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의식의 확산과 영역화 -1970‧80년대 시조 -
장성진(창원대 교수)
1. 문학적 환경
1) 정치사회적 환경
문학을 정치사회적 영향 아래서 논의하는 데 대하여 아무리 경계하더라도, 1970년대와 80년대의 문학은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다룰 수가 없다. 이 시기 작가들의 정치적 관심과 성향은 개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정치 권력이 문학에 가한 압력에 대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 압력이란 독재, 유신, 군부, 탄압, 검열 같은 용어로 집약할 수 있으며, 반응은 저항, 거부, 수용, 방관 등의 태도이다. 한국의 1970년대는 확장의 시대이다. 흔히 어떤 시기를 말할 때 급변 또는 격변의 시대라고도 하고, 그 변화의 이면에 사회적으로 역작용을 만들고 있었다고도 하고, 분야간 계층간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진단은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별 의미는 없다. 그렇지 않은 시대와 사회가 있었던가 반문해 보면 알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 역작용, 불균형 같은 진단을 19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 사회에 적용해 보면 다분히 수긍할 수 있으며, 그 핵심 관건은 확장 지향이라고 하겠다. 이제까지 19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 규정이 이루어졌으며, 상반된 두 가지 측면이 강조되었다. 정치적으로는 1972년의 유신체제와 계엄정국, 80년대의 군부독재와 민주화 세력 탄압 등 반민주 폭정의 연속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이것이 양극화된 냉전 시대에 분단국이 겪어야 할 혼란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국론 분열을 최소화했다는 견해도 있다. 경제적으로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이 끝난 1971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5년 전의 두 배를 넘겨 200달러에 이르렀다. 이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80년에는 그 일곱 배인 1480달러에 이르렀으며, 80년대에도 발전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수치를 두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대성공이라는 긍지와, 세계 경제의 흐름 등의 영향이므로 누가 통치를 하든 그럴 수 있었다는 냉소가 공존한다. 사회적으로는 훨씬 복잡하다. 한쪽은 경제적 성과와 연계하여, 국민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적 역량을 떨쳤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올림픽을 비롯한 스포츠 분야의 국제적 도약이 자주 언급되곤 하였다. 이에 대해 공업화 정책에 희생된 농촌의 빈곤화, 이농으로 인한 도시빈민의 양산, 전통적 사회 관계의 와해, 소득과 계층의 양극화 등 수없이 많은 문제가 지적되었다. 여러 분야의 저항적 인사에 대한 탄압과 구금 등 인권 문제는 당시에도 어떤 경로로든 알려지고 심지어 국제 단체의 간섭을 받기도 하였지만, 도시로 몰려든 젊은 노동자들의 인권과 건강 같은 문제는 특정 정치 사건과 관련되지 않는 한 주목을 받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발전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불가피한 기회비용이라는 태도와 폭정이 낳은 인위적 비극이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문학을 포함한 문화의 변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학의 생산자인 작가들은 정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대응 태도를 결정했는데, 그 결정에 따라 심하게는 구금과 탄압에서부터 지면의 제약에 이르는 불이익을 받기도 하였다. 몇몇 문예지는 직간접적 탄압으로 폐간되기도 하였으며, 내용의 수정을 요구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와 80년대의 문학은 그 전시기는 물론 그 후의 어느 시기보다도 다채롭고 활기찼으며, 문학 본연의 존재 의의에 대하여 진지한 양상을 보였다. 여기서 이 시기 문학적 환경으로서 지금까지 거론된 문제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후대의 여러 분야 연구에서 어느 쪽으로든 편향된 시각을 가졌다는 점을 재고하자는 뜻이다. 문학을 정치의 종속변수로 여긴 점과, 비평가가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만 보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70년대 당시에 주로 개인의 경험과 세계관에 따라 선택한 견해의 차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집단의 가치로 전환되었다. 80년대에는 이른바 “운동권”이라는 하나의 집단적 사고가 지배력을 가졌으며, 이런 상황에서 그 맞은편도 “비운동권”이라는 다소 불분명한 이름으로 규정되었다. 이때부터 한쪽 그룹에서는 다른 그룹과의 토론을 원천적으로 거부하였으며, 모든 논의를 내부의 결속 계기로 삼았다. 이후 정치의 영향이 더욱 커져서 이른바 보수와 진보라는 뚜렷한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들은 그 강력한 정치 지향으로 인해 진영 논리에 충실하였으며, 다른 진영에 대해서 적대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태도가 앞선 시대의 문학을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재단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 작가의 스펙트럼이 넓고 작품이 개방적인데도 굳이 어느 부류에 속하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거나, 성향이 뚜렷하지 않은 작가나 작품이 조명되지 못하는 일이 생겨 문학의 다양성이 손상되는 것이다.
