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는 녹색 불을 켜고 / 송덕희
10여 년 전 ㄱ초등학교에 발령 받아 첫 출근을 하던 날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등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맞으러 나갔는데, 학교 앞 등굣길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다. ㅈ사거리는 외곽 순환도로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주변에 주택이 많고 도로는 좁아 차량이 늘 꼬리를 물었다. 우회할 만한 길도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바로 앞에는 300여 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덤프트럭까지 수시로 오갔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가장 많이 건너는 건널목 양쪽 신호등은 꺼져 있었다. 가운데 노란 점멸등만 깜박일 뿐이었다. 출근 차량이 줄지어 선 도로에서 아이들은 좌우를 살피다가 차가 잠시 멈추면 그 틈을 타 건넜다. 횡단보도를 가로막은 차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기도 했다. 바닥의 하얀 꺾쇠 표시가 지난 흔적을 말해 주었다. 실제로 몇 해 전에는 이곳에서 사망 사고가 일어나 방송을 타기도 했다.
나 역시 출퇴근 때면 곤욕을 치렀다. 눈치를 살피며 요령껏 끼어들어야 했고, 양보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먼저 빠져나가려 해도 뒤따르는 차량이 밀려들었고, 여기저기서 경적이 울렸다. 운전자들조차 통과하기 어려운 사거리였다. 그런 곳을 어린 학생들이 매일 건너야 한다니, 생각할수록 아찔했다. 그런데도 왜 신호등을 꺼 놓았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일주일쯤 지켜보다가 경찰청에 전화를 걸었다. 학생들의 안전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설명하고, 점멸등을 일반 신호 체계로 바꿀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경감이라는 직책을 가진 분이 다음 날 아침 직접 현장을 살펴보겠다고 선뜻 답했다. 뜻밖의 흔쾌한 반응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무언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품었다. 다음 날 약속 시간에 나가 보니 경감뿐 아니라 관할 파출소 직원까지 일곱 명이나 나와 있었다. 덩치 큰 경찰들이 나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섰다. 한 사람씩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지만, 신호등을 켜면 교통지옥이 됩니다. 이런저런 방법 다 써 봤는데 지금 방식이 최선입니다.” “학생들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운전자들 민원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반대 의견이 쏟아졌다. 차량이 내는 소음까지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혼자 맞서려니 버거웠다. “그래도 차보다 사람이 먼저 아닙니까?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지요.” 항변하듯 말하면 서너 마디가 곧바로 되돌아왔다. 점멸등으로 바꾼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나 익숙해졌고, 지금이 교통 흐름에도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신호 체계를 바꾸면 쏟아질 민원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눈앞에서 아이들이 위험하게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보고도, 그들은 결국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려 했다.
이대로 물러서면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등하교 시간에만 신호등을 켜면 안 될까요? 하루에 딱 두 시간만이라도요.”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경감은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기계 조작은 가능하다고 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운영해 보고 흐름을 살펴보면 어떻겠느냐고 내가 제안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등 시간을 조절하니까 꺼져 있던 불빛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사거리에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섰다. 달라진 신호에 당황한 운전자들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피거나 불만을 터뜨렸다. 경찰들은 내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자신들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했다. 나는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다음 날부터 여유를 갖고 지켜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겠지만 차츰 나아지리라 기대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이 우선이라는 신념만은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의연해야 한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출소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차가 막힌다는 운전자들 민원이 빗발친다는 것이다. 행정복지센터와 경찰청을 가리지 않았다. 서로 전화를 받기조차 꺼릴 정도였다. 차량 정체를 피하려고 주택가 골목길로 우회하는 운전자들이 늘면서 주민들의 원성까지 감당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왜 신호 체계를 바꾸었느냐, 누구의 의견 때문에 이렇게 결정됐느냐고 따지면 ㄱ초등학교장의 요청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신호등을 켠 지 닷새째 되던 날, 교장실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난생처음 듣는 거친 욕설이 쏟아졌다. 그곳은 당연히 어린이 보호 구역인데도, 범위 밖이라며 당신이 뭔데 오지랖이냐고 큰소리를 쳤다. 몇 미터까지인지도 모른다며 무식한 사람 취급을 했다. 상대는 내가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도 먹고살려고 트럭으로 물건을 배달하는데, 차가 막혀 짜증이 난다는 것이었다. 가게가 길목마다 있는데 막혀서 죽을 맛이라고 했다. 학생들만 중요하냐며 10여 분 동안 쏘아붙이더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지 회의가 밀려왔다. 어이가 없고 화도 났다.
학부모들은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며 고마워했다. 그들에게서 뜻밖의 힘을 얻었다. 나는 손팻말을 만들어 운전자에게 학생들의 안전을 호소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양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학생 안전이 우선입니다. 신호등은 생명을 지켜 주는 등불.’ 감정에 호소하는 문구를 쓴 피켓을 들고 매일 아침 횡단보도 앞에 섰다. 오가는 차 앞에서 흔들고 인사했다. 항의나 원망 대신 양보와 이해의 마음으로 달라지길 바랐다. 경찰들도 일찍 나왔다. 차량 흐름을 살펴 신호 시간을 조정하고, 수신호로 교통을 정리했다. 그들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팽팽하게 맞섰던 사람들이 아이들의 안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금씩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자, 사거리는 차츰 안정을 찾아 갔다.
어느 날 경감이 다시 현장에 왔다. 앞으로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 통행량이 더 늘어날 테니, 대비책을 의논했단다. 심야 시간에만 점멸등으로 운영하고 최대한 신호등을 켜 놓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딱 한 시간만이라도 켜 달라고 그렇게 사정했는데, 이제는 그가 먼저 확대한다고 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경감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저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 말씀대로 학생들의 안전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여러 경찰에게 둘러싸여 말도 못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기억이 싹 가시는 듯 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옳다고 여긴 일이라도 결과를 맺기까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의 현실도 살피고, 함께 방법을 찾아가야 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길고 험했지만, 끝내 조금씩 길이 열린 것이다.
얼마 전, 무등산 원효사에 가려고 ㅈ사거리를 지났다. 오랜만에 마주한 길과 주변 풍경은 예전 그대로였다. 주말이라 차량도 많지 않았고, 신호등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잠시 옛일을 떠올렸다. 위태롭게 길을 건넌 아이들, 여러 경찰 앞에서 홀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한 날, 항의 전화에 마음이 무너지던 씁쓸한 기억, 손팻말을 들고 함께 외치던 학부모들. 그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돌아보면 과정은 힘들었다. 때로는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이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시작한 작은 요구는 결국 사거리의 신호 체계를 바꾸었다.
신호등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나는 산등성이를 향해 차를 몰았다.
첫댓글 교장 선생님!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덕분에 아이들이 안전하게 등하교를 할 수 있네요. 어른의 역할이 이런 것 아닐까요?
꼼꼼히 읽고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좋은 어른이시니, 우리 같이 선한 영향력으로 사회를 밝혀보시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