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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선교초기 지역분배
6월은 국가보훈의 달입니다. 오전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오후예배에서는 우리가 사역하고 있는 이 진주지역의 선교역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914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따라서 우리나라 한반도를 해외선교사님이 지역을 나누어 사역을 분담하기로 하였습니다. 함경도는 캐나다 선교부, 평안도는 미국북장로교선교부, 강원도북부와 경기도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 충청도는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 경북은 미국 북장로교회,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교회, 경남은 호주장로교회 선교부가 맡았습니다. 이 경남 지역은 호주선교사의 사역 결과로 남게 되었습니다.
호주선교사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 항상 시작하는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데이비스 선교사입니다. 그 선교사님은 1889년에 입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6개월간 언더우드 선교사 팀에서 한글 교육을 받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선교에 동참을 조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산까지 걸어서 오게 됩니다. 서울과 충청도와 전라도를 거쳐서 순천, 남해, 진주 등을 지나 부산까지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풍토병에 걸려서 4월 5일 병사하게 됩니다. 한국에 온지 6개월만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호주장로교 선교부에서 1891년 메켄지 선교사 부부와 세 명의 미혼 여선교사를 부산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호주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메켄지 선교사는 부산에 상애원을 설립하여 부산경남 일대의 수 많은 나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감당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전도사 때 그곳에서 사역을 하며 배우고 목사가 되어 여수애양원의 나환자 교회를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부산과 경남 선교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서는 초량교회를 제일 먼저 세웠습니다.
첫째: 진주지부의 선교사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성령을 받아 땅끝 선교를 감당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따라 그 먼 호주에서 한반도에 와서 경남 선교를 감당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호주선교부에서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경남지역을 선교지부로 분할하여 선교하였습니다. 부산지부, 진주지부, 마산지부, 통영지부, 거창지부 이렇게 분할하여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이곳 진주지부에는 처음 사역자가 커럴 휴 선교사였습니다. 커럴 휴 선교사는 의사선교사인데 1905년 진주지부를 맡아서 부산에 이어 두 번째 선교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 마산, 1913년 통영지부 그 후 거창 지부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커를 휴 선교사(한국명칭 거열휴)는 그의 부인 에셀 앤스티 선교사와 두 딸이 있었고 그를 도운 한국인 조사 박성애와 그의 부인 박순복 등 가족이 함께 9명이 진주에 와서 진주교회를 세웠습니다. 지금의 합동측 진주교회입니다. 1905년에 진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20여명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3년 배돈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의료선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배돈병원이라 이름을 지은 이유는 당시 호주선교부 총무 패튼이 후원을 하는데 그의 어머니 패튼 부인이 크게 후원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패튼 부인을 기념하는 교회라 하여 배돈교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6.25전쟁이 있기까지 오랫동안 병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전쟁 후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진주읍교회, 진주송백교회, 하동읍교회, 하동입석교회, 하동 여의교회(횡천교회), 삼천포 동금교회(현 삼천포교회), 남해상신교회(현 창선교회 등 7개처 교회 설립에 공헌했습니다. 그 이후 호주선교사님들이 진주와 주변 일대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러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남성학교인 광림학교와 여성학교인 정숙학교를 세워서 운영을 했습니다. 특히 여학교는 그 이름 정숙학교에서 시원하교로 변경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넬리 스콜스 여선교사의 헌신으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처음 학교를 창립할 때 커를 휴 선교사 부인 에셀 샌스티 선교사님이 설립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 넬리 스콜스 여선교사님이 교장으로서 열성적으로 헌신하고 운영하여 학교가 크게 발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시원여학교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학교가 1939년 일제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 되었습니다.