2) 문학적 환경
그렇다면 이 시기 문학의 외적 환경으로서 어떤 점에 주목하여야 할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시기는 확장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 상징적 구호가 “증산, 수출, 건설”이다. 이 구호는 당시의 매체와 벽보, 학교 교육 등을 통하여 하나의 가치로 굳게 자리잡았는데, 가시적으로 확인되면서 대중들의 희망이 되었다. 품종 개량과 경지정리로 농업생산량이 증대된 것은 물론이고 환금작물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졌다. 수출 정책으로 외국인의 실상을 매체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마주치게 되었으며, 아파트를 비롯한 고층 건물은 건설이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가시적 실상이 확장성이라는 심리적 작용을 부추긴 점도 분명히 크다. 더 중요한 문학적 환경은 학교 교육의 급격한 증대와 독서 환경의 변화, 그리고 출판 환경이다. 작가가 대학교육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만은 아니며, 특정 전공에 구애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의 인문 교육은 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국에 대학이 앞다퉈 설립되고, 5.16 이후 정부 주도로 정비된 이후 60년대에 한국의 대학교육은 나름대로의 모색기를 겪었다. 전통적인 문사철(文史哲) 관념이 강하였고, 일제시기 법문학부(法文學部)의 권위에 영향을 받아 넓은 의미의 인문교육이 중심을 이루면서 학문, 교육, 사회 참여 등 대학의 정체성은 확립되어 갔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는 도시화와 더불어 경제 성장에 힘입어 대학 교육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전의 인문 교육에는 소수의 일제시기 경성제대 출신 학자들이 핵을 이루면서 이른바 문사(文士)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따라서 교수요원의 출신에 따라서 교육의 방식과 성향이 많이 달랐다. 그렇지만 1970년대는 초기의 대학 출신들이 40대의 중견 학자로서 교수에 부임함으로써 교육과정과 교수방식이 많이 통일되었으며, 문학교육에도 이론화가 진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와 예술성을 갖춘 작품들이 대학의 교재나 참고서적의 텍스트로 활용됨으로써 공적인 가치를 부여받았다. 전공 과정뿐 아니라 교양 과정에서도 문학은 비중이 컸으며, 작문도 여전히 문학적 글쓰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따라서 대학생들이 문학에 접할 계기가 많았으며, 자연스럽게 인문학도들은 잠재적 작가 지망생이 되기도 했다. 이럼으로써 대학 교육의 확대가 문학의 확장성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독서 환경의 변화도 문학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독서 인구가 많아진 것이다.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젊은이들이 결코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여유있는 생활을 누린 것은 아니지만, 도시 노동의 종류와 업무 종사 시간은 농촌에서의 농업 종사자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노동과 휴식의 시간이 정해지고, 출근과 퇴근이 있음으로써 여가 시간을 가진 것이다. 농경사회와 달리 정기적 급료를 받는 도시인들은 도서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이 시기에 도서를 정기 구독이나 할부로 구입하는 방식이 성행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과 매체 보급이 열악한 상태에서 가장 손쉽고 의미 있는 일은 독서이다. 심지어 교통기관을 이용한 이동 중에도 독서는 가능하였는데 이런 독서에도 집중과 연속성에 비교적 자유로운 문학 작품은 최상의 독서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창작에 직접 참여하기에도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영역에 비해서 문학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접근성의 이점을 가졌다. 출판 환경은 문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이다. 창작과 출판은 긴밀하게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원론적으로 근대 이후 창작은 생산활동과 그 상품이며, 출판은 가공과 유통이다. 한국에서 이런 용어조차 거북하게 취급받지만, 이 점을 부정하고 예술의 상업성을 외면한다면, 계속 중세적 경건주의를 유지하겠다거나 위선이다. 왜냐하면 작가가 자기 이름을 내걸고 창작을 하고, 그것이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데서 근대문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1970년대의 문학은 그 앞이나 뒤의 어느 시기보다도 정직하고 발전된 출판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전까지의 문학은 전통적인 문사로서의 사명 의식, 새로운 문화 선도자로서의 실험 의식 등이 혼재된 상태에서 창작과 향수가 이루어졌다. 작품은 유통되는 상품이 아니라 고급의 예술품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1990년대 이후의 출판과 유통은 더욱 전근대적 방향으로 역주행하였다. 소설이나 평설 분야에서 엄청난 판매 기록을 남긴 작품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폭발적 증가와 출판의 홍수 속에서 출판과 구독 관계는 무너졌다. 이를 부추긴 것이 수없이 많은 문학상과 정부가 지급하는 지원금이다. 절대다수의 작가들이 오직 문학상과 지원금에 매달림으로써 문학계는 정계를 능가하는 권력 구도를 형성하였다. 문학상 운영 주체, 문학단체, 지원금 운영 주체, 심사위원, 출판사 등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이러한 단체에 편입되지 않은 작가와 지망생은 지위가 낮으며, 독자는 소외되었다. 이러한 통시적 흐름 속에서 1970년대는 건전했다는 뜻이다. 상업성에서 시는 소설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몇몇 출판사에서 작가별 시선집을 기획 출판하고, 독자들은 충실하게 구입하였으며, 어떤 시집은 판수를 거듭하면서 출판되었다. 출판사는 자사의 권위와 수익을 계산하여 출판물을 엄선하였으며, 이것이 독자에게 신뢰를 주었다. 물론 유명 비평가의 발언이 힘을 발휘하고, 광고 효과에 기대는 측면도 있었지만, 작가와 출판사와 독자가 수평적으로 문학 활동에 참여하는 좋은 시기였다는 뜻이다.
2. 시조의 영역
1) 시조의 영역화
