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6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9-37
하느님은 왜 자비로우실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자 하느님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치유하시고 빵 일곱 개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십니다.
여기에 함께 등장하는 예수님의 특성은 자비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능력과 자비가 무슨 관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더는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비롭지 못한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이기 때문입니다.
SBS TV 동물농장, 애니멀봐에서 같은 날 태어난 풍산개 남매가 서로 밥 먹을 때만 싸우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매우 친하지만, 밥만 나오면 유독 오빠 개는 자기 먹을 것은 먹지도 않으면서 동생 개가 밥을 먹지 못하고 뭅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서열정리라고 합니다.
주인이 주는 음식을 통해 오빠는 동생의 서열을 확실히 정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밥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주인은 오빠 때문에 밥을 못 먹는 동생 개에게 몰래 밥을 줍니다.
자비롭습니다.
그러나 밥을 같이 얻어먹어야 하는 개들 사이에서는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먼저 오빠 개에게서 뼈들을 빼앗아 없앱니다.
그리고 동생을 괴롭힐 때마다 자극적인 소리로 주의를 줍니다.
서열 1위는 인간임을 알려주고 본인들은 같은 수준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주인이 밥을 줄 테니 빼앗아먹을 필요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더는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KBS 생생정보통(2013.11.14)에서 유튜브에 보면 퀵보드를 타는 곰이 나옵니다.
아기곰은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합니다.
아기곰은 곰보다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네 발로 걷기보다는 두 발로 걷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사육사는 그에게 퀵보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제작진은 곰돌이 새콤이와 인간 여자 꼬마 아이와
퀵보드 시합을 시켰습니다.
당연히 하루 종일 퀵보드를 타는 새콤이가 이겼습니다.
그러자 꼬마 여자아이는 웁니다.
‘동물에게 지다니.’
아이에겐 곰돌이가 경쟁상대입니다.
그래서 곰돌이에게 자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곰돌이를 이길 수 있는 어른이 탔다면 어땠을까요? 곰돌이에게 지더라도 웃어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곰돌이보다 능력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토바이도 탈 수 있고 자동차도 몰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곰돌이에게 퀵보드 시합에 진다고 해서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영화 ‘300’에 보면 페르시아 장군이 항상 “나는 관대하다!”라고 말합니다.
관대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은 관대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이겨서 나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비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능력이 있다면 자비로울 수밖에 없음도 알게 됩니다.
자신은 관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이 능력자라고 말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당신은 자비롭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그렇다면 동시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정도로 능력이 있지 않으실까요?
그래서 신이 있다면 가장 자비로운 신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자비로우실 수 있다면 동시에 전능하실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능력이 있는 자는 자비롭고, 자비로운 자는 능력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는 자비를 잃었습니다.
서로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기 죄를 씻을 능력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능력이 없는 자는 상대를 이용하여 그 부족한 능력을 채우려 합니다.
그래서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능력과 자비는 동의어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6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9-37
우리의 결핍과 고통은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불러옵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제게 다가오는 아주 작은 변화가 한가지 있습니다.
이웃, 동료, 형제들을 향한 시선의 작은 변화입니다.
전에는 경쟁의 대상이요, 시기 질투의 대상이요, 미움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깊은 바닥 체험도 하면서 형제들을 향한 시선이 이제는 연민의 시선, 안타까움의 시선, 측은지심의 시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앞모습만 바라보지 않고 뒷모습을 예의주시합니다.
모순투성이요 결핍투성이인 그의 모습도 바라보지만 다양한 한계와 부족함 속에 부대끼며 고생하는 가련한 모습도 눈여겨봅니다.
그러다 보니 작은 기적도 체험합니다.
관계 안에서 언제나 티격태격하다 보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는데, 연민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지니게 되니,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그러려니 너그럽게 봐주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연민과 측은지심이 불러오는 기적이 엄청난 것입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끼니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한 백성을 향해 지니셨던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엄청난 빵의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하느님께서 왜 우리 인간을 당신 눈동자처럼 애지중지하시고 잔잔한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시는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쌓아온 선행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 마음에 딱 드는 예쁜 행동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당신 계명에 고분고분 따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우리의 눈물, 우리의 고통...이런 우리 인간의 결핍이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 결과가 결국 구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결핍은 곧 있을 하느님 축복의 한 표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견디고 있는 이 모든 불행 역시 오래 가지 않아 변화될 하느님 위로의 손길이라 저는 믿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최악이라면 머지않아 하느님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의 가장 밑바닥에 서있다면, 올라갈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지금 눈물 흘리고 있다면, 지금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면, 사랑의 하느님께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심이 확실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1주간 수요일 강론>
(2023. 12. 6. 수)(마태 15,29-37)
<예수님>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15,30-3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인데, 앞의 11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 ‘표징’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병든 이들과 굶주리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은, 예수님의 활동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입니다.
병자들과 장애자들의 입장에서는 ‘치유의 은총’을 받은 일이 구원을 받은 일과 같겠지만, 그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멈추지 말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청하기만 하면, 또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치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일부 사이비 종파나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종파에서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또는 신앙은 ‘자동응답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고쳐 줄지 말지는 주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결정하시는 일이고, 우리 쪽에서는 겸손하게 자비를 간청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간절하게 청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ㄴ-10).”
바오로 사도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일으키는 어떤 불치병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주님께 치유를 간청했지만,
주님께서는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주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사도였지만, 주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병을 그대로 두셨습니다.
만일에 바오로 사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건강했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자만심에 빠져서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체험할 수도 있고, ‘병’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꼭 병이 나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병’ 자체가 은총은 아닌데, 투병하는 과정이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체험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32.35-37ㄱ).”
이 이야기에서 ‘군중’은 사흘 동안이나 굶은 사람들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굶게 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라, 배고픔을 겪을 것이 예상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군중이 함께 지낸 사흘 동안에는 먹을 것이 있었는데, 이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에는 먹을 것이 모두 떨어져서 없었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걱정하셨습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한 끼 식사로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일이 아니라, 그들이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주신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 라는 ‘영원한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고,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