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김훈 장편소설 문학동네
지금 내가 읽은 책은 오산 중앙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다. <하얼빈>의 1판 1쇄는 2022년 8월 3일이고, 이 책은 2022년 8월 19일이다. 점점 독서 인구가 줄어든다는데 이 책은 예외인 모양이다. 소설 출간과 더불어 여러 매체에서 다루었고, 김훈이라는 소설가의 명성도 한몫 했지 않나 싶다. 지금은 몇 권이 인쇄가 되었고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르겠다. 김훈의 새 소설이 나왔다기에 그 즈음부터 간간히 도서관엘 들리면 대출 가능 여부를 타진해 보았다. 늘 대출불가로 표시가 떴다. 중앙도서관에 몇 권이 입고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내내 잊고 있다가 우연히 도서관 근처를 지나다 대출이 가능한지 검색해 보았다. 이 책 딱 한 권을 빌려왔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었다.
김훈은 1948년 생이다. 75세의 노인이 되었구나 싶다. 김훈 소설은 처음부터 단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더 짧은 문장으로 된 듯하다. 분량도 줄어들고 필요한 말 이외에는 군더더기가 더 빠진 것 같다. 그의 몸이 앙상해지면서 글도 마른 나무처럼 스산해졌을까? 아니면 말 많은 세상에 더 이상 말을 보태고 싶지 않아서일까? 말이 가치가 없어진 세상에서 딱 필요한 그만큼만 하고 싶었을까? 말이 길고 설명이 많다는 것은 굳고 단단하지 않아서일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자들이 작가일까? 음악은 소리에 질서와 규칙을 주고, 화가는 색과 선과 형태로, 건축가는 벽돌과 철근과 콘크리트로,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문자로 보이게 하는 기능공일까? 보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것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보이고 설명하려는 작업이 가끔은 애처롭기도 하고 극한직업 같기도 한다. 나는 젊지만, 비로소 조금 알 것 같다. 세상에는 설명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느낀다. 경험의 지혜일 수도 있고, 채념의 미학일 수도 있다. 전체 평균이나 통계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지만, 개개의 인간에게는 이런 통계나 평균이나 이론들이 무용지물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설명되지 않는 세계나 인간들에 조바심이 날 때도 있었지만, 살아있는 생명들을 어떻게 이론이나 사유 속에 전부 집어 넣을 수가 있겠는가. 살아 펄펄 뛰는 물고기를 얄팍한 언어의 그물로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이는 고도의 추상으로 내달리고, 누구는 말과 글을 더욱 세밀하게 다듬어 고배율의 현미경을 들이대고, 다른 이는 침묵을 선택하기도 하지 싶다. 김훈은 말과 글을 다루는 직업을 가졌지만, 말과 글 대신 사물과 사실과 구체적 몸으로 이런 곤란을 넘어서려고 하는 듯하다. 그는 사물과 사실과 개별적 몸을 기술하지만, 사유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듯하다. 그는 그의 굽은 어깨와 비뚤어진 손가락과 팔뚝의 근육을 묘사할 뿐이다. 그래서 김훈의 글은 점점 재미?가 없다. 그래서 두 번 읽는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조선의 안중근이 일제의 이토를 사살한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하얼빈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자 상징적 공간이 된다. 이토는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의 재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가고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덕순과 함께 이토를 죽이기 위해 하얼빈으로 간다. 지도를 보면 하얼빈은 일본 제국이 만주를 넘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이자, 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하일빈을 넘어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작용이 이토의 여정이라면 그 작용을 멈추게 하려는 자가 안중근이다. 이 곳 이 사건은 일제와 조선, 청나라와 러시아가 만나는 역사적 공간이자 사건이고, 이토와 안중근이라는 개별적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부딪치는 장소다. 그 날 발사된 여섯발의 총알은 예사롭지 않다.
요즘 심심하여 수학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복잡한 수식을 푸는 방법 중 하나는 그래프나 도면으로 표현하면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래프나 도면으로 전환하여 보면 좋겠다 싶었다. 나는 이 소설의 구도를 삼각형 도형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일제와 천주교, 안중근. / 이토 히로부미, 천주교 대목장 뮈텔 주교, 한국인 안중근./ 문명과 진보, 영혼과 안식, 평화와 정의./ 일제+문명과 진보+ 이토 히로부미를 한 꼭지점, 천주교+ 영혼과 안식+뮈텔 주교, 조선+평화와 정의+ 안중근. 일본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이토와, 천주교를 대표하는 뮈텔 주교와 일개 개인인 안중근을 대비하는 것은 비중에서 차이가 날지 모르지만, 이 소설은 안중근을 이 삼각형의 한 꼭지점에 당당히 자리를 지정해 준다. 세 점은 원하는 방향과 목적은 다르지만, 삼각형을 이루며 굴러간다. 일제는 이 삼각형을 기차 레일에 올려놓고 매끈한 원형 바퀴로 만들어 제국으로 상승하기를 바라며, 천주교는 백 년의 탄압을 너머 조선에서 안착하기를 바라면서 삼각형의 한 축에 단단히 안착하길 바라며, 안중근은 제국의 탈선을 바라며, 천주교의 위선과 위악을 들춰낸다.
