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유명 화가들의 개 그림
◆ 두성령 이암 (杜城令 李巖)
두성령 이암(杜城令 李巖:1499 ~1545?)의 자(字)는 정중(靜仲),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 1418~1469)의 증손으로, 벼슬은 두성령(杜城令)을 제수받았다.
1545년 인종 초 선왕 중종의 어용(御容)을 추화(追畫)할 때 참여하였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영모화(翎毛畵) 화가로, 특히 착색한 강아지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화조(花鳥)와 동물을 잘 그렸다.
이암(李巖)의 개 그림은 조선회화사(朝鮮繪畵史)를 통하여 제1인자로 꼽힐 정도이며, 잡화 그림에 있어서
변상벽(卞相壁)의 <고양이>, 남계우(南啓宇)의 <나비>와 더불어 삼절(三絶)이라 일컫는다.
모견도(母犬圖) : 지본담채 / 73X42.2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의 개는 나무 아래 그려진 경우가 많다. 조선 전기의 왕족 출신 화가 이암(李巖)이 그린 ‘모견도(母犬圖)’가 대표적이다. ‘모견도’는 어미개가 나무 아래 앉아 있고 세 마리 강아지가 젖가슴을 파고드는 그림이다. 어미개는 몸통이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외래종으로 머리에 비해 얼굴이 넓고 길다. 어미 품을 파고드는 검둥이와 흰둥이는 젖을 찾느라 바쁘고 포만감에 빠진 누렁이는 어미 등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어미개의 목에 걸린 화려한 목걸이는 개의 주인이 왕족이나 귀족이었음을 말해준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가미된 목줄로 인해 단조로운 먹색 그림이 산뜻하게 살아난다.
배경처럼 등장한 나무는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렸다. 몰골법은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물감의 농담(濃淡)만으로 면을 채색해 나가는 기법이다. 이암은 ‘모견도’에서 나무의 일부를 그려 공간을 만들고 그 아래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집어넣는 구도를 따랐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전형적인 구도다. 나무 밑에 개를 그린 것은 단순히 개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둑맞지 않게 집을 잘 지킨다는 뜻이다. 개를 뜻하는 술(戌)은 지킬 수(戍)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다. 지킬 수(戍)는 지킬 수(守)와 음이 같고 나무 수(樹)와도 같다. 나무 아래 개가 있는 그림을 붙여 놓음으로써 도둑을 막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지본채색 / 86 X 44.9cm
호암미술관 소장 / 보물 1392호
꽃과 동물이 한데 어우러져 서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봄날 꽃이 활짝 핀 나무에 새 한 쌍이 앉아 있고, 나무 주위로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있다. 나무 아래로는 강아지 세 마리가 한가로운 봄날의 따스함을 즐기고 있다. 검둥이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초롱초롱한 눈매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고, 누렁이는 곤한 잠에 빠져 있으며, 흰둥이는 풀벌레로 보이는 무언가를 가지고 놀고 있다.
쌍구자도(雙狗子圖) : 지본채색/ 76X40cm/ 국립진주박물관
화하유구도(花下遊狗圖) : 일본 민예관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지금 일본이 소장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추정이다.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두 폭 :지본채색 /각각 87X44.2cm/ 평양 조선미술관
화조묘구도는 서로 대칭을 이루는 두 폭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폭이 서로 비슷한 정경과 구조로 되어
모두 짝을 이룬 두 쌍이며 몸짓이 너무도 다정하여 화사한 꽃송이들이 축하라도 하는 듯하다.
◆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장승업(1843(헌종9년)~1897(고종34년)의 본관은 대원(大元) 자는 경유(景猶) 호는 오원(吾園) 또는 취명거사(醉暝居士), 화원(畵員)을 지내고 벼슬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이응헌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살면서 주인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글과 그림을 배우던 중, 중국의 명화들을 구경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는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한다.
성품이 호탕하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여 몹시 취하여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산수, 인물, 절지(折枝), 기완(器玩) 등을 잘 그렸고 강렬한 필법과 묵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이 특징으로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긴다.
장승업은 당시 조선시대 말기 하단의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 뿐만 아니라 잊혀졌던 북종화풍(北宗畵風) 및 당시 새로 수입된 최신 유행의 중국화법까지 받아들이면서 종합 절충하여 전통 화법의 총 결산을 이루는 업적을 달성한다. 세속적인 면에서는 실패했으나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기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으로 평가받는 그는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의 3대 화가, 또는 정선(鄭敾)을 추가하여 4대 거장으로 꼽히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大畵家)이다.