문학을 둘러싼 환경적 요소들에 대한 앞의 여러 가지 검토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시조는 여전히 문학론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히려 앞 시기의 시조부흥론에서 제기된 몇 가지 관점 중에서 중립적 견해, 즉 문예물로서가 아니라 생활의 한 교양으로서 살려가야 한다는 정도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시조라는 장르의 내적 질서에 기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시에 대한 양극화의 요구와 논의에 시조가 부응하기 어렵다는 근원적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시조의 장르적 견고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이 점은 이 시기의 시를 두고 양극화된 관점으로 재단하던 후대의 논의에 대하여 하나의 반성적 검토의 자료가 될 수 있다. 문학론의 중심에서 비껴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와 80년대의 시조 작가들은 꾸준히 증가하였고, 시조에 대한 새로운 모색은 진행되었다. 그것은 협회의 발전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1964년말 회원 30명으로 창립된 한국시조작가협회는 1969년 제 5차 정기총회의 결의로 문협 시분과에서 시조분과로 독립하여 70년대 시조 영역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2년 총회에서는 첫 번째로 전남 광주지부를 인준하여 문학 활동의 수평적 확대를 꾀하였다. 1974년에는 협회 명칭을 시조시인협회로 바꾸자는 안이 제시되었으며, 3년 후에는 실현되었다. 여기에는 시조를 현대의 “시”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난다. 1981년에는 두 번째로 부산지부가 인준되어 협회의 조직이 지부와 본부 체계를 갖추었다. 한편 1983년에는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가 전국적 조직으로 결성되어 두 단체의 관계 정립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는 시조 작가의 수적인 증가뿐 아니라 조직의 다양성도 보이는 면이다. 결국 1987년에 가서 두 단체는 형식적으로 통합하고 부회장제를 운영하였다. 다른 장르에서는 협회가 분리되기도 하고 복수로 설립되기도 하였는데, 시조 협회에서는 애써 형식적으로라도 통합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강하여, 독자적 영역화를 지향하는 측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2) 전통과 전형에 대한 고민
1970년대의 시조 작가들은 태생적으로 구분되는 두 부류가 공존한다. 한 부류는 일제 시기와 해방,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창작 활동을 지속해 온 문사형 작가들이며, 한 부류는 해방 이후에 태어나거나 빨라도 그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70년대에 등단한 시인형 작가들이다. 연령과 등단 시기가 일치할 수는 없지만, 1930년대 이후 50년대까지 한국 사회의 혼란상을 감안하고 보면 연령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 해방 전후에 태어나 의무교육을 포함해 신식 교육을 받고 청장년기에 등단한 작가들은 그 이전 시기에 출생한 시인들과 상당히 구분되는 지향을 가졌다는 뜻이다. 시조 작가로서 두 번째 부류는 커다란 두 개의 자장 사이에서 시조 장르를 이끌어 가야 했다. 고시조적 전통과 전형이라는 자장과, 현대시라는 자장 중 어느 하나도 외면하지 않으면서 편입되지도 않아야 하는 과제를 수행한 것이다. 이는 앞 시기 작가들이 민족 또는 전통을 내세우면서 시조무용론자들에게 집단적으로 대응하던 태도나, 혁신론을 내세우면서 자체 발전을 기도하던 일과는 다르다. 첫 번째 자장은 감상 자료로서의 시조이다. 우선 초중등의 국어교육에서 시조는 전통 윤리의 측면에서나 민족국가 이념의 측면에서나 유용한 영역으로 중시되어 누구에게나 친근한 장르였다. 확대된 대학의 한국문학 연구에서도 자료의 발굴 확충과 주석 같은 문헌 위주의 역사주의적 연구방법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런 연구의 획기적 작업이 시조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강독 교재나 해석 자료로서 고시조 작품집은 간간이 간행되었지만, 작품과 정보를 망라한 작업은 오래 진행되다가 1972년에 출판되었는데, 심재완 교수의 『교본 역대시조전서』가 그것이다. 이 책은 고시조 작품에 대하여 움직일 수 없는 정체성과 권위를 부여하였다. 국내의 문헌은 물론 접근하기 어려운 국외 소장 자료까지 망라하여, 40여종의 이본을 대교한 3335수의 고시조 교합(校合) 자료와, 작가 및 해설에 관한 원전이 제시되어 고시조의 정전으로 자리잡았다.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논문과 저서가 발표되어, 시조 연구는 곧 고시조 연구라는 관념이 굳어졌다. 두 번째 자장은 현대시로서 시조 창작 활동이다. 이 시기에 등단한 작가들은 대부분 청소년기의 학교 교육 과정에서 문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일부는 문학에 대한 지향으로 인문학을 전공하였다. 그런데 교육과정으로 보거나 문학 환경으로 보거나, 처음부터 시조를 지향한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문예의 하위 영역으로 시를 인식하였으며, 이때의 시는 당연히 자유시였다. 자유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장르적 관심 또는 스승의 권유에 의해 시조에 집중하는 계기가 많았다. 따라서 이 시기 작가들은 시조를 자유시와 공존하는 정형시, 곧 문예적 관심에서 창작하는 시라는 의식을 공유하였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시조는 주제의 다양화, 표현상의 난해성, 표기상의 잦은 행갈이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주제의 다양화는 이전부터 추구해 오던 혁신론의 연장선성에서 전통의 윤리와 집단적 사고를 걷어낸 결과이며, 난해성은 자유시에서도 나타나는 경향으로 현대성의 한 경향으로 인식된 것이다. 표기상의 행구분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면이다. 장 단위의 행구성, 즉 3행 표기는 현저히 축소되고, 구 단위나 음보 단위, 심지어 음보마저 분해하여 단어 하나를 행으로 구성하는 예도 흔히 보인다. 이는 시조를 자유시의 경계선까지 끌어간 방식으로, 시조의 현대성이라는 측면을 극대화한 모습이다.
3. 현대시로서 시조 모색 : 1970년대 시조
1) 장르적 신뢰
19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작가들 중에는 실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이들도 있는데, 이는 개별적으로 또는 동인 활동으로 작품을 내놓다가 문예지가 활성화된 뒤에 소위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친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이병기나 이은상 같은 전시대의 대가들에게 직간접으로 시조를 배우고, 그들에게 심사를 받거나 추천을 받아 활동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이런 작가들에게 시조는 여전히 민족문학이라는 가치 의식이 강했으며, 작품에도 전통적 의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맑은 바람 소리 푸르게 물들이며 어두운 밤 빈 낮에도 갖은 유혹 뿌리쳤다 미덥다 층층이 품은 봉서 누설 않는 한평생. 김교한, <대>
작가가 노년에 쓴 작품이지만, 초기의 경향이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어서 예로 들 만하다. 형식적 배열도 그렇거니와, 소재를 해석하고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고시조의 장르적 견고성에 충실한 의식을 보인다. 초장은 현대적 감각의 활용이다. 소리와 색깔의 공감각을 통해, 대나무가 사시 푸르다는 관념을 푸르게 한다는 진행으로 바꾸었다. 이것을 중장에서 밤낮 유혹을 뿌리치는 과정으로 풀이하였다. 소재를 고정된 물(物)에서 행동하는 사(事)로 해석하는 것이 현대성이다. 종장의 “봉서(封書)”는 시안(詩眼)이다. 대나무를 생명 활동의 과정으로 풀다가, 그 생의 의미를 역사의식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대나무가 고대의 역사 기록 도구 곧 죽백(竹帛)이라는 지적 인식이 작용하였다.
누림도 하 눈부셔/고개들지 못한 시절 바람 한 점 없는 날도/들풀들은 누워야 했고 나는 늘/패자 편에 서서/오금이 저리었다.
식자(識者)들은 남산 가서/재갈 물려 입다물고 그 입술 깨물면서/절통하게 무릎도 꿇고 때로는/승자의 뒤편에 줄선/흔들리는 갈대였다.
