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5. 큐티
마태복음 5:38 ~ 48
보복과 원수에 대한 주님의 역설
관찰 :
1) 보복하지 말라
-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보복에 대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너희가 들은 바이지만 그 의미가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는 새 율법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주님이 알려주시고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원래 그 의도가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 40절 ~ 42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대한 율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그 속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보복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액면 그대로 해석할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2) 원수를 사랑하라
-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역시 너희가 들은 바이지만 그 의미가 잘못 해석되고 이해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잘못된 해석과 적용을 내가 교정하고자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할 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너무나 큰 말씀이라서 이것을 그대로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연약한 인생이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함께 비추어주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듯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원리가 되는 것임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 46절 ~ 47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너희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그것은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이고 죄인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세리를 들고 있고, 이방인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세리는 죄인의 대표로, 이방인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이렇게 원수도 사랑하는 이유와 목적은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큰 가르침이고, 머리로도 알기 어렵고, 실천은 거의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것이 진리에 속한 것이고, 우리가 따라야 하는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가르침 :
1) 보복법에 대해서
- 세상적으로 보면 주님의 보복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누구도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러한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 것일까요? 이 계명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서로를 원망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 완전히 망가지고, 피조세계를 다스려야 하는 인간의 위치가 무너져 내렸을 때 주님이 제시하는 솔루션과 닮아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아내를 보고 춤을 추며, 아내가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동격의 존재임을 알았던 아담이 ‘저 여자 때문’이라고 말하는 순간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남편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가르침을 거부하고 그 열매를 먹은 하와는 그 원인을 뱀에게로 돌리며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존재에 의해 다스림을 당하는 질서의 뭉개짐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끝짱 난 것 같은 그 때 주님은 솔루션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곧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목숨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역사상 수많은 부부가 있었겠지만 이 원리를 제대로 순종한 커플이 얼마나 될까싶을 정도로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가정이 회복되는 유일한 원리라고 제시하신 것입니다. 동일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주고 피해주는 그러한 상황이 이어지는 상황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는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꾸로 나를 희생하고 채워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신부가 장발장을 용서해 주고 은그릇을 더 챙겨주었던 그의 사랑이 결국 오랜 시간 장발장을 성숙시키고 키워내게 된 것으로 설명한 것이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이 성취되는 것에 대한 부족한 가능성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복수할 수 있지만 보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자를 돕는 방식이 사랑에 기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복수의 연결고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적용의 부분입니다.
2) 원수사랑에 대해서
- 원수를 사랑하는 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단 죄인의 몸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로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결국은 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 역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자들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산 속에 들어가 10년 20년을 수련해야 도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깨닫고, 누리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닮아가서 하나님처럼 되어서 원수를 사랑하는 지경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방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그렇게 변모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아주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원수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고, 그 모든 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하며, 하나님의 궁극적으로 이루실 섭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의 관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가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임마누엘 되신 주님이 또한 임마누엘 되시는 성령님으로 가능하게 하시는 영역입니다.
- 그렇다고 나의 책임이나 역할이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할이시지만,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나의 중심입니다. 그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성취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 주님은 정말 이 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진리를 우리에게 너무나 담담히 그것도 산에 모인 나라 잃고 원수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사는 불쌍한 무리들에게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정치세력, 종교세력들에게 그렇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소망이 없던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적용 :
1) 나에게 손해를 끼쳤던 이, 지금 나를 억울하게 하는 이가 있습니다. 마음속에서부터 보복하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게 하는 이가 있습니다. 복수는 결국 복수를 낳는 것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 주장하며 그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탄의 오래 묶은 전략이고 결코 하나님의 솔루션이 될 수 없는 거짓입니다. 용서가 아니라 대적하지 않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아시는 주님이 평가하시고 판단할 것이기에 나는 나의 판결을 내려놓고 대적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겨야 합니다. 이것도 요한계시록에 이기는 자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판단을 정지하고 똑같이 반응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미련한 길이 아니라 가장 지혜로운 길입니다.
2) 원수를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천로역정입니다. 주님은 쉽지 않은 길을 제시하시지만 진리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이 외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길을 가지 못하기에 기독교가 욕을 먹습니다. 나도 욕을 먹습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길게, 멀리 보는 것입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주님을 따르며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하는 자가 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위해 중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내게도 그런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오늘도 말씀으로 독려하십니다. 결국 주님이 보시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잘 했냐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지를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변화되고 주님을 닮아가길 소원 또 소원합니다.
3)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용서를 싸구려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제 중심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구드립니다.
4) 사랑하는 아내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절함으로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