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2 제17회 황우 이준범 창작기금 수상자 --- 박종현 / 대표작
쥐불놀이 / 외 5 편
겨울 들녘에서 묵시록 읽고 있는 바람소리 들린다
책갈피마다 서성이는 빈 그루터기 소유를 벗어 버린 계절이 맑은 햇살에 몸을 씻고 다시 드러눕는다
누구든 한 번은 저무는 법 샛별 같은 깨달음에 눈뜰 때까지 허기로 저무는 들판 내달으며 쥐불을 놓던 내 심심한 유년이 흙바람 속으로 자물려 와 눈을 감는다
불티가 난다 낯익어 외롭잖은 허공으로 꿈의 질량만큼 가볍게 날아오르는 불티,
아이들은 청보리 발목을 붙든 추위 녹을 때까지 떼고함으로 동맥을 덥히며 봄을 건지다 지순한 눈빛 가득 하늘을 담고 불 꺼져 가는 깡통 곁에서 나이를 먹었지
불티가 난다 어지러운 세상 위에 엎드린 겨울 한복판 사지 굳은 샛강 언 피는 언 채로 역사를 적고 타고 남은 재속으로 스며드는 낯선 문명 물이랑마다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이 켜로 쌓인 채 시린 목숨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녘 가득 살얼음으로 꿈을 숨긴다
천 년을 발돋움해 온 들녘의 가슴팍 설익은 삶을 가둬놓은 시멘트집들만 널린 채 겨울 묵시록 시퍼런 목청이 전깃불을 켠다
탱자나무 울타리
넘을 수 없는 벽이라며 우리가 돌아설 때 새들은 견고한 벽에 몸을 던지며 둥지를 튼다 우리들 볼 붉은 과즙의 안락을 위해 총총히 심은 탱자나무 은밀히 심은 자를 향해 가시를 키우고 있다 밤마다 제 이름 부르며 우는 새에겐 아픈 가시도 둥지가 되고 갈기 세운 바람도 노래가 되는 탱자나무 울타리 저편 이쪽이 서로 넘나들지 못하는 하늘 밑에선 짙은 절망으로 푸를 뿐이다 온종일 자유를 풀어 놓은 새떼들 텅 빈 마음 스스로 울타리에 안기는 저녁 가시벽도 포근한 둥지가 되는 저, 화엄을 보라.
메 주
동짓달 첫 번째 말날(午日)을 잡아, 살아 온 전 생애 맑은 샘물에다 몸 씻는다 몸 불은 大豆들 싹눈까지 삶겨야 羽化를 꿈꿀 수 있다는 걸 세 발 솥은 잘 알고 있다 밑발 없는 전기 밥솥으로는 거피당한 콩깍지들 살아 온 내력까지 익히기엔 아직 견문이 좁다 짓뭉개진 몸 살갗 터진 세월이 엉겨붙어 푸른곰팡이로 피어나는 날 비로소 콩들은 된장을 꿈꾼다 간장을 꿈꾼다 수수깡 흙벽 속까지 밴 始原의 냄새만 진정한 생명이다 오늘 기울어 가는 저 달이 메주 뜬 독 속에서 불러오는 배를 움키며 배시시 웃는 꼴을 또 한 번 봐야 할 텐데 햐, 고향집 사랑채 경망스럽게 일어서는 내 뒤통수를 투-욱 내리치던 메주가 방안 가득 환하구나 진실은 늘 거꾸로 매달려 산다
겨울 악견산*
산이 물 아래 있을 때 더욱 장엄하다 한번도 오르지 못한 악견산이 호수 속 내려와 앉은 내력을 퍼덕이는 산의 비늘 틈새로 건너온 바람이 전해주는 겨울 오후, 높이 오를수록 더 낮아지는 산허리께로 헛딛는 내 발자국마다 푸른 호수물이 고인다 고요함이 깊으면 가끔 길을 잃는 법 잘못 접어든 숲속 작은 돌 하나 들추면 거기 겨울을 인내하는 풀뿌리들 야윈 손을 내밀어 가파른 산행을 끌어준다 정상에 서면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산, 지금껏 숙였던 허리를 펴자 산보다 더 높아진 사람들의 오만한 머리카락들이 바람을 좇아 하늘로 치솟는다 길이 끝나는 곳엔 늘 서슬 푸른 하늘이 있었다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다 걸터앉은 바위가 차갑게 나를 꾸짖었을 때에사 비로소 걸어온 길이 다시 돌아갈 길임을 알았다 내려오는 길, 허리 숙일 줄 모르는 사람들의 발아래 낮게 수그린 산길을 신나게 밟으며 내려오다 자빠진 내 엉덩짝을 물푸레나무 가지로 휜 길이 사정없이 후려치곤 했다 호숫가 작은 바람에도 머리를 주억이는 갈대들 반짝이는 속살을 보며 떠나는 물오리떼가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깊고 푸른 물을 건너는 광경이 보였다 이 때다 물 밑 누운 악견산이 제 몸을 열어 길을 터주는 걸 본 하늘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답고 따뜻한 노을로 겨울 호수를 그리기 시작했다. 호수 바닥까지 제 몸을 낮추고도 우뚝 솟는 산의 이마 위 아슴아슴 한 송이 화엄이 피어오른다.