꽃도 열흘 안 붉다는/은유 다시 날(刃)서던 날 큰 칼에 조리돌림으로/고개 떨군 자 누구던가 모래성/무너진 자리/들풀들이 기(旗)를 단다. 김춘랑, <사초(史草)를 다시 하며 1> 제 2,3,4연
김춘랑도 앞의 김교한과 유사한 활동 경력을 가진 작가이다. 고시조적 정서를 현대적 기법으로 풀어놓아서 작품이 길고 서술적이다. “남산”으로 상징되는 억압과 폭력의 권력 구도 속에서 나약한 개인이 패배자로서 비겁하게 움츠리는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식자도 더 이상 영웅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심지어 승자의 뒤편에 줄을 서는 존재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과 그 현실 앞에 “나”를 노출시키는 일은 고통스러운 현대인의 고백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연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귀정(歸正)에 대한 신뢰는 매우 전통적이다. 그리고 그 기(旗)를 다는 주체를 들풀 곧 민초라고 믿는 것은 시조의 완결 구조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2) 현대성 모색
1970년대는 시조 작가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시조에 대하여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시조를 공모하였으며, 이를 통해 많은 작가들이 배출되었다. 신문의 신춘문예는 이전부터 있었으며, 이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에 대한 보이지 않은 권위도 높은 편이었다. 또 『시조문학』이 1974년부터 정기간행물로 발간됨으로써 수록 작품이 더욱 많아졌으며, 『현대시학』, 『시문학』, 『월간문학』 등에도 시조를 활발히 수록하였다. 이런 문예지가 후대에는 자유시에 경도되어 시조에 대한 관심을 줄였지만, 이 시기에는 시조에 대하여도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시조에 대한 관심을 높게 보인 것은 당시의 문화적 풍토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정부 주도로 민속, 민족문화 등에 대하여 강조하였고, 문학계와 학계에서도 상당히 동조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그와 상반된 주체들이 전통문학에 대한 욕구를 크게 드러내었다. 즉 도시화와 개발 논리에 위기감을 느낀 학계에서 대대적으로 구비문학 자료의 발굴 수집과 연구에 역량을 집중시켰다. 전국적으로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서 방언, 설화, 민요 등을 수집하는 것이 방학 중의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구비문학을 한국문학의 보고로 여기는 풍토가 생기기까지 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대규모의 기획으로 전국의 구비문학을 발굴 수집하였으며, 개인과 학회 단위로도 이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것이 간접적으로 전통문학장르에 대한 관심을 높여서 시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시조는 이러한 풍토의 영향권에서 묘한 위치가 되었다. 기층문학 내지 민중문학으로서 전통문학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고시조는 지배층의 문학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측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간지나 문예지가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상층문화에 대해서는 경계함으로써 현대시조의 새로움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커진 것이다. 이 점이 결과적으로는 1970년대 시조의 방향 설정에 영향을 주었다. 즉 전통 장르라는 1차적 의미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 현대시로서의 의미를 최대한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지향은 은연중 시조단의 역할 분담 양상을 띠었다. 즉 비교적 시력이 오래되고 가람과 노산의 영향권에서 창작을 시작한 부류의 작가들은 전통이라는 점에 더 비중을 두고, 새로 시단에 진입한 젊은 작가들은 현대성에 더 비중을 두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 새로움을 추구한 작가들이 공동으로 출간한 『네 사람의 얼굴』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시집은 윤금초, 박시교, 이우걸, 류재영 네 사람의 시조를 모아서 한 권으로 만든 책이다. 이들은 1940년대생으로서 1970년대에 등단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시조와 관련한 등단 경로와 연도는 같지 않다. 윤금초와 류재영은 『時調文學』에, 박시교와 이우걸은 『현대시학』에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등단 시기는 1967년에서 1973년 사이이니, 크게 보아 동시대의 작가들이다. 또 등단 전이나 후에 자유시를 쓰기도 하고 비평을 겸하기도 하는 등 시조 장르 선택에서 개방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다. 출신 지역과 활동 분야가 서로 달랐던 점으로 보나, 자서(自序)에서 “이 선집을 계기로 네 사람의 <얼굴>이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언급으로 보나, 공동 시집 출간은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의 편집 계획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창작 연도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작가들의 등단 시기가 대부분 70년대 초라는 점과, 1983년에 초판이 나온 점으로 보아 70년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집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 시기 시조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 날개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75권의 목록이 실렸는데, 33번째인 이 시집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자유시로 보여, 이 시집의 성격이 이른바 전통문학이라는 관점보다 시라는 성격이 두드러진다. 또 작가들의 단편적인 언급도 중요하다. 윤금초는 당대의 시조에 대하여 “인간 구원, 혹은 역사의식을 저버린 채 자기 카타르시스나 일삼는 것은 차라리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으며, 류재영은 “꽃과 물과 바람의 허망한 주제에서 벗어나 민중의 언어로 시대의 공감대를 확충해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의도를 드러내었다. 이우걸은 “내 작품이 이웃과 작별하지 않고 언어미학과 작별하지 않기를 빈다.”라고 다소 추상적으로 말했다. 이웃이 다른 장르의 시로 해석될 수 있다. 공통적으로 전통시조가 현실 또는 현대성에서 벗어났다는 진단을 전제로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의 질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오규원의 해설이다. 그는 이 글에서 시조의 존재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는 이 시기 작가들의 고민이기도 하고, 동시대 자유시 작가들의 다소 못마땅한 시선이기도 하고, 독자들이 명확하지 않은 채 품고 있던 의문이기도 하다. 시조라는 틀이 현대의 시정신을 표출하는 데 과연 의미를 지니는가, 지닌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조시대의 창사(唱詞)이던 시조가 이병기에 의해 <우리의 것>이라는 의식에다 정형시라는 가치관을 등에 업고 하나의 틀로서 정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형시라는 그것 이상의 무엇을 얻고 있지는 않다고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동시대의 일부 자유시가 확보한 운율적 구조에도 못 미칠 수 있으며, 이병기 시조가 이룩한 묘사도 의식의 세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이런 전제 아래서 네 사람의 시조를 예로 들고, 그것들이 시조라는 틀에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시로서 아름답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시조를 3행시라고 늦추어 이해하더라도 네 사람의 작품이, 시조의 모든 가능한 틀 속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정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내보인다고 하였다. 결국 시조가 3행을 전제로 한 정형시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인용한 작가들의 생각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의식을 잘 보여 준다. 오규원이 예시한 작품들은 분명히 그러한 논의를 하기에 적합한 현대시의 면모를 보여준다.
웃음을 말리고 섰는 이날 나의 바지랑대 그대 고이고 선 쭉정 빈 하늘을 묵정밭 억새잎처럼 우우대는 쉰 목청 박시교, <木다리>
귀신이 붙었던가 녹물 묻은 저 사내 유년의 휘파람도 분질고 가는 저 사내 잔등엔 죽은 손뼉을 낮등으로 걸었다 유재영, <바람>
두 편 모두 단수 작품이면서 묘사로 일관한다. <木다리>는 1차적으로 불구를 나타낸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든 행동을 결정적으로 제약하는 불구 상태이다. 그것을 아무런 감정적 언어 없이 건조하게 묘사하는 데서 시조의 전통과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세 개의 연과, 각 연의 전후구가 가지는 의미의 분배를 구조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왜 이 시가 정형이며 시조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가 “왜 시조를 택했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장만할 필요 없이, 지금 내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무엇을 힘주어 쓸 것인가”라고 하였지만,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왜 시조를 택했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바람>은 더욱 현대성이 강조되어 거의 이미지의 제시로만 이루어졌다. 이전의 시조에서 경험하지 못한 난해성이 두드러진다. 이우걸은 등단 이전에 자유시와 정형시 양쪽에 힘을 기울인 작가이다. 발표는 거의 시조로 일관하였지만, 초기 작품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경도가 어느 정도 보인다. 위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 몇 군데를 뽑아 보자.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 버리며. <비> 두 수 중 첫 수
제 가진 全身으로 한 하늘을 건져내려고 제 가진 全身으로 한 바다를 건져내려고 등대는 떨리는 손을 虛空에 걸어 놓았다. <빈 배에 앉아>, 세 수 중 둘째 수
이러한 반복 표현이 가끔씩 나온다. <새벽 종소리> 둘째 수 초장에서 “문 열어라”를 네 번 반복한다든지, <겨울 神經痛> 첫째 수 초장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로 귀뚜라미를 세는 것도 반복이다. 마치 시행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시 같은 초장과 중장의 이완은 종장에서 스스로 해명된다. 그만큼 종장의 긴장이 크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이우걸의 초기 시조는 현대시로서의 시조를 모색하는 데 의의를 가진다. 이우걸은 창작 뿐 아니라 평론을 통해서 꾸준히 시조의 정체성과 방향을 모색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1984년에 『현대시조의 쟁점』, 1989년에 『우수의 지평』 등 평론집을 간행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현대시조의 정체성과 방향을 꾸준히 제시하였다. 이들 평론집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론이기도 하지만 시조의 이론적 탐색이기도 하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팽이>
이 작품은 고전적 의미의 “삶이 자연이다”라는 은유가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깨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초장에서부터 매우 격정적이며, 호흡이 급박하고 사뭇 날카로워서 고시조와 차별되는 현대성을 보여준다. 무지개는 사물로서도 자연이며, 그 현상도 저절로 그러하며, 사람에게 일으키는 정서도 누구에게나 동일한 그러함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그것도 가혹한 매끝에서만 보이는 존재이자 현상이 되고 말아 인공이 자연을 완전히 대신하는 문명을 드러낸다. 중장의 증언도 그러하다. 형용사적이거나 동사적 자연은 그 질서가 완전하고 사람이 보기에 자명한 것이지만, 현대의 자연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인공을 꼿꼿이 증언하여야 하는 숙명이다. 종장의 접시꽃은 무지개의 또다른 모습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세계는 “우주는 물체이다.”라는 은유에 근원해 있지만, 그것이 “자연(저절로 그러함)”이라는 전통적 세계관에서는 멀어져 있다. 우주적 질서를 인위적으로 재현했으니, 원래의 은유를 다시 은유한 문명적 창조인 것이다. 시조가 가지는 구조에 충실하면서 현대시로서의 성격을 최대치로 추구한 작품이다.
