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우정(友情)
고려 말기에 '이당'은 광주 고을 관아의 아전 출신으로 원님의 딸과 결혼했던 신분이 기록에 남아 있어서 광주이씨의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이당'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5명의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영광도 누렸다.
'이당'의 아들 '이집'에게는 '최원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영천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하자 개성으로 올라와 이집과 어울리며 살았다. '이집'과 '최원도'는 함께 동문 수학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둘 사이의 우정은 아주 돈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기는 공민왕이 개혁을 위해서 등용한 요승 '신돈'이 절대 권력을 휘드르자 점차 타락하여 세상이 어려운 시대였다.
'최원도'는 공민왕 때 대사간을 지냈는데 여러 번 '신돈'의 전횡을 비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자 그 꼴을 참지 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영천으로 낙향을 해버렸다.
'이집'도 벼슬을 버리고 대로의 벽면에 '신돈'을 비난하는 대자보도 붙였으며 군중들을 모아놓고 '신돈'을 신랄하게 성토하였다. 그리고 한양의 변두리 지금의 둔촌동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일은 크게 벌어졌다. 당시 공민왕으로부터 절대 권력을 위임받은 '신돈'의 무리들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한양골을 수색하며 돌아다녔다.
'이집'은 자신이 숨어서 은둔하던 둔골마져 드러날 것이 분명해지자 급한 마음에 늙은 아버지(이당)을 등에 업고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어디에도 숨어지낼 곳이 없던 '이집'은 고민하다가 경상도 영천 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떠났다.
몇 달 만에 '최원도'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그의 생일날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이집'은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면서 하인들에게 그가 왔음을 전하라 하였다.
친구 '최원도'는 소식을 듣고 순식간에 문간방으로 뛰어 나왔다. '이집' 은 자신을 '최원도'가 반기는 줄 알고 얼른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데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크게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이냐?”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당황스러웠다. 매우 난처해하며 말하였다.
“여보게!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주게나!”
그러나 '최원도'의 태도는 더욱 격노하면서 하인들을 시켜서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았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 사랑채를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생일잔치에 모였던 사람들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다.
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칫하면 멸문의 화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은 이해되면서 평소에 신의가 확실하던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가서 덤불에 몸을 숨기고 밤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 사람들 모르게 '이집'이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두워지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보면서 조용히 불렀다.
“친구, 어디에 있는가? 나는 원도일세!”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 선생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4년 동안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며칠 뒤에 '이집'을 잡아 죽이려는 '신돈'의 무리들이 '이집'의 친구 '최원도'가 살고 있는 영천 고을에 들이 닥쳤는데 물 한 그릇도 주지 않고 둔촌 '이집'을 내치는 것과 역적이 앉았던 사랑채를 불태웠던 장면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 등으로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다락방 생활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을 드는 몸종과 부인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가져온 밥상은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낮이면 다락에 숨어 지내다 밤이 되면 한 이불을 덮고 세 사람이 함께 잤다.
그런데 '최원도'의 집에 '연아'라는 얼굴도 이름도 예쁜 19살 계집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친구의 부자라고 생각지 못하고 첩이라도 둔 걸로 생각하고,
'벽장 속에 사람이 있으시면 말씀을 하실 것이지 숨겨 놓으십니까?'라고 하자, '최원도'는 친구 부자가 숨은 것을 아는 걸로 착각하여 큰 일이라 생각하여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만약에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한편 '연아'는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몇 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하고 비밀을 지켰다.
'최원도' 부부는 몸종 '연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연아'를 뒷산에 묻어 주었다.
다락방에 은거생활이 1년이 채 되기 전에 '이집'의 아버지(이당)가 별세하였다.
'이집'의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던 '최원도'는 장례를 준비하고 슬퍼함에 있어서도 친부모와 다름없이 하였다. '최원도'는 자신이 사용하려던 수의를 '이당'의 시신에 입히고 자신의 선영에 모셨던 모친의 옆에 '이당'을 모셨다.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가 있다.
한편 부패한 '신돈'이 대중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정에서는 '최원도'와 '이집'을 중용하고자 여러 차례 불렀으나 두 친구는 벼슬길에 응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택해서 조용히 학문을 닦으면서 여생을 마쳤다.
'이집'은 경기도 여주로 내려와 이포 강가에서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김구용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리고 '신돈'의 세력을 피해서 '이집' 선생이 잠시 머물렀던 둔골은 오늘날 서울 둔촌동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세월은 흐르고 흘렀지만 양쪽 가문의 우정은 이어졌다. '이집' 의 후손들이 산 밑에 보은당(報恩堂)이라는 집을 지어놓고 '최원도' 의 은혜를 추모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영의정을 지낸 한음 '이덕형'은 선조를 도왔던 '최원도' 선생께 감사하면서 경상도 도체찰사로 재임시에 위토를 마련하여 두 어르신의 제사를 같은 날 지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월 10일이 되면 영천의 나현(蘿峴)에서는 양가가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면서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한다.
'이당'의 묘지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인 '연아'의 묘와 묘비가 세웠졌고 양쪽 집안 조상의 묘제 때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자결했던 '연아'의 무덤인 연아총(燕娥塚)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멸문지화의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지켜가는 인간의 도리,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세태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참다운 도리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전설 같은 실화입니다.
첫댓글 아름다운 우정과 신의에 대한 감탄, 그리고 주인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연아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참 멋진 우정 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