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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 8-9
여호와 하나님이
정상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든지 귀로 듣기만 해도 은혜가 됩니다. 2:1-3절을 차근차근히 읽고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친히 모본을 보이신 안식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리고 오늘날 주의 날 지킴이 어떤 성격의 일인지도 생각해 보십시요. 그것은,
①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일이 될 것이요.
② 하나님을 구속자로 믿는 일이 될 것입니다.
③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4-7절을 읽고 창조의 대략만을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과 같이 전지 전능하시고, 온전하시며 성실하게 역사 하시는 분이 없으시다고 믿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드신 피조 세계에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충만히 채우십니다. 성경에서 땅, 빛, 물 등은 생명의 영역을 상징합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만이 생명내림의 시작이 되십니다. 그 생명의 내림 방식이 사람에게 필수적입니다. 때문에 땅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사람 또한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에덴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1. 본문 8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입니다.
1) 모세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생활 조건과 규칙을 덧붙입니다.
먼저 모세께서는 인간이 이 세상의 어느 곳에 놓여졌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할당된 곳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거처였는지를 말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반 사람들의 역량에 맞추기 위해 간단하고 무무한 형식으로 동산을 창설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위엄은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에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무튼 그분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온갖 즐거움과 풍성한 실과와 그밖에 뛰어난 다른 선물로 장식된 곳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곳이 동산으로 불립니다. 또한 주위의 우아함과 그 형태의 아름다움도 그곳이 동산이라고 불린 이유에 속했습니다. 고대 주석가 한 사람은 이 단어를 낙원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아주 잘 가꾸어진 정원을 (파라다심)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또한 크세노폰은 왕들의 웅장하고 호화로운 정원을 언급할 때, 바사 사람들이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주신 지역은 전 세계에서 엄선된 곳이었습니다.
2) “에덴에” 라는 말씀을 제롬이 ‘태초에’ 라고 번역한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곧이어서 가인이 에덴 남부 지역에서 살았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분명한 것은 모세가 동산을 동방에 있는 낙원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모세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대인과 연관해서 설명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에게 할당된 어떤 지역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이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가 이 동산을 세계 전 지역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땅이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지 않았다면 모든 곳이 태초에 복을 받은 그대로 풍요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가장 평화로운 현장으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관망하는 타락한 이 세상과 비교해 볼 때 낙원과 같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여기에서 그 지역의 위치를 상세히 말하는데도 이것을 모호하게 전 세계에 확대시킵니다. 지금 가리킨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 중에 아담을 장자의 영예로써 존귀하게 하셨고 특별한 은총의 표시로 그에게 가장 기름지고 안락한 곳을 주시고 땅의 첫 열매를 선물로 택하셨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동산이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곳이 이 세상의 한 지역이 아니라면 유대 반대편인 동쪽이라고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리게네스는 물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사람들의 우화적인 해석을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사단은 성경의 가르침을 모호하게 하며 확실성과 근거가 결여된 것이라고 인식시키기 위해 가장 교활한 방법으로 이러한 해석을 교회 안으로 침투시키려 노력해 왔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묘사한 그런 곳을 이 세상에서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우화적인 표현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이 어리석게도 이 우화적인 해석에 너무나 도취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묘한 주장을 본문에 관련시켜 보면, 단지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을 벗어나려고 할 뿐이지 헛되고 무가치하며 전혀 타당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인간이 땅을 다스리고 땅으로부터 실과를 거두며 살도록 하나님께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결국에는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해 이 세상이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의도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해 놀라우신 자비를 증거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증거인 땅을 떠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것을 하늘의 복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능숙한 해석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영원한 기업이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하늘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이 땅에 발을 딛고서 하나님이 당분간 사용하라고 하신 거처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땅 위에서 생활함으로써 하늘의 영광을 묵상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아담에게 풍성히 베풀어주심으로써 그것을 누리는 중에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을 깨닫게 하셨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인간이 그 이후에 땅을 경작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며 과일들을 먹도록 허락 받았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달의 주변에도 하늘의 어떤 영역에도 적용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의 위치가 해뜨는 곳과 유대 사이라고 말하지만 이 지역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한 것이 요구됩니다. 이곳이 메소보다미아 근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기들의 견해를 굽히지 않습니다. 에덴의 아들들이 디그리스강에 인접해 살았다는 것이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설명이 뒤따르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고대 주석가는 에덴이라는 고유 명사를 ‘쾌락’ 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잘못을 범했습니다. 히브리어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는 즐거운, 기쁨,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그곳이 기쁨으로 인해 그처럼 불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름은 다른곳과 구별하기 위해 그곳에 붙여졌다고 추리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2. 본문 9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입니다.