4. 장르 편폭의 확대 - 1980년대 이후
1) 주변 여건
시조를 “현대”와 “시”의 관점에서 정립하려고 끊임없이 모색하던 시기가 1970년대였다면 그 이후에는 소위 전통성과 현대성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1980년대의 시조가 앞 시기와 기본적으로 다르지는 않지만, 이웃하고 있는 자유시의 변화에 대비됨으로써 달리 보이기도 했다. 자유시의 경우 앞 시기에 “민중”이 중요한 키워드였다면, 80년대에는 “노동”이 부각되었다. 아무리 저항의 강도가 높아도 끝내 서정적 절실함을 유지하던 김지하나 신경림 같은 목소리가, 박노해나 백무산으로 대표되는 직설과 외침으로 바뀐 것이다. 70년대에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으로 대표되던 두 경향 사이의 거리에 비하면, 80년대의 『실천문학』 등 소위 참여 경향과 문예 경향과의 거리는 훨씬 더 커지고, 자유시에서 문학적 지향의 양극화는 하나의 시대적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시조는 그 주제나 현장성 측면에서 그 폭이 상대적으로 좁았으며, 그보다는 여전히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현대”와 “시조” 중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의 문제로 표출되었다. 당연히 현대성의 비중이 높아졌는데, 이는 앞 시기의 경향이 지속적으로 강화된 현상이다. 여기에는 지면의 다양화, 작가들의 영향관계, 시조 단체의 증가와 운영 등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80년대 시조단의 작가들은 더욱 젊어졌다. 70년대에 등단한 작가들은 여전히 40대 전후로, 연령은 중년에 미치지 못했지만 역할은 중견으로서, 창작은 물론 문단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들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이후에도 시조단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를 지킨다. 시조단이 젊어졌다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신진 작가들이 급속히 진입했기 때문에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는 뜻이다. 한편 80년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 아래서 문학외적 간섭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기 한국 사회는 빛과 그늘이 함께 짙어졌으며, 대개는 한 쪽을 보게 마련이었다. 물가 안정과 수출로 대변되는 경제의 급성장, 통금 해제로 대표되는 안정과 자유, 대학의 폭증으로 대표되는 지식사회화, 컬러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국제화 등 성장과 팽창을 실감하였다. 반면에 산업과 계층간의 불균형 심화, 상반된 정치적 견해에 대한 폭압, 대중화 속의 퇴폐 등 그림자도 짙었다. 현실 안주와 저항 사이의 적대감도 커졌다. 문화 분야도 당연히 영향을 받았다. 소위 ‘국풍 81’이라는 대규모 이벤트가 있었고, 각종 민속 경연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으며, 민족 또는 지역 의식을 부추기는 문화 행사가 많아졌다. 이와 함께 학술과 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취지는 문예를 진흥시키는 것이었지만, 정부가 주도하는 지원에는 암묵적 요구와 보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시조시인협회도 1980년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세미나 지원금을 받아 학술 발표를 했으며, 이듬해에는 연간 시조집 발간비도 지원을 받았다. 정부의 지원금을 계속 받는 한편 일간지 신춘문예의 시조 분야 상금 상향 조정을 건의하여 관철시키는 등 재정 확충에 힘을 받았다. 재정 지원이 작품의 성격에 직결되는 것은 아니고, 시조 분야만 우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시조의 이른바 “전통성”을 유지하는 경향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외적 상황 아래서 80년대 이후 시조론은 상당히 불만스럽거나 냉소적으로 표출되었는데, 그것은 상반된 두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여전히 시조를 민족 정신과 관계되는 중요한 문화이기 때문에 발전시켜야 한다는 계몽적 태도이고, 또 하나는 시조가 현대시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것을 주장하는 방식이 앞 시기와 다른 점은 양쪽 다 남들이 그것을 무시하거나 방해한다는 불만으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작가 자신들이 시조라는 장르의 시대적 딜레마에 대해서 짜증을 내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원로 작가들이 줄곧 해오던 주장이다. 이태극이 1974년에, “우리는 이 민족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서 세계에 자랑할 만큼 북돋아 나아가야 할 것으로 믿는다.”고 한 발언이나, 정완영이 1980년에 “시급한 일은 온 국민이 우리 정신의 본류요 대종인 민족시 짓기 운동에 발맞추고 나서야 한다. 마음을 가다듬는 일도 인격을 도야하는 일도 거칠어진 국어를 바로잡는 일도 다 한 수의 시조 짓기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고 한 발언은 1920년대의 시조부흥론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외부의 응원을 바라는 듯한 태도이다. 후자는 더 공격적이다. 김윤식은 1984년판 저서에서 외국인이 한국문화를 연구한답시고 탈춤이나 민속화를 들추어내는 일을 저급하게 여기면서, “이런 것이 문학에 적용될 때는 언필칭 <시조>를 내세움 직하다. 만일 시조작가 중에 은연중 그런 생각을 품을 사람이 있다면 시조문학은 골동취미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골동품을 예술작품이라 우긴다면 소도 말도 웃을 일이다.”라고 비꼬았다. 여기서 그가 상정한 “시조”는 당연히 전통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일 것이다. 김제현은 1987년에 “시에 대한 안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 신인을 가끔 추천(심사)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사자의 낯 두꺼움도 두꺼움이지만 편집자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라고 시조단을 비판하였다. 이우걸은 1989년에 “새로운 시도는 용납되기 어렵고 문단질서는 철저한 경로사상에 의해 폐쇄되어 있고 건전한 비평풍토는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시조를 사랑하는 연령층은 점점 높아져가고 또 한정되어 있다.”고 진단하였다. 문제는 원했든 않았든 이들이 이미 이 시기에 문단의 중진 또는 중견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논조는 여전히 앞세대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새로움을 펼치기에 앞세대의 존재가 장애라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자유시와의 경계선을 유지하면서 새로움을 정립하는 데 대한 자신들의 한계를 앞세대에 대한 공격으로 상쇄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2) 형식 실험
80년대 이후 등단 작가들은 앞시대에 비해서 시조를 하나의 양식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의식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앞서 『네 사람의 얼굴』 작가들은 어떻게 해명했든 시조를 현대시의 한 영역으로 설정하는 이유를 드러내었으며, 오규원의 해설에서 보이듯이 “시조가 왜 정형시라는 포괄적 개념이 아니라 특정 장르로 설정될 수 있는가?” 하는 날선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런 질문은 중단되었고, 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 대신 시조는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으며, 최소한의 규제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창작을 하게 되었다. 시조의 변용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시적으로 활용되는 요소는 형식이다. 형식은 율격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표기하는가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부분적으로 종장 첫 음보와 둘째 음보의 음수율의 근거에 대한 회의도 있었다. 종장 문제는 시조에 종종 외래어 또는 외국어가 쓰임으로써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음절 개념에 대한 해명까지도 필요해졌다.