왕실에서는 장승업을 대령화원(待令畵員)으로 불러들여 그림 병풍을 제작하게 했으며 이때 감찰이라는 정6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 받기도 했다. 그러나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했고, 특히 어떤 것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궁궐에서 세 번이나 도망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 = 벽오동나무 아래에서 달을 보고 짖는 개그림」
지본담채(紙本淡彩) 141.8 x 37.5cm / 간송미술관
가을 밤 벽오동나무 아래에서 달을 보고 짖는 개의 모습이다. 벽오동나무 너머 둥근 달이 뜨고
넓디넓은 오동잎이 매달려 있다. 그 아래 개 한 마리가 나무를 쳐다본다. 대충 그린 것 처럼 툭툭 붓질한
개의 얼굴 모습이 마치 추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매우 익살맞게 그렸다.
오동폐월도에는 상징성이 있다. 벽오동나무는 봉황새가 날아 둥지를 트는 신령스런 나무이고,
털이 많이 있는 개는 삽사리를 그린듯하다. 삽사리는 귀신을 쫓는 축귀(逐鬼)의 영험을 지닌 동물로 여겼다.
오동나무 아래의 개는 옛부터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였는데, 이 그림을 보면, 순하고 착한 귀염둥이 개보다는
부리부리한 눈, 털색깔과 신체가 마치 무서운 호랑이를 연상하게 된다. 장승업의 작품 중에는
같은 제목의 또 다른 그림이 여러 장 있으며, 개(특히 삽사리는 '귀신 쫓는 개'라는 뜻)는
벽사(辟邪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의 상징이었으며 고래(古來)로부터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 모음 :
(中央)십곡병풍(十曲屛風) 중에 있는 오동폐월도 / 국립광주박물관
犬圖-그림 속의 강아지는 삽살개로 보인다. 귀신과 액운을 쫓는다는 삽살개는
우리 나라 민화나 삽화에 많이 나와 있다.
쌍구도(雙狗圖):18세기(조선후기) 지본담채 / 68X68cm / 고려대학교박물관
털이 복술복술한 우리 나라 토종견인 삽살개를 그린 그림이다. 삽살개는 머리의 털이 눈을 가리는데,
이 그림에는 두 눈을 또렸하게 그려서 영리하고 준엄한 표정의 모습을 그렸다.
◆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영조34)~1814 ?
나월불폐도(羅月不吠圖-나뭇가지에 걸린 달을 보고 짓지 않는다)
견본수묵 / 25.3X16cm / 간송미술관
달과 개를 같이 그린 그림에서는 대부분 개가 달을 바라보거나, 달을 바라보며 짖고 있는 모습을
많이 그리는데, 이 그림에서는 개가 달을 등진 채 땅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독특하다.
달은 꽉찬 보름달로 이제 막 떠오르는데, 왜 이 개의 표정은 어둡기만 할까?
묘견도(猫犬圖):조선후기(18세기) / 견본담채
31.8X16.3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그림 전경 오른쪽으로도 괴석의 일부가 보이고 있어, 여기서부터는 개, 바위의 뒤틀리면서 움직이는 방향 ,그리고 그 위의 고양이로 이어지는 대각선 구도를 석류가 깨뜨려 준다. 개나 고양이, 특히 개의 잔털 묘사가 잦은 세필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통적 영모도와는 달리 식물이나 석질의 묘선과 크게 대치되지 않고 어울림은 이 그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부탐춘(嫠婦耽春-과부가 봄을 탐하다) 28.2X35.6cm / 국보135호/ 간송미술관
그림 아래 부분의 마당에서 개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다. 그림에 개의 짝짓기라니, 조선시대에 신윤복이 아니면 불가능한 파천황적인 발상이다. 한데 짝짓기를 하는 것은 개만이 아니다. 개로부터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려보면 참새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위로 참새 한 마리가 더 있어 파닥거린다. 바야흐로 봄은 짝짓기의 계절인 것이다.
오른쪽에 두 여인네가 비스듬히 누운 나무에 기대어 서 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문제다. 나무는 소나무로되, 이미 꺾어진 소나무고,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래쪽의 빈약한 잎을 단 가지 둘뿐이다. 소나무는 죽어가고 있다. 집 밖은 생명력이 충만한 봄인데, 여기 돌담 안의 집은 죽어가고 있는 풍경이다.
