그리고 물리적 특성(강도, 압축성)을 확인해, 가시설 구조의 안정성을 평가하여 크기와 형상을 결정한다. 공법(토류벽, 널말뚝, 조립식 판넬 등)도 여러 가지가 있어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 개략 공사비를 산출해 가장 경제적이면서 안전한 공사가 되도록 한다. 최종(안)이 정해지면 선택된 공법으로 공사비를 산출하여 최종 승인을 받은 다음 공사를 재개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결정되기 전까지는 토질 시험, 공법선정, 구조검토, 공사비 산출, 도면 작성 등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공사중에 일어난 것이라 시공사에서 설계를 주관한다. 이는 계약된 다음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설계와 시공비는 환급받을 수 있지만 공법 선정에 소요되는 비용 등 추가로 발생된 것은 보상이 어렵다.
여기서부터 두 편으로 갈린다. 시공사는 이윤이 되는 쪽을 선택하려 하고, 다른 한 쪽은 경제적인 측면을 본다. 서도 보는 관점이 다르다. 일머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를 고려해 적정한 공법을 선택하지만 손실이 발생되면 선택이 어려워진다. 문제점만 이야기할 뿐 해결책은 내놓지 않는다. 구조적인 안정성을 먼저 따지므로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시공사는 실행이 좋은 공법을 다른 쪽은 비용을 생각한다. 서로가 대립이 될 때 책임지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시간만 흘러간다. 회의을 하면 무거운 침묵과 시선를 피한다. 담대한 의견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는다. 결정은 누군가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것을 우려해서다.
과거에는 팀의 일원으로 일의 성공과 실패를 함께 공유했다. 잘못되더라도 여러 사람이 나누어 짊어지는 탓에 실패의 여운이 길지 않았고, 책임의 압박은 분산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업무 분장으로 책임이 분명하게 개인에게 집중되는 구조로 변했고, 업무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경계에 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애쓴다. 침묵이 이어진다. 문제만 이야기 할 뿐 해결책은 내놓지 않는다. 선택하지 못하고, 안 하려고 한다.
방어적인 태도는 단순히 회의 석상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지 않는다. 기존에 안전하다고 증명된 방법만을 반복하며, 창의적인 제안은 위험 요소로 취급되기 일쑤다. 이로 인해 개인과 팀은 발전 가능성을 잃고,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 결과과 뻔히 예상 되지만 서로 외면한다.
책임은 누구에게나 무겁다. 하지만 그 무게를 피하려 할수록 일을 더 지연되고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오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책임의 실타래를 풀기보다는 그것을 더 촘촘히 얽어버린다. 상급자는 결정을 미루고, 후임자는 지시를 받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는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고수한다. 폭탄 돌리기를 하듯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식이다. 안전한 길도 갈수록 좁아지고, 창의성을 찾는 것도 어려워져 간다.
대학 동창인 혜완, 경혜, 영선은 항상 함께 다니면서 스스로 현명하고 강인하며 독립적인 현대 여성으로 자긍심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은 결혼 이후 여성으로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갈등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는다. 남편에게 의지 하게 되고 때론 우선 순위를 남자에게 양보하면서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그들이 자립을 택했더라면 더 좋은 환경으로 달라졌을 것인데, 그들은 자기를 찾지 못한 채 성공한 남편 뒤에서 안전을 택하다, 현재를 불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변한다. 공지영 작가가 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내용이다.
‘말’은 달리고 싶은데 윷을 던지려 하지 않는다.
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딴 세상을 보는 것 같아요.
강하지 않게 유연하게 쓰려고 했는데, 주제에 다가서다 보니 조금 많이 나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와우, 말은 달리고 싶은데 윷을 던지려 하지 않는다.
멋진 표현이군요.
건설의 과정에도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걸 처음 압니다.
나랏 일 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아직도 끝이 없지만 요. 그런가요? 쓰면서 얻어 걸린 겁니다. 고맙습니다.
글이 멋집니다. 선생님.
많이 찔렸어요.
저도 책임 공포증이 있어서.
이리저리 피할 생각만 하거든요.
한 주 꼬박 채워 올려도 손 볼 곳이 많아요. 아직 갈 길이 멀어도 선생님의 글을 보며 힘을 내 봅니다. 함께라서 좋아요.
교수님의 칭찬이 떠오르는 글입니다. 무거운 내용을 깔끔하게 잘 쓰셨네요.
선생님의 홀로서기를 응원합니다. 멋지세요. 그런데 이번 주 글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