내쳐서 삼천리를 다 못 가고 마는 땅 …………… 가다가 뚝 끊긴 길 끝에 이념만이 선명한 문무학, <중장을 쓰지 못한 시조, 반도는>
중장이 분단된 국토를 상징하고, 그 어떤 말보다 절대적인 비극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없음표를 이어놓았지만, 시조집에 수록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시조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혹 양장시조라고 할 지 몰라도 그건 더욱 아니다. 율격이 작가의 선택이지만, 때로는 자유롭고 산만하기까지 한 배열은 출판 문화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근대문학의 출발과 함께 전통적으로 문학 작품은 활판 인쇄의 복잡한 과정을 겪어서 출판되었으며, 그 공정과 시간과 비용 때문에 개인이 시집을 간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인쇄와 출판 환경이 급변하였다. PC가 보급되고 한글 작업 프로그램이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작가 자신이 작품을 입력하고 디자인하고 출력하는 일이 일반화하였다. 인출과 제본의 전단계까지 일괄해서 이루어지니, 공정과 시간과 비용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줄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활용으로 시의 형식적 배열을 거의 무한정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읽는 시에서 보는 시로 확대되었으며, 새로움은 더욱 진전되었다.
초봄의 설레임 같은,
첫날밤 수줍음 같은,
바람난 가시내의 질정 없는 몸부림 같은,
초점을 맞추지 못한 망원렌즈 눈, 눈, 눈, 서일옥, <안개>
전체가 비유로 이루어졌다. 있는 듯 없는 듯, 물체인 듯 현상인 듯, 멈춘 듯 흐르는 듯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안개’라는 실체를 초장과 중장에서는 직유로, 종장에서는 은유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분명함과 망설임을 행갈이를 통해서 시청각적 속도감으로 표출한 데서 이 작품의 생명이 살아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어야 하는 시이다. 종장에서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는 “눈,눈,눈” 한 음보는 중장의 바람난 “가시내의 질정 없는 몸부림 같은” 3음보보다 세 배, 그러니까 같은 단위가 9배의 속도로 읽힌다. 이것이 읽는 시로서의 현대성 확보이다. 또 출판 환경의 반화에 힘입어 개인 시집 간행이 증가하였다. 인쇄 과정이 단순해지자 출판사가 급증하였고, 작가들도 출판사 또는 문예지 편집진과의 복잡한 교섭 과정 없이 출판을 하게 됨으로써 시력이 오랜 작가들도 개인 시집을 출판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 실제로는 오래 전에 창작된 작품이 뒤늦게 출판되고, 시조의 세계는 더욱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3) 작품 세계의 지향
우선 작가의 수를 보면, 80년대에는 70년대의 증가 속도보다 훨씬 빨라져서 이후의 가파른 증가를 예고한다. 가령 『시조문학』의 경우 1961년에서 79년에 이르는 20년 사이에 90명의 작가가 배출되었는데, 80년에서 89년까지 10년간에는 208명이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예지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각종 백일장을 통해서도 수상자가 작가로 활동하는 계기를 삼았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작가가 많이 늘어나고, 그만큼 작품의 성향도 다양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경향을 나누거나 발전 방향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다시 한번 80년대 이후의 시조의 폭과 깊이를 생각해 보자. 작가의 주축은 여전히 70년대에 등단한 사람들이고, 이들의 경향이 짙고 넓어진 것이 20세기 말까지 이어진 경향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시조가 현실과 사회를 읊어야 한다.”, “내면의 세계를 읊어야 한다.”, “전통론을 극복해야 한다.” “고정된 율격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등의 주장을 통해 개성화를 추동하였으며, “자유시의 변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수적 증가가 질적 저하로 흘러서는 안 된다.”, “서정성을 빙자하여 사적인 감정 유로에 흘러서는 안 된다.” 등의 경계를 통해 장르 정체성을 일깨웠다. 이러한 의식이 몇 갈래의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이런 경향이 곧 뚜렷한 영역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작가를 귀속시키는 기준도 아직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등단의 시차를 둔 작가들이라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변화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체로 다양성의 이면에는 장르의식과 시대의식을 공유한 구심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 시대의 진단
앞서 말한 바와 같이 80년대는 사회적으로 풍요와 비애가 동시에 증폭된 시기이다. 풍요는 산업화의 결과인데, 이는 곧 농촌의 황폐화, 도시화와 부유, 실직과 과로 등을 동반한다. 이농으로 인한 농촌의 황폐화는 한국 역사상 일시적 피난을 제외하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고향을 떠나고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문학은 관료가 되어 임지에 머무르거나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난 고급스러운 체험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이농과 도시 유입은 서민과 빈농의 현실이었으며, 이 시기 작가들은 이것을 소재로 삼아 다양한 감성으로 풀어내었다.