진주성경학교
선교사님들은 1911년부터 진주성경학교를 세워서 성경을 구체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진주성경학교의 출신 중에 손양원 목사, 조수옥권사, 최덕지 목사 등 많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습니다. 손양원목사의 아버지 손종인 장로는 함안 칠원에서 예수를 믿어 칠원교회를 짓는데 자신의 전답을 팔아서 헌신을 했습니다. 당시 존 메크리에 선교사 한국식 이름 맹호은 당회장 목사님으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죤 메크레이 선교사님은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나니면서 진주지방 주변 일대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특히 장날이 되면 큰 나팔을 불고 사람들이 모이면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훗날 이 성경학교 교사였던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등은 순교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학교 출신인 손양원 목사, 최덕지 목사, 조수옥권사 등 신사참배 반대의 걸출한 인물이 배출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평양감옥에서 순교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4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을 하여 6.25 때 공산군에 의해 순교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하죠.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는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공산청년에게 총살을 당하여 순교를 합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 아들을 죽인 안재선 공산청년을 살려서 전도하여 예수 믿게 했습니다. 그리고 안재선 그 분의 아들이 현재 목사가 되어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최덕지 여목사님은 옥고를 치른 후 해방이 되어 재건교회에서 헌신하여 훗날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회복운동에 열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조수옥 권사님은 해방 후 출옥되어 마산에서 살았는데 6.25 전쟁 후 전쟁고아들을 모아서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그것이 발전이 되어 지금 동마산 I.C 근처 경남복지원이 있습니다. 경남에서 제일 잘 된 복지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호주 선교사와 교인들의 사회활동 기여
형평성 운동
라이얼 목사님과 아담슨 목사님이 1909년 4월 8일에 진주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 때 진주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커를 휴 선교사 부부가 호주에 들어가고 안 계실 때입니다. 그 때 여선교사 두 명 케리와 스콜스 두 여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400명이 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아직 이 남자 선교사님은 한국 말이 스툽니다. 그러나 여선교사님이 잘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처음에 양반인들이 교회에 많이 출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백정들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백정은 천민으로 치부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양반 성도들이 천민인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백정 성도들이 자신들 때문에 양반들이 교회를 나갔다고 생각하니 미안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교회를 나갈테니 당신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 때 양반 성도들이 미안에서 그 마음을 고쳐먹고 그러면 함께 예배드리자 하여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까지 새로 우신 두 선교사님들이 잘 지도를 하고 한국어에 능통한 두 여선교사님이 설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도들이 다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양반이나 천민이나 계급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운동이 형평성 운동입니다. 당시 사회가 너무나 계급화 되었을 때 함께 더불어 사는 운동을 했는데 그것이 교회에서 시작되어 형평성 운동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국에서 형평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전국으로 확대되어 운동이 일어날 때 즈음에는 이미 이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이 되어 기독교인들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이 되어버렸습니다.
1919년 만세운동을 일으킬 때 교인들이 주도를 하였습니다. 당시 수많은 광림학교 출신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6월에 일본 헌병대사령부가 작성한 소요사태 보고에 의하면 3월 18일 진주 읍내 장날 기하여 4천명, 시위운동이 개시하여 21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22일 수고면 창촌리, 25일과 31일 문산면 소문리,4월 3일 반성면 등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일본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발포함으로 해산시켰습니다. 소요사태에 참가한 사람들의 종교를 보니 기독교가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불교와 천도교라고 했습니다. 그 때 기독교 인구는 1%로 안 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예수교인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이 3,493명이었는데 검거된 사람은 남녀가 99명이며 검찰 송치가 95명이었다고 합니다. 진주지방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 하다가 옥고를 치르거나 순교를 하였습니다.
6월은 국가보훈의 달입니다. 오전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오후예배에서는 우리가 사역하고 있는 이 진주지역의 선교역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914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따라서 우리나라 한반도를 해외선교사님이 지역을 나누어 사역을 분담하기로 하였습니다. 함경도는 캐나다 선교부, 평안도는 미국북장로교선교부, 강원도북부와 경기도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 충청도는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 경북은 미국 북장로교회,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교회, 경남은 호주장로교회 선교부가 맡았습니다. 이 경남 지역은 호주선교사의 사역 결과로 남게 되었습니다.
호주선교사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 항상 시작하는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데이비스 선교사입니다. 그 선교사님은 1889년에 입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6개월간 언더우드 선교사 팀에서 한글 교육을 받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선교에 동참을 조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산까지 걸어서 오게 됩니다. 서울과 충청도와 전라도를 거쳐서 순천, 남해, 진주 등을 지나 부산까지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풍토병에 걸려서 4월 5일 병사하게 됩니다. 한국에 온지 6개월만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호주장로교 선교부에서 1891년 메켄지 선교사 부부와 세 명의 미혼 여선교사를 부산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호주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메켄지 선교사는 부산에 상애원을 설립하여 부산경남 일대의 수 많은 나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감당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전도사 때 그곳에서 사역을 하며 배우고 목사가 되어 여수애양원의 나환자 교회를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부산과 경남 선교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서는 초량교회를 제일 먼저 세웠습니다.
첫째: 진주지부의 선교사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성령을 받아 땅끝 선교를 감당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따라 그 먼 호주에서 한반도에 와서 경남 선교를 감당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호주선교부에서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경남지역을 선교지부로 분할하여 선교하였습니다. 부산지부, 진주지부, 마산지부, 통영지부, 거창지부 이렇게 분할하여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이곳 진주지부에는 처음 사역자가 커럴 휴 선교사였습니다. 커럴 휴 선교사는 의사선교사인데 1905년 진주지부를 맡아서 부산에 이어 두 번째 선교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 마산, 1913년 통영지부 그 후 거창 지부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커를 휴 선교사(한국명칭 거열휴)는 그의 부인 에셀 앤스티 선교사와 두 딸이 있었고 그를 도운 한국인 조사 박성애와 그의 부인 박순복 등 가족이 함께 9명이 진주에 와서 진주교회를 세웠습니다. 지금의 합동측 진주교회입니다. 1905년에 진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20여명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3년 배돈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의료선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배돈병원이라 이름을 지은 이유는 당시 호주선교부 총무 패튼이 후원을 하는데 그의 어머니 패튼 부인이 크게 후원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패튼 부인을 기념하는 교회라 하여 배돈교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6.25전쟁이 있기까지 오랫동안 병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전쟁 후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진주읍교회, 진주송백교회, 하동읍교회, 하동입석교회, 하동 여의교회(횡천교회), 삼천포 동금교회(현 삼천포교회), 남해상신교회(현 창선교회 등 7개처 교회 설립에 공헌했습니다. 그 이후 호주선교사님들이 진주와 주변 일대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러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남성학교인 광림학교와 여성학교인 정숙학교를 세워서 운영을 했습니다. 특히 여학교는 그 이름 정숙학교에서 시원하교로 변경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넬리 스콜스 여선교사의 헌신으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처음 학교를 창립할 때 커를 휴 선교사 부인 에셀 샌스티 선교사님이 설립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 넬리 스콜스 여선교사님이 교장으로서 열성적으로 헌신하고 운영하여 학교가 크게 발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시원여학교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학교가 1939년 일제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 되었습니다.