*악견산: 합천호 옆에 있는 명산.
양계장
백열등 밝혀 놓은 심야 닭장 속 닭들이 밤샘을 한다 강 건너 작은 도시 변두리 학교 이 땅의 미래 형광불빛으로 빛나는 학생들과 경쟁을 벌인다 어둠 쫓고 잠을 이기며 오로지 한 줌이라도 더 먹을 모이 찾는 자율학습 뽀족한 부리로 납중독 배합사료 치열하게 쪼아댄다 사육장 옆방 주인어른이 채택한 부교재 녹음기에서 운도의 ‘다 함께 차차차’가 흘러나온다 밭마당 흘린 이삭 하나 풀 섶 헤매는 메뚜기 하나 제 힘으로 쫄 줄 모르는 근시의 닭들이 신명나게 눈앞의 모이만 긁어모은다 밤샘을 해 가며 낳을 자신들 알이 노란 병아리 한 마리 품을 수 없는 무정란임을 알지도 못한 채 이 땅의 미래 위해 백열등 밝은 닭장에서 심야 모형 학습을 한다 품어도 썩달걀이 될 지식, 그 단단한 껍데기를 밤 새워 암기하고 있다.
사 육
1. 외양간 천장에서 선풍기가 혼자 돌고 있다. 언젠가 이마에 꽂힐 쇠망치 혹은 도끼의 섬찟한 종말을 예감하듯 침묵을 돌리고 있는 선풍기 소리에 암소 눈이 감긴다 눈뜨면 또 무망한 하루 아침마다 자동 작두날에 잘려나는 희망 절망한 눈꼽으로 사료를 씹는 아침은 우울하다 고향은 불임 선고 앞에서도 옷을 벗고 쓸모없는 가을이 밀수되고 있다 눈물나게 아름다이 울음짓는 까치떼가 비루먹은 고향의 전설을 쪼고 있는 이 반역의 난간에.
2. 선산이 쫓겨난다 저승집도 헐린 채 떠도는 귀신들 장맛비 할퀴고 간 샛강 바닥에 불거진 저승집 주춧돌 쓸어보며 우는 여름 쑥뜸으로 뼈마디 지켜온 안산 기슭 이웃끼리 쑥물 들어 하얀니로 웃던 인정은 구유통 밖 흩어진 사료보다 헐값이다 사육당한 구속의 몸무게만 제값이다
3. 복합사료 먹으면서 되새김질을 잊는다. 씹지 않아도 되는 어금니는 충치를 앓고 방충망 두른 외양간엔 어둠이 갇혀 있다 입가심으로 갈아엎을 땅들의 꿈도 사육되고 있다. 건너산 골프장 캐디들의 늘씬한 가랑이 사이로 빗장 없는 밤이 풀려 늘어질 때까지 쫓겨난 골프공에 맞아 피멍 울던 풀무치 노래 폐경기도 지난 묵정밭 여위어간 산골짝마다 뜨고 지는해.
4. 고향의 헐린 자궁 속은 캄캄하다 바람도 주눅들어 쓰러진 자리 별들은 어깨 처진 미루나무 끝에 서성인다. 외양간 암소 큰 눈 어지러운 밤을 들여다본다 오랜 마을 옛같이 깊은 밤 바닥까지 차오르는 어둠 씹고 또 씹어 되새김질로 먼동을 틔우면 구유 밑에 쌓인 어둠도 아침으로 풀린다.
<수상소감>
논두렁길을 수없이 넘어졌다. 동화 같은 세상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존재한다는 걸 몰랐던 어린 시절, 논일 밭일을 떠나 동화 같은 세상을 만나기 위해 고향 바깥을 향해 기를 쓰고 걸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그토록 떠나고 싶어하던 고향에서 멀리 벗어난 도시에서 살아가는 지금, 고향의 농사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어야 했던 논두렁길 그 부드러운 흙냄새에 발을 헛디디던 어린 시절이 자꾸 떠오른다. 安住하는 도시를 벗어나 자꾸만 흙길을 밟고 싶다. 이제 내 꿈은 창녕군 대합면 밤실이다. 다시 고향을 꿈꾸게 해 주신 황우 이준범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박종현 1958년 창녕군 대합면 율곡에서 태어났다. 199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 ‘쥐불놀이’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2년 <현대문학>에 추천받았다.
시집으로 <쇠똥끼리 모여 세상 따뜻하게 하는구나>가 있다. 제1회 진주문학상 수상하였으며 제17회 황우 이준범 창작기금을 받았다.
<마루문학> 주간을 역임했으며
현재 진주문협 부회장, 경남문협 이사이며 삼현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