마른 풀잎에도 슬픔이 비치던 날 염소 울음에 쫓겨 먼 둑길은 지워지고 감나무 가지 사이로 문득 흔들리는 이승 이정환, <노을>
기법을 다 유보한 채 소박하게 고향을 그린 노래이다. 사실 80년대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전통적 요소를 활용하였는데, 절실함을 위한 장치 같다. 염소 울음과 지워지는 둑길은 기차나 버스로 고향을 떠나는 광경을 시각적으로 그렸으며, 감나무 사이로 흔들리는 이승은 고향과의 이별을 넘어서 향촌의 소멸을 보여 준다. 떠난 이의 노래가 있다면 남은 이의 노래는 더 간절하다.
떠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뜨구 싶어 하늘만 쳐다보다 헛딛은 지난 세월 내(川)처럼 뒤도 안 보구 멀리가 앉구 싶어
그려그려 설움도 봇물처럼 그득 실리면 물꼬 확 터놓고 다시 기다리는 게여 날들면 먼저 껴안을 이땅을, 어쩌겠누 어쩌겠누 정수자, <고향의 비 11> 제 1,3연
이미 농촌이 피폐해지기 시작한 때 고향에 남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였다. 떠날 수만 있으면, 흘러가는 냇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영원히 떠나고 싶은 고향으로 그려졌다. 그렇지만 떠난다고 나을 게 보장되지 않는 삶이어서 운명처럼 다시 주저앉는다. 고향을 떠나려는 마음이 봇물처럼 그득 찼다가 물꼬처럼 터놓기를 반복하는 화자에게 이땅을 어쩌겠느냐고 탄식하는 것은 이미 고향에 대한 애정이 아니다. 고향이 귀의처가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땅이 되어 버린 시대 상황을 그렸다. 떠나온 자에게나 남은 자에게나 고향이 정서적이라면, 새로 진입한 도시라는 공간의 메마르고 정확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도시 체험은 늘 두려움과 낭패감을 동반한다.
내 오늘/서울에 와/萬坪 寂漠을 샀다 안개처럼/가랑비처럼/흩고 막 뿌릴까보다 바닥난 호주머니엔/주고 간 벗의 名啣…… 서벌, <서울>
서울과 만평 적막의 대비가 특이하다. 근대 이후 서울은 하나의 큰 도시가 아니라 상대가 없는 그냥 서울이다. 최고의 희망이기도 하지만 막다른 익명의 장소이기도 하다. 화자에게 서울은 후자이다. 그 적막을 견딜 수 없어서 안개처럼 비처럼 뿌리고 싶어도 다가오는 적막 속에서 벗의 명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大學도 그만두고/공장 나가는 누이야 보름 이레째 夜業 직조기에/그만 잘린 고 손가락 고향집/뒷산에 숨어/쑤꾹쑤꾹 우는구나.
사랑방 솟는 伯父 음성/그저 찔찔 울지라도 <低級 인상 노동권 보장> 열올리는 누이야 그 봄날/슬픈 횡액들/머리띠로 두르고……… 김정섭, <月山里 누이야>
전형적인 80년대의 노동시이다. 자유시에서는 공식구처럼 쓰인 표현들이다. 대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나가는 누이, 기계에 손을 다친 삽화, 구호와 데모 등이 그렇다. 이런 표현이 고향집 뒷산과 백부 등의 감성적 대상들과 결합하여 서정성을 높였다. 앞서 70년대에 제기된 문제 즉 왜 굳이 시조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기에는 궁할 정도로 장르의식보다 시대의식 즉 현대성에 비중이 크다.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에 이어진다.
산이 산을 막고 무심이 무심을 불러 해마다 뻐꾸기 소리 제삼자처럼 듣고 있지만 이모님 원통한 숲엔 오뉴월 서리도 내렸으니 고정국, <한라산>
제목으로 인해서 이 시조가 제주도 4.3 사태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역사적 사건 앞에 성찰로 일관한다. 초장에서는 멀리 떨어진 자연 환경과 무심한 세태를 드러내었지만, 중장에서는 제삼자처럼 듣는 자신을 깊이 자각한다. 그럼으로써 종장에 이모님의 원통한 한이 깊이 각인되고 남의 일 아니게 다가온다. 오승철은 대표적으로 4.3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집요하게 추구해간 작가이다. 그가 제주도 사람이란 점은 문학외적 일이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문학이 시대의식만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공간의식도 중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 민족의식은 절대적인 가치 개념으로 확립하면서 지역의식은 위험시하는 모순을 설명하기 어렵다. 문학의 가치를 역설하면서 철저하게 정치적 이념에 종속시키는 것은 무지이거나 허위이다.
(2) 도시적 정서와 문명 비판
80년대는 도시의 시대이다. 산업화와 함께 인구의 도시 집중이 이루어진 데서도 그러하지만, 현실적 생활과 의식까지 변했다. 건축물의 기획과 각종 사회기반시설의 확충 정비로 인해서 도시의 공간은 전통사회 시골의 주거환경보다 더 안락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온 향촌을 고향으로서 그리워 할 대상으로는 여겼지만 돌아가 영주할 공간으로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며, 도시는 임시로 붙어사는 직장만이 아니라 생애를 통해 거주할 공간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도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현실적 공간으로서 비판하면서 동시에 수용하게 되었다.
립스틱 짙게 칠한 이십대의 앳된 여인 잘강잘강 껌을 씹으며 거울을 들여다본다. 속눈썹 치켜올리며 동공을 크게 한다.
촉수 높여 대낮 같은 삼파장 불빛 사이 무정란 알을 찾듯 그리움이 몰려오면 관능을 배운 손길로 피워 내는 가화 한 촉 김복근, <지하상가 3. 화장품 가게 M양>
도시적 삶이 비판의 대상이거나 한탄할 무엇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현실은 누구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간섭하기 이전에 존재한다. 이러한 인식이 현대의 도시적 사고이다. “립스틱”, “껌”, “속눈썹”, “불빛”, “무정란”, “관능”, “가화” 등 나열된 시어만으로도 부정적 이미지를 뿜어낸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런 시어들로 일관하면서도 미적으로 추하거나 도덕적으로 나쁘지 않다. 앞수에서 화장을 하는 이십대의 여인은 그냥 아름다울 뿐이지 그 아름다움이 그의 심성과는 무관하다. 뒷수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밝은 곳에서 드러내고 마침내 가화 한 촉이 된다. 그리움조차 무정란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피워낸 가화(假花)는 차라리 가화(佳花)일 뿐이다. 도덕적으로 내몰릴 수 있는 삶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받아들여지는 것, 이것이 도시적 정서이다.