1) 여기에 언급된 산물들은 창조 셋째 날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곳이 온갖 종류의 실과를 맺는 나무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풍성하고 기쁨이 넘치는 곳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말입니다.이러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졌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탐욕으로 인해 그처럼 놀라운 풍요와 행복과 다양성에도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경우,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조금도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도 모세를 통해 아담의 무한한 행복을 의도적으로 묘사하시는데, 이는 인간의 저속한 방종을 보다 분명히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그처럼 풍부하고 넘칠 정도의 산물도 인간의 유치한 방종을 억제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금단의 과일을 따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그처럼 행복하고 바람직한 상태에서 편히 안식할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히 수치스러운 배은망덕의 소치였습니다. 실제로 그와 같이 풍요한 곳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야수적인 탐욕보다 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곳을 가든지 황폐한 땅이 없었습니다. 비옥하고 풍요가 넘치지 않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다른 곳에서는 비교적 온건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만은 놀라울 정도로 차고 넘쳤습니다. 그곳은 음식이 충분히 공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입에도 맞고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다운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자비로운 은혜를 통해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2) “생명나무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여기에서 모세가 두 그루의 나무를 가리키는지, 두 종류의 나무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견해가 모두 가능성은 있지만 논쟁할 가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이 강조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그리고 우리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각 나무의 특성을 나타내는 수식어인데, 그것은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생명나무라는 이름을 부여했는데, 그것은 이전에 인간이 받은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생명을 상징하고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외적인 상징을 통해 은혜를 증거 하시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외적인 표적으로 전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도움이 없으면 그 분을 향해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표징으로 우리에게 손을 뻗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나무의 열매를 맛볼 때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단순히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결국 그 나무에는 ‘하나님 안에 우리가 존재하여 살고 있으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의 선언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순전하고 정직했던 아담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알 수 있는 교훈적인 표징이 필요했다면, 참된 빛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들은 본성이 아주 어리석어졌으니 그러한 경고의 표징이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유케리우스 같은 교부들이 전해 준 것에 불만이 없습니다. 그들은 생명나무가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보다 생명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 선포되어 있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만물의 생명이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특히 인간의 생명은 이성과 지성에 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이러한 표적으로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에 의존하고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생명을 찾지 않도록 권고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안전히 생명을 소유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예치된 것으로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달리 보유할 수 없다면 생명을 잃은 후에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어떤 작가들이 여기에 사용된 표현의 의미를 육체적인 생명에 제한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소생시키는 힘이 그 나무 안에 있었으며 그것은 전세기에 걸쳐 전혀 약해지지 않는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생명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성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이 무슨 목적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에게 어떤 생활법칙이 제시되었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활기에 넘치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재능도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판단력이나 선택력이 없는 양처럼 방황하게 하시려고 금지시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에게 지나친 지혜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지각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선과 악을 중재하고 판단하는 존재로 자처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는 사악한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판단력은 덕과 악의 차이를 분별하는 힘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모세가 언급하는 것은 달리 입증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 주요한 선이신 그분의 지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력이 없는 무분별한 욕망에 의해 이끌려 갈 때 순전무구한 상태로 회복된다고 가정하는 방탕한 사람들이야말로 완전히 미치광이이자 괴물 같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곧 아담이 한두 가지 일을 시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리분별력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만 매달림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인간이 지혜롭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지식은 멸시적이고 나쁜 뜻으로 간주됩니다. 인간은 완전한 지혜의 유일한 근원을 떠났을 때 스스로 그와 같이 비참한 체험을 겪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 의지의 기원으로서 아담은 그토록 독립하기를 원했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