오른쪽 여자는 삼회장저고리를 제대로 차려 입고 있고, 머리를 길게 땋아 댕기를 묶고 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규수다. 왼쪽 여자는? 구름 같은 가체를 올리고 있는데, 소복이다. 남편이 죽은 여인이다. 여자 둘의 시선은 개의 짝짓기에 가 있다. 그런데 둘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처녀의 표정은 쌀쌀맞고 차갑고 무심하다. 하지만 과부는 배시시 웃는다. 무언가를 안다는 눈치다. 과부의 웃음에 신윤복의 의도가 있다. 신윤복은 과부의 소외된 성욕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 낙파 이경윤(駱坡 李慶胤)
1545~1611
화하소구도(花下搔拘圖)-꽃그늘에서 긁적이는 개 / 16세기 말 (조선 중기)
지본채색 / 17.7 X 15.5cm / 간송미술
어느 봄날, 나무 밑에 자리 잡고 한가로운 때를 보내고 있는 삽살개의 한 정경을 화면에 가득 채운 그림이다.
머리와 등쪽에 검정 얼룩이 든 개의 덥수룩한 털을 한올한올 묘사하였다. 콧등과 콧털의 생생한 묘사가
두 눈과 눈가의 정밀한 묘사에 이어져 그림의 중심을 이루는 머리부분은 정밀성이 두드러진다.
발톱과 발바닥의 묘사도 정밀하지만 한 발을 들어 귀뿌리를 긁고 있는 자세의 변화가
딱딱한 정형의 영모화 화면에 여유를 불어 넣는다.
◆ 화재 변상벽(和齋 卞相壁)
1730~1775 ?
犬圖 :18세기/ 지본담채 / 20X25cm /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 남리 김두량(南里 金斗樑)
1696~1763
화가 김두량 자는 도경(道卿), 호는 남리(南里) . 예천(藝泉)으로 영조 대에 주로 활동한 화원으로 산수. 인물. 영모 등에 두루 뛰어났다. 그의 부친 김효경도 화가였으며, 아들 김덕하가 1748년 숙종 어진 모사에 참가한 화원인 것으로 보아 화업을 대물림 한 집안임을 알 수 있고 더욱이 외조부인 함제건도 화원으로 1682년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바 있어서, 김 두량의 오랜 집안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가 남리라는 호를 직접 내렸고 평생 봉록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할 정도로 아꼈던 화가였으며 화원의 최고위직인 별제까지 오른 인물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집안이 화가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두량은 17세 때 그림공부를 위해 해남에 살고 있던 공재 윤두서를 찾아가 그에게 사사 받았다. 연도를 따져보면 아주 오랫동안 배우지는 못했지만 여러 방면의 능숙한 그림 실력은 다방면에 능숙했던 공재 윤두서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긁는 개<黑狗> : 18세기 중엽 /지본담채 / 23.0 X 26.3cm /국립중앙박물관
뒷다리를 들어 가려운 곳을 긁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린 그림인데 그 화흥(畵興)이나 묘사의 기교 등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긁는 개는 집안에 복을 가져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예부터 많이 그렸다. 그 중 나무 밑에 있는 개는 집을 지킨다는 의미로 그렸다. 그렇다면 나무와 개가 어떤 상관으로 그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일까?
개는 '戌'(개 술)이고, 나무는 '樹'(나무 수)이다. '戌'은 '戍'(지킬 수)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고, '戍'는 '守'(지킬 수)와 음이 같을 뿐만 아니라 '樹'와도 음이 같기 때문에 동일시된다. 즉 술수수수"戌戍樹守"로 도둑맞지 않게 잘 지킨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개의 그림을 그려 붙임으로써 도둑을 막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일종의 주술적 믿음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 고분의 전실과 통로 벽면에도 무덤을 잘 지키라는 의미에서 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으로 알 수 있다.
가려워 죽겠다는 표정과 긁어서 시원하다는 표정이 동시에 담겨 있는 표정이 압권인 이 그림은 표정의 익살스러움뿐 아니라 사실적 묘사가 돋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수법의 묘미는 김두량의 새로운 묘사기법과 더불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표현이었다. 고전적인 동양화법으로 그려진 배경인 초목의 거친 묘사와 대조적인 털과 몸의 명암법을 이용한 입체적 표현기교는 서구적 묘사기법, 즉 태서법을 사용하여 고전과 당시 새로운 화법을 접목시켜 성공 시킨 뛰어난 작품이다.