쓸모없는 이름은/서류에나 있다. 市場에 가면/갸웃대는 복제품들 고향이 서울 문방구/복사기 X 맞지요? 김일연, <복사기 X> 중
익명성과 대량생산은 현대와 도시의 대표적 상징들이다. 이 작품은 그 점을 냉정하게 그려낸다. 초장에서 이름은 쓸모가 없으며 서류에나 있다고 하였다. 전통적으로 이름은 사람이며 때로는 그 이상이다. 특히 한국인에게 이름은 혈연으로서 종적 위계와 횡적 연대를 표시하며, 지연으로서 집단의 규모까지 나타내는 정보이다. 개인에게 가장 든든한 보호 장구이자 족쇄이기도 하다. 이름이 쓸모없이 서류에나 남아 있다는 것은 개인이 혈연과 지연의 연대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것이 외로움이나 탄식 같은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데서 도시적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중장의 복제품도 마찬가지이다. 종장에서 서울의 문방구라는 익명의 장소를 “고향”이라고 부른 것은 그 익명성과 복제에 대하여 담담한 태도이다.
당신은 누구냐고/다그쳐 묻길래 얼결에 내 대답이 <사람>이라 했더니라 그렇지 사람이라……사람이라……/그냥 가라 합디다. 이상범, <通行中에>
이상범은 원로 시인이다. 이미 1960년대에 등단하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는 성실한 작가이다. 이 작품은 탄력 없이 느슨한 서술로 볼 수도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압축한 한 장의 기록사진과 같다. 초장은 이른바 불시에 가두에서 검문을 해대던 80년대 상황이다. 중장은 그냥 시민이 얼결에 한 대답이고, 종장은 서로 머쓱해하며 헤어지는 장면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흔히 있던 도시의 일상이다. 그래서 풍속화이다.
(3) 여성적 젠더의 재발견
근대 이후에도 여성 작가들에 대해서는 “여류”, “여성” 같은 관형사가 붙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이들의 작품은 대개 섬세하고 감성적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여성 작가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작품에 대한 인상적 선입견이 많이 없어졌다. 이후에도 동인의 구성원으로 여성이 한정되는 경우는 적지 않지만 그것이 작품의 경향과 직결되지는 않았다. 시조단에도 80년대 이후 여류 작가의 수가 급격히 많아졌다. 동시에 페미니즘 또는 젠더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굳이 그런 것을 표방하지 않더라도 생명 존중, 평등, 기층문화 같은 가치를 인식하는 데 사회 문화적으로 여류작가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더구나 저항이나 분노의 정서가 부각되는 시대에, 하나의 균형으로서 온화하고 근원적인 정서가 자리하였다. 시조는 장르의 전통상 후자의 경향이 강하였으므로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난 한 촉 벌고 있는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진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이것 좀 대신 써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꼬깃꼬깃 접혀진 세종대왕 얼굴 위로 검게 젖은 빗물이 고랑 되어 흐른다. “애비는 그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하순희, <비, 우체국> 네 수 중 제 1,2수
시조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면적 기술이다. 묘사로 일관하는 것이 현대성을 드러낸다면, 제3행과 6행에 인용문을 써서 장르적 구성을 보여준다. 시조가 읽는 시로 인식되면서 장(章)이 행(行)의 역할에 만족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인용문으로 처리된 대화체는 매우 압축적이어서 종장의 구실을 감당한다. 대신 써 달라는 화자는 당연히 글을 모른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그 앞줄에 놓인 가난한 삶의 원인이다. 그 사실을 화자의 직접 진술을 통해서 드러냄으로써 글을 써 주는 또다른 화자는 감정적으로 매우 자유롭다. 6행의 대화체도 그렇다. 가난과 배고픔 앞에서 “난 괜찮다.”는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다. “잘 들어야 할” 말씀은 언제나 아버지의 권위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둘의 자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았다. 이를 통해 부모의 역할은 평등해지며, 가족의 신뢰 같은 가치도 잘 살아난다. 이러한 지향은 작자가 여류라는 데서 오는 게 아니다. 시대적 가치에 대한 성찰에서 온 것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太初의 어머니였거니, 서 말 석 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이는, 그래서 세상 모든 어머니의 뼈는 검거니, 검고도 또한 가벼웁거니, 흑단 자단의 그 뼈는 박기섭, <어머니의 뼈>
박기섭은 시조의 형식과 표현을 지속적으로 실험하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이다. 그런 경향에서 이 작품을 보면 다소 당황스럽다. 길어진 중장 전부와 종장의 전반부가 인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불경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중 석가모니불이 아난에게 왜 여성의 뼈가 검고 가벼운지 설명하는 내용을 요약해 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부모은중경』은 매우 감성적으로 기술된 경전이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립적으로 설정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모은중경』이다. 중장은 초장과 종장을 위해서 경전의 절대성을 빌려온 것이다. 초장에서는 세상 모든 어머니가 태초의 어머니라고 선언적으로 서술하였다. 어머니의 여성성이 생명의 시원이며, 그 시원은 개개의 어머니를 통해서 영원히 전승된다는 메시지이다. 중장이 길게 인용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 점을 보여준다. 피흘리고 소멸해 가는 존재는 바로 우리가 매일 보거나 보았던 그 한 사람의 어머니이다. 종장에서 검고 가벼운 열성(劣性)이 곧 흑단 자단의 향기롭고 단단한 우성(優性)이라는 역설이 여성성의 본질을 내보였다. 이 점이 근원에 대한 탐색이자, 곧 여성적 젠더의 재발견이다.
<덧붙이는 말>
시조와 자유시를 균형 있게 다루는 <서정과 현실> 편집진이 애초에 필자에게 고시조의 흐름을 개관하라고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었다. 개화기 시조까지 다루고 나자 내친 김에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연속성을 살피기 위해 계속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였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서 욕심을 내어 보았지만 과욕이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다루면서 역부족을 절감하였다. 대부분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기도 하고, 너무나 다양하고 풍성한 작품 세계를 어떻게 가르고 묶을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현대시조 연구자들의 저작을 눈여겨 읽어보아 깁고 고칠 곳이 많으며, 이후의 작품에 대해서도 공부한 뒤에 기회가 주어지면 추가할 계획이다. 고마움과 두려움이 반반이다.
<참고문헌>
신웅순, 현대시조시학, 문경출판사, 2001. 엄경희 편, 이우걸시조연구, 태학사, 2013. 오세영 외, 한국 현대 詩사, 민음사, 2007. 유성호, 정격과 역진의 정형 미학, 작가, 2014. 이승하 외, 한국현대시문학사, 소명출판, 2005. 이승하, 향일성의 시조시학, 고요아침, 2015. 이우걸, 우수의 지평, 동학사, 1989. 이우걸, 젊은 시조문학 개성읽기, 작가, 2001. 이지엽, 한국 현대 시조문학사 시론, 고요아침, 2013. 장경렬, 시간성의 시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한국시조시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50년사, 작가, 2015.
《서정과현실》2018. 하반기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