진주성경학교
선교사님들은 1911년부터 진주성경학교를 세워서 성경을 구체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진주성경학교의 출신 중에 손양원 목사, 조수옥권사, 최덕지 목사 등 많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습니다. 손양원목사의 아버지 손종인 장로는 함안 칠원에서 예수를 믿어 칠원교회를 짓는데 자신의 전답을 팔아서 헌신을 했습니다. 당시 존 메크리에 선교사 한국식 이름 맹호은 당회장 목사님으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죤 메크레이 선교사님은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나니면서 진주지방 주변 일대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특히 장날이 되면 큰 나팔을 불고 사람들이 모이면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훗날 이 성경학교 교사였던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등은 순교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성경학교 출신인 손양원 목사, 최덕지 목사, 조수옥권사 등 신사참배 반대의 걸출한 인물이 배출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평양감옥에서 순교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4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을 하여 6.25 때 공산군에 의해 순교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하죠.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는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공산청년에게 총살을 당하여 순교를 합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 아들을 죽인 안재선 공산청년을 살려서 전도하여 예수 믿게 했습니다. 그리고 안재선 그 분의 아들이 현재 목사가 되어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최덕지 여목사님은 옥고를 치른 후 해방이 되어 재건교회에서 헌신하여 훗날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회복운동에 열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조수옥 권사님은 해방 후 출옥되어 마산에서 살았는데 6.25 전쟁 후 전쟁고아들을 모아서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그것이 발전이 되어 지금 동마산 I.C 근처 경남복지원이 있습니다. 경남에서 제일 잘 된 복지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호주 선교사와 교인들의 사회활동 기여
형평성 운동
라이얼 목사님과 아담슨 목사님이 1909년 4월 8일에 진주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 때 진주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커를 휴 선교사 부부가 호주에 들어가고 안 계실 때입니다. 그 때 여선교사 두 명 케리와 스콜스 두 여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400명이 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아직 이 남자 선교사님은 한국 말이 스툽니다. 그러나 여선교사님이 잘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처음에 양반인들이 교회에 많이 출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백정들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백정은 천민으로 치부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양반 성도들이 천민인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백정 성도들이 자신들 때문에 양반들이 교회를 나갔다고 생각하니 미안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교회를 나갈테니 당신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 때 양반 성도들이 미안에서 그 마음을 고쳐먹고 그러면 함께 예배드리자 하여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까지 새로 우신 두 선교사님들이 잘 지도를 하고 한국어에 능통한 두 여선교사님이 설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도들이 다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양반이나 천민이나 계급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운동이 형평성 운동입니다. 당시 사회가 너무나 계급화 되었을 때 함께 더불어 사는 운동을 했는데 그것이 교회에서 시작되어 형평성 운동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국에서 형평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전국으로 확대되어 운동이 일어날 때 즈음에는 이미 이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이 되어 기독교인들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이 되어버렸습니다.
1919년 만세운동을 일으킬 때 교인들이 주도를 하였습니다. 당시 수많은 광림학교 출신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6월에 일본 헌병대사령부가 작성한 소요사태 보고에 의하면 3월 18일 진주 읍내 장날 기하여 4천명, 시위운동이 개시하여 21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22일 수고면 창촌리, 25일과 31일 문산면 소문리,4월 3일 반성면 등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일본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발포함으로 해산시켰습니다. 소요사태에 참가한 사람들의 종교를 보니 기독교가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불교와 천도교라고 했습니다. 그 때 기독교 인구는 1%로 안 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예수교인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이 3,493명이었는데 검거된 사람은 남녀가 99명이며 검찰 송치가 95명이었다고 합니다. 진주지방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 하다가 옥고를 치르거나 순교를 하였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를 헌신하고 조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희생의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의 빛이 되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 믿음으로 신앙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서 이 땅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였으니 기도하며 이 땅 주민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합니다. 이 땅이 빛이 되어 봉사해야 합니다. 아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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