삽살개 :1743년/ 종이에 수묵담채/ 35X45cm/ 개인 소장
김두량의 호 남리(南里)는 영조가 지어준 것으로 임금이 각별히 총애한 화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의 화제(畵題)도 영조대왕이 직접 썼다. 화면 내에 계해(癸亥)의 간기로 1743년 김두량이 48세 때 그렸음이 확인된다. 잘 알려진 〈월야산수(月夜山水)〉보다 한 해 먼저 그렸다. 고개를 쳐들고 입을 벌려 짖는 자세를 측면으로 화면에 꽉 차게 표현했으며, 약간의 경사를 두어 담묵의 태점으로 지면을 나타냈다. 활달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필치의 이 그림은 개의 표정을 실감나게 그려 귀를 대고 있으면 마치 컹컹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또한 가는 붓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움직이는 털의 흐름을 한올 한올 표현함으로써 명암이 잘 드러나 있다. 가운데 접힌 자국으로 화첩에 속한 그림임을 알 수 있는데, 김시, 김식, 정선, 윤두서, 이징, 김희겸, 이하영, 심사정 등 30명의 영모화로 구성된 화첩에 속한 그림이다.
사립문에서 밤을 지키니 柴門夜直 이것이 바로 임무이다 是爾之任
어찌하여 길 위에서도 如何途上 대낮에도 이와 같은가 晝亦若此.
계해(1743년, 영조 19) 6월 초하루 다음날 김두량이 그림. 癸亥 六月 初吉 翌日 金斗樑圖.
◆ 전 사도세자(傳 思悼世子)
견도(犬圖) : 종이에 먹 / 37.9X62.2cm / 국립고궁박물관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싶은 세자와
부자가 아니라 군신관계로만 대하며 엄격했던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사도세자의 작품이라고 전(傳)하는 또 하나의 개그림이 있다.
점박이는 아니지만, 당당히 선 날렵한 모습과 긴 주둥이,
작고 처진 귀 등으로 볼 때 앞 '개그림'의 개와 동일종 또는 유사종으로 보인다.
두 그림의 화풍도 비슷하다. 둘 다 시원하게 외곽선을 그리고 속을 채운 방식이다.
◆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 ~1806 ?
모구양자도(母狗養子圖) / 1795~1796년경/ 견본담채
90.7 X 39.6cm / 간송미술관
어미개와 두 강아지를 나타낸 것으로 분위기는 조선 전기의 이암(李巖)과 통하되 묘사기법은 철저하게 사생(寫生)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어미게의 당당하면서도 모성애가 깃든 표정과, 강아지들의 귀여운 모습과 동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들이 등장한 배경은 들풀과 더불어 소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호귀응렵도(豪貴應獵圖 :호탕한 귀인의 매사냥)
지본담채 / 28X34.2cm / 호암미술관
어느 겨울, 한 귀인이 일단의 휘하를 이끌고 부근의 야산으로 매사냥을 나왔다. 사냥개 두 마리와 사나운 매가 동원된 사냥이다. 지금 막 놀라 달아나는 장끼를 발견한 매가 쏜살같이 낚아채는 순간, 뒤따르던 사냥개가 날뛰고 짖어대며 사냥의 흥분을 고조시킨다. 이미 몇 마리 꿩을 짊어진 사냥꾼이 다급히 손을 내밀며 매곁으로 다가서고 있다. 겨울 야산의 길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낮은 언덕을 앞뒤로 가볍게 배치하고 전경(前景)의 언덕 밑에는 작은 개울이 살짝 얼굴을 내비쳤다. 겨울이기 때문에 나무는 꽁꽁 얼어붙은 잔가지만이 스산하게 쳐졌다.