이토는 1909년 10월 16일 시모노세키를 출발하여 중국의 대련을 거쳐 22일 봉천 25일 장춘 26일 채가구를 지나 26일 하얼빈에 도착한다. 대련은 일제의 배타적 점령지이고 기차 레일을 따라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이 길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망과 이토의 욕망의 길이자, 전쟁과 억압의 길이다. 안중근은 진남포에서 1907년 8월 신천을 거쳐 서울, 부산을 거쳐 배로 원산으로 건너가 다시 기차를 타고 연추로 다시 블라디보스톡에 1909년 10월 19일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수분하를 거쳐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하여 이토를 기다린다. 이 길은 나라 잃은 백성의 절망과 방황의 길이자. 희망과 모색의 길이다. 안중근 집안은 비교적 일찍 천주교의 세례를 받았다. 안중근은 유교가 아니라 천주교의 영향을 더 받았다. 안중근은 신천교구의 빌렘 신부와 여러 해 교류하였고, 명동 성당 뮈텔 주교와도 대면한다. 길을 나서는 안중근에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와 안식을 찾기를 바라며 세속과 거리를 두기를 충고한다. 하나님 사업과 세속의 일을 구분하자는 그들의 위엄한 말들은 시세대로 살아가라는 말과 다름 없었다. 천주교는 이 땅이 침략자의 손에 억압받고 착취 받더라도 천주교라는 종교의 안착이 우선이었다. 천주교의 길은 세속의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하늘의 평화와 안식의 길이었다. 안중근의 의문은 하늘의 사업은 천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성수와 성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밥과 물을 마시고 땅 위에 성전을 짓고 저잣거리에서 포교를 하지 않느냐다.
이토는 일본 제국주의의 추밀원 의장이자 권력자다. 빌램 신부와 뮈텔 주교는 로마 교황청에서 임명된 조선 천주교의 최고위자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직업을 묻는 판사와 검사의 질문에 처음에는 포수로 다음에는 무직으로 담배팔이라고 대답한다. 김훈은 포수, 무직, 담배팔이를 추밀원 의장과 대주교와 어깨를 나란히 놓는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인 안중근과 우덕순의 대화와 재판 기록 몇 가지를 김훈의 버전으로 읽어보자. --이토가 온다는 애기냐?--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온다고?/. --자네는 왜 나를 따라나서는가? 왜 이토를 쏘려고 하는가-- --그런 것은 말 할 필요 없다, 앞으로도 말하지 말자--/. --자네는 몇 발 가지고 있는가?-- --일곱 발짜리 탄창 한 개다. 그리고 몇 발 더 있다--/. --넌 돈 얼마 지니고 있냐?-- --오 루블 있다--/. --내일 헤어지면 끝이겠구나-- --그렇기가 십상이다. 늦었다. 그만 자자--/ --그대는 안중근과 나랏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없다--/ --안의 제안에 대해서 그대는 뭐라고 말했나-- --다만, 함께 가자고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너절하게 소설 속 대화를 인용하고 있을까? 그런 것은 말 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도 말하지 말자.
이토는 시모노세키를 출발하면서부터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대열을 형성하고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그의 가방에는 /동양 평화/라는 온갖 미사여구와 논리와 지식과 문명과 학문 진보가 있었다.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는 교황청의 화려한 휘장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하늘의 평화와 안식의 선물이 가득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에게는 강제로 빌린 백 루블과 포수, 무직, 담배팔이 뿐이다. 대의를 세우지 않고, 논리나 말씀을 내세우지 않고, 미사여구도 없고, 하늘에서도 제국에서도 힘을 빌려오지 않는다. 생명 그 자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몸의 언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것은 말 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도 말하지 말자.
나는 김훈 소설의 백미는 짤막한 대화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글은 폭발 직전의 긴장과 정적이 있다. 총구에서 머뭇거리는 총알이 아니라 이미 총구를 떠나버린 총알이다. 그 다음 일은 순전히 총알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총구를 떠난 총알에 말 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도 말하지 말자.
김훈은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청춘의 언어다. 이 청년들의 청춘은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폭발했다/
첫댓글 김훈, /그의 몸이 앙상해지면서 글도 마른 나무처럼 스산해졌을까? 아니면 말 많은 세상에 더 이상 말을 보태고 싶지 않아서일까? 말이 가치가 없어진 세상에서 딱 필요한 그만큼만 하고 싶었을까? 말이 길고 설명이 많다는 것은 굳고 단단하지 않아서일까./....겨울나무같은 글이 어떤지 읽어보고 싶네요.
삼각구도로 글을 써 내니 입체적으로 힘의 대치 혹은 논리가 느껴집니다.
https://cafe.daum.net/goodinfo/LK4K/357?q=%EF%BC%9C2024.3.30%EF%BC%9E%EC%95%88%EC%A4%91%EA%B7%BC&r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