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산책길]
- 바람이 남긴 구름 -
몸과 마음, 정신을 쉬게 해주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다.
올 추석 연휴가 길어 쉴 기회가 생겼다. 미국 동부와 캐나다 퀘벡 단풍 여행을 하기로 여름에 예약했었다.
지금쯤 여행 중이겠지만 집안에 큰 행사를 앞두어 부득이 취소했다. 단풍을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아들이 생일 선물이라며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에 2박 일정을 정해 주었다. 아내와 함께 추석날 오전에 길을 나섰다. 몸보다 마음을 쉬기 위해 교통 혼잡을 의식하지 않았다. 쉬엄쉬엄 7시간이 걸렸다. 점심은 고속도로 여주 휴게소에서 해결했다.
내년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하는 지역이라 행사 준비로 어수선하고, 길 단장이 한창이다.
평창에서 유명하다는 '황태회관'으로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섰다. 종업원이 20여 명이 넘는다.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대관령의 계곡까지 내려온 바람이 남긴 구름은 멋에 멋을 더한다. 보기 드문 광경이다. 서구형의 리조트와 먹거리, 탈 거리는 우리 세대와는 맞지 않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천국이다.
떠나는 날은 길거리와 음식점에서 줄 서는 것에 익숙해졌다. 상큼한 밤공기를 실컷 마시게 된 것도 먼 길을 인내하고 온 대가였다.
- 줄서기 적응 -
둘째 날 계획은 첫 목적지부터 차질이 생겼다. 오대산 매표소 전부터 차들이 길게 줄을 섰다.
20분이면 도착할 상원사 가는 길이 한나절이 걸려도 가기 어려울 듯해서 다시 차를 돌렸다.
봉평의 이효석 문학관으로 향했다. 이미 주차장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고, 중턱에 자리 잡은 문학관엔 장사진이다. 내 공간이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대관령 옛길을 넘었다. 400년의 역사라는 강릉 초당 두붓집엔 마치 배고픔을 실험하는 장소 같다. 다시 100년 전통이라는 옆집으로 옮겼다.
오래 기다린 보람으로 두부 전골 한 냄비를 끓일 수 있었다. 해는 기울어져 간다.
지나는 길목에 운정동 김시습기념관에 들렀다. 그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평소에 강원도에 오래 머물렀다고 사후에 강릉에 정착시켰다.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남긴 장본인이다. '바탕 하나에 생애를 걸고/ 인연 따라 세상을 살아가오(하략)로 시작되는 7언 율시의 초서체 유필시遺筆詩가 앞마당 작은 비碑에 새겨져 있다.
'사청사우' 시 구절을 떠올려 보았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날씨를 사람과 다름없다고 비유해서 쓴 시를 내 수첩에 오래전에 베껴놓았다. 생육신의 한사람으로서 별난 고집은 죽은 뒤에 멈췄다.
300년의 역사를 지닌 선교장船橋莊으로 발길을 돌렸다. 세종대왕 형인 효령대군 11세손 이내번의 고택이다.
건물에 비해 대문이 작은 편이다. 나그네는 망설이지 말고 부담없이 쉬어가라는 의미로 대문 양쪽 기둥에 시문을 걸어놓았다.
조숙지변수/승고월하문(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ᆞ새는 연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 스님은 달빛 아래 대문을 두드린다). 당나라 가도의 시 구절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겸손한 마음이 담겨있다.
3만여 평의 땅에 열화당悅話堂, 활래정活來亭 등, 99칸이나 된다는 한옥은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다. 오백여 년이 넘었다는 금강송과 어우러진 한옥은 문화 예술의 교류장이다. 조선 시대에는 시인 묵객들이 머물던 곳이다. 일부는 한옥체험 장소로 운영하고 있다.
강릉 해변 커피 거리에는 축제 하루 전인데 사람과 차들이 몰렸다. 도로가 주차장이다. 커피 냄새로만 만족했다. 생일이 하루가 지났지만 너무 아쉽다며 아내가 '평창한우집'으로 가자고 고집한다. 길게 줄서는 식객을 생각해서 서둘러 먹었다.
첫날 보았던 예술같은 구름은 아니지만 산봉우리에 잠시 머물고 있다.
- 소원을 이루고 -
아쉬움이 남았던 상원사길을 다시 찾기로 했다. 셋째날 새벽에 일어나 오대산으로 향했다. 솔숲의 향기가 그윽하다.
월정사를 지나면서 제법 긴 비포장길은 20여분동안 나홀로 길이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이다.잡목에서 뿜는 향기가 어떤 음식의 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긴 계단 절벽에 얹힌 상원사에서 맞는 아침은 상쾌하다. 지난해 단풍 끝날무렵 등꼬리에 매달았던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감사의 글을 써서 매달았다.
비를 맞은 나무들이 더 청청해 보인다. 아침을 먹기 위해 주문진항으로 달렸다. '실비 생선구이집' 식탁은 빈자리가 없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 여러가지의 생선구이가 별미였다.
다시 해변길을 달렸다. 휴휴암休休庵 부근은 차와 사람으로 뒤엉겼다. 법당妙寂殿보다 찻집과 빵집이 더 분빈다. 절아래 일부가 동부그룹의 땅이라고 철망을 쳐놓아 바닷가 절경이 옥의 티가 되었다. 현수막에 하소연의 글이 담겼다. 신도들이나 관광객의 눈에는 반신반의다. 몸과 마음을 쉬러 온 이들의 정신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절 이름과 의미가 다른 망망암忙忙庵이 되었다.
연휴를 끝내고 돌아가는 차들은 길게 줄을 이었다. 쉴 사이 없이 줄서기에 바쁜 명절이었다.
2017.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