이 그림은 1791년부터 1795년까지 연풍현감(延豊縣監)으로 재직하던 단원의 자화상(自畵像)같은 작품이라 생각된다. 단원이 그린 1796년의 <화성춘추팔경도(華城春秋八景圖)>에도 '서성우렵(西城羽獵'의 매사냥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매사냥이 적지 않게 성행했던 듯한데, 연풍은 태백준령의 한 심산(深山) 소읍(小邑)으로 본래 사냥이 많은 곳이었을 터이니, 단원은 이곳에서 적지 않은 사냥을 즐겼고 그 결과 이 그림과 같은 매사냥 장면의 풍속화를 남겼으리라. 등장인물들이 어딘가 고을 원님의 관가 주변 분위기를 풍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새참 :종이에 담채 / 27.0X22.7cm / 국립중앙박물관
◆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
김득신은 1754(영조 30)∼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이다.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초호는 홍월헌(弘月軒). 화원이었던 김응리(金應履)의 아들이며,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이다. 화원으로 첨중(僉中)을 지낸 한중흥(韓重興)의 외손자이다. 인물화와 단원, 혜원을 잇는 풍속화가 뛰어났다. 벼슬은 화원으로 초도 첨절제사(椒島僉節制使)를 지냈다. 그는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졌으나, 풍속화 이외에 도석인물(道釋人物)을 비롯하여 산수 ·영모(翎毛) 등도 잘 그렸다.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풍속화는 그 경향이 두드러진다.
개성 김씨 가문은 김응환때부터 도화서 화원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명문 화원 가문을 이루었다. 따라서 김득신 집안의 구성원은 화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김득신은 활약상에 비해 기록이 적으며 생애도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근역서화징』에는 김득신의 생년이 175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부친 김응리의 생년과 11년, 김응환과는 12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의 생몰년에는 의문이 남는다.
농촌풍일(農村豊日):지본담채 / 32X41cm / 개인 소장
일각주의화풍(一角主義畵風)을 연상하듯 그림 오른쪽에 바위가 비죽이 내밀고 있다. 바위 앞쪽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한 마리의 소, 점심상을 이고 가는 아낙네, 술단지를 들고 가는 남자, 그리고 한 마리의 개가 보인다. 중경(中景) 부근에는 논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보이고, 뒤에는 아주 유현한 공간으로 처리된 운무(雲霧)가 보인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시골 풍경을 한눈으로 실감할 수 있게 한 그림이다.(출처: 두산백과)
성하직구(盛夏織屨-한여름의 짚신 삼기): 지본담채/23.5X28cm/ 간송미술관
사립문에 호박 덩굴이 늘어져 있고, 그 사이로 삐죽 보이는 옹기에서 삶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 인물들을 크게 부각시키고 현실감 풍기는 배경을 표현했지만, 논 뒤로 아득한 공간이 전개되고 앞의 빈 마당은 넓게 남겨둔 점에서 그가 여전히 여백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장 인물을 보면, 삼대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일선에서 물러난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옆에 앉아 지켜보고 있고 등 뒤에서는 손자가 쳐다보고 있다. 풍속장면을 가족간의 관계 속에서 엮어내고 있다. 광대뼈가 불거진 모습의 얼굴 표현에서 농부의 힘든 삶의 역정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할아버지와 아들은 웃통을 벗고 개는 혀를 내밀어 헐떡거리는 등 한여름의 무더위 분위기까지 표현하여 화면을 더욱 풍요롭게 꾸몄다.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지본담채 / 22.8X25.3cm / 개인 소장
그림의 중앙에 큰 오동나무가 우뚝 서 있고 나무 왼쪽에 개가 앉은 자세로 오동잎에 걸린 보름달을 쳐다보며 짖고 있다.
오동나무 오른쪽엔 싸리나무 담장을 두른 초가집이 있는데, 한 사람이 사립문을 열고 나와 담장을 잡고 서서 보름달을 쳐다보고 있다. 보름달이 걸려 있는 오동잎 아래 여백에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한 마리 개가 짖으니 또 한마리 개가 짖는구나 一犬吠 二犬吠
모든 개가 한 마리 개가 짖는 것을 보고 따라 짖네 萬犬從此一犬吠
아이를 불러 '문밖으로 나가 살펴보거라' 하니 呼童出門看
'오동나무 가지에 달만 걸려 있다' 하는구나. 月卦梧桐第一枝
이를 말하는 인물은 가옥 안의 선비이다. 선비의 심부름에 사립문 밖에 나온 동자가 그림에 등장했다. 동자가 살펴보니
아무 일도 없다. 오동나무 저 끝에 달님만 둥실. 동자는 우두커니 섰다. 그렇다면 개도 달을 보고 짖었을 터. 그것은 달빛에 어른대는 오동잎의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다.
