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용은 「월간 종합문예지 문예사지 6월호」와 「전우뉴스 2022년
6월 15일(수) 제181호 19면」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구순(九旬)노병의 슬픈 6.25전쟁 에세이(essay)
-호국보훈의 달'에 추천한 국가 영웅
(이주건 前하사)님의 이야기 -지은이 함경달-
내 나이 90세가 넘으니, 백수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언제 하늘에서 부를 지 모르지만 갈 준비는 되었다.
기나긴 세상을 살아오면서, 오직 부유한 국가, 튼튼한 국가안보가 뒷받침되어야 후손들이 전쟁 없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사료(思料)하고 있다.
나는 1950년 8월, 6.25전쟁이 발발한 지 2개월 지날 무렵, 해방의 기쁨으로 꿈에 부푼 20대의 젊은 나이에 부산
육군하사관학교에서 강인한 전투 교육 훈련을 마치고 하사로 임관 되어 수도사단(맹호사단) 1연대 말단
소총(小銃)분대장에 배치됐다.
당시, 38선을 불법 침탈(侵奪)한 북괴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고, 각종 포탄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많은
탱크로 모든 건물과 각종 시설들이 초토화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우리 서민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
북괴군의 남친은 3개월 동안 지속했다. 수원방어선과 대전(금강)방어선을 포함하여 전 전선은 그들의 수중에 순식간에
떨어졌고, 최종적으로는 낙동강 최후방어선까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와 마지막으로 부산을 목표로 모든
전투력이 집중되었다.
우리 수도사단은 국군, 미군, 영국군 등 UN군과 함께 마산, 왜관, 다부동, 영천, 경주, 포항 등을 연결하는
낙동강 방어선의 우측에 투입 되어 물밀듯이 공격해 오는 적의 무리와 밀고 밀리는 혈전을 벌였고, 국군과 UN군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나는 9명의 용맹스러운 분대원과 함께 '멸공의 횃불', '전우가' 등 군가를 부르며 용기를 북 돋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으로 북괴군의 강력한 공격 기세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一助)를 했다.
이후,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했고, 9월 15일 북괴군의 옆구리인 인천상륙장전에 성공한 후
마침내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우리 사단은 그 여세를 몰아 적에게 유린(蹂躪)당한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기점으로 시작하여 동해안의 삼척, 동해, 강릉, 고성, 함흥을 경유하여 쫓기는 적의 잔존 세력을 격퇴시키면서 북진을 계속했다.
북괴군은 도망치면서도 비무장한 양민들을 남녀노소(男女老少) 구분 없이 무자비하게 총검으로 죽였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시체가 마을 어귀(모퉁이)에 처절하게 쌓여 있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한 만행을 목격하고 눈물로 밤잠을 지새면서 "무찌르자 오랑캐, 때려잡자 김일성."을 마음 속 깊이 외치며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1950년 12월 초순인데도 함경도는 엄동설한(嚴冬雪寒)으로 영하 30도를 오르내렸고 무릎 위까지 눈이 쌓인 심한
추위의 깊은 겨울이었다. 우리는 북한 땅 맨 북단에 있는 함경북도 '청진시'를 탈취하였으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26만 중공군 침략군'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불시공격을 해와 남북통일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북한을 탈출하는 피난민,
남으로 철수하는 UN군과 함께 잊을 수 없는 눈물의 1.4후퇴인 흥남철수작전의 쓰라림도 겪게 되었다.
우리 부대를 향하여 물밀 듯이 공격해 오는 중공군은 요란하게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따발총과 중.장거리 곡사
포탄을 쏘며 사면(四面)에서 몰려와 우리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마침내 전투력이 부족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었고, 불명예스럽게 포로가 되었다.
나는 중공군의 후방지역인 두만강 주변에 있는 포로수용소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곳은 8.15해상 前에 일본군들이
독립군을 체포해 각종 고문을 악랄하게 했던 교도소였다.
그곳에서 1년 동안 지옥의 포로 생활을 했다. 하루 한 끼 또는 이틀에 한 두 번씩 음식물을 제공받았다. 그리고 1951년
가을 어느 날 북괴군에 인계되어 평양 인근 산 속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이동하여 인간 이하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포로 생활은 지옥이었고 악몽(惡夢) 그 자체였다.
천만다행이다!
1953년 7월 「미국과 UN군, 중공군과 북한군」이 휴정협정을 체결하여, 판문점에서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고, 나는
한국군, 미군, 영국군 등 포로들과 함께 다행히 풀려났다.
그리운 고향에 도착하니, 살아서 돌아온 자식을 보신 부모님, 그리고 형제와 일가친척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전쟁의 아픈 추억을 가슴에 새기며 육군하사로 전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낙동강 최후방어로부터 함경북도 함흥, 청진을 수복하는데 기여한 공이 지대하여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제작된 영예(榮譽)로운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게 되었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나는 무상한 세월 속에 벌써 구순이 지나 백수를 향하고 있다. "72년 前 나라를 지키기 위해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하며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신 먼저 가신 전우와 함께 차라리 죽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수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도 내 곁을 떠났다. 요즈음, 아무리 자식들이 잘한다 해도 마누라처럼 알뜰살뜰하고 마음 편한
사람이 세상에 없었기에 더욱 그립다.
"제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지금도 몸서리쳐지는 중공군과 북괴군의 포로 생활이 꿈 속에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同族相殘), 민족전쟁의 비극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으니, 국토방위(國土防衛)와 국익을 위해 희생하신 6.25전쟁, 월남전 및 對 침투 작전에 참전하여 희생하신 많은 영웅들의 노후 생활 안정을 위해 지원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70년이 지났지만, 나는 20대의 젊은 대한민국 육군하사로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나라 위해 싸웠고, 적의 포로 생활에서 살아온 수많은 역경(逆境)을 '전우뉴스'와 언론 등에 공개하고 나니, 지금 눈을 감아도 여한(餘恨)이 없다.
끝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험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충성을 다 했던 나의 6.25전쟁 뼈아픈 추억담(追臆談)을 어루만져 주신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중랑구지회장 김승회님과 본 글을 '전우뉴스신문'과 '월간 문예사조'를 통해 게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함경달 작가(시인)님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첫댓글 맞습니다. 서초국장님!
너무 좋은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