******************************************************
아래 속담은 '잠부론(潛夫論'에 실려있다. 잠부(潛夫)란 잠적한 사람이다. 움직이지 말아야 할 때 움직이면 흉하게 된다. 재주가 부족하거나 때가 적절하지 않을 때는 스스로를 멈추고 기다림이 상책이다. 이러한 때를 일러 '潛'이라고 周易에서 칭하였다. 중국 한(漢)나라의 왕부(王符)는 스스로를 '잠부'라 부르면서 세상의 속된 일을 기록하여 '잠부론'을 저술했다.
한 마리 개가 어떤 모양(形)에 짖자 一犬吠形
백 마리 개가 그 소리(聲)에 짖는다. 百犬吠聲
한 마리 개를 짖게 만든 것은 '형'(形)이다. 형은 겉모양이라 실상을 알 수 없다. 한 마리 개는 그 모양이 이상하고 두려워서 짖었을 것이다. 백 마리 개는 한 마리 개의 짖는 소리(聲)를 듣고 짖는다.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않았지만 실상을 본 것처럼 짖는다. 왕부는 걱정한다. "세상에 이런 병이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옳고 그른 사정을 살피지 않는 것을, 나는 걱정하노라"
'잠부론'은 중국과 한국의 학자들이 고전의 대열에 올려놓고 아껴 읽은 책이다. 성균관박사에 오른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이름이 높았던 여대로(呂大老:1552~1619)가 '잠부론'의 속담을 다시 옮겼다.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한꺼번에 천백 마리 개가 짖네. 一犬吠 二犬吠 一時吠千百
개들은 무엇 때문에 짖나? 한갓 소리만 듣고 눈으로는 보지 않았거늘. 群吠爲何物 徒耳不以目
呂大老 : '개 짖음을 듣노라(聞犬吠)'
여대로는 덧붙였다. "시끄러운 것이 싫어서 얼러주고 싶지만, 이놈들이 측간까지 쫓아올까 걱정이로다" 시끄러워도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속된 인간들은 가르치기도 다스리기도 어렵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전(李慶全:1567~1644)의 문집 '석루유고(石樓遺稿)'를 보면, 그가 13세 때 지었다는 한시(漢詩) 한 편이 김득신의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에 적힌 화제(畵題)와 매우 흡사하다.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세 마리 개도 따라 짖네. 一犬吠 二犬吠 三犬亦隨吠
사람일까? 호랑이일까? 바람 소리일까? 人乎虎乎風聲乎
동자가 말하네. 童言
달이 산 위에 올라 등불같고요, 뜰의 반에는 오동잎만 버석거려요. 山外月如燭 半庭唯有鳴寒梧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전이 13세 때 지었다는 이 노래는 오래도록 전해져,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의 그림 위에 다시 적혔다.
◆ 추찬(秋餐) 이희영(李喜英)
1756~1801
앉아 있는 개 : 1795년/ 지본수묵/ 28X32.3cm/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조선왕조 순조실록’에는 이희영 루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희영은 호가 추찬이며, 은성 사람으로 순조 원년(1801년) 신유년에 사학 죄인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따르지 못할 만큼 글씨와 그림의 재주가 뛰어났다고 평하고 있다. 이로써 그가 성화를 그리다 순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최초의 서양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희영의 그림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특히 성화는 박해 중에 숨겨지고 없어졌고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견도(犬圖)’(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뒤늦게 1984년경에 이희영의 호인 ‘추찬’이란 낙관이 선명한 ‘쌍견도’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작가가 천주교 순교자였다는 것과, 또 서양화 기법의 전래를 가늠할 수 있는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쌍견도’의 발견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자 미상인 ‘맹견도’역시 이희영의 작품이 아닐까하는 추정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첫댓글 TV 연속극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두성령 이암의 '母犬圖'가 나온 다음 날부터
이암의 개그림을 모으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지난 번엔 조선시대 유명 화가들의 닭 그림을 모았으니 이번엔 개 그림을 모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태껏 김홍도의 '새참', 신윤복의 '이부탐춘', 김득신의 '농촌풍일'이나 '성하직구'에서 조연으로 나온 개만 보다가
이렇듯 훌륭한 개 그림들을 만나게 되어 눈이 많이 피곤했지만 보람을 느꼈습니다.
우선 그간 내 블로그에서 정리한 것을 올립니다.
선생님 대단한 작업이여요.
전 어깨가 아파서 컴 작업을???
존경합니다.
문제작가 신작 특집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