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우리 집 옆에 너른 밭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아주 조금씩 나누어 채소밭을 가꾼다.
그런데 밭마다 제각기 누가 따먹을세라 모두가 망을 쳐버렸다.
나는 오랫동안 여기 살아 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이렇게 서로 심하게 살벌한 경계를 둔 적이 없었다.
요사이는 인류 전체가, 아니 창조계 전체가 혼란스럽다.
기후 변화니, 바이러스니, 경제 시스템의 붕괴니 전쟁이니 하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왜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 동식물, 자연과의 경계가 강화되었는지!
이런 현상은 사회곳곳에 만연해 있다.
우리나라만해도 적어도 대다수가 최소한의 의식주는 해결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진보와 보수, 빈부, 이웃과 이웃 사이, 심지어 가장 건강해야하는 교육계에도 교사와 학생, 학부모사이에 불신과 경쟁만 만연하다.
왜 그럴까? 어쩌려고 이럴까?
나는 어쩌면 우리가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도의 신화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무한한 의식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자”해서
자신을 스스로 분리하는 물질의 세상, 즉 우주를 창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성경에는 재미있는 창조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성경의 창조이야기를 인도철학에 비추어 나만의 해석으로 풀어본다.
엉터리라 하더라도 용서하시라
이런 식의 개똥철학은 나의 취미생활이니까
맨 처음의 창조는 지고의식이 아직 분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I AM의 느낌, 마하트)이다.
나는 하느님(지고의식)이 호흡을 불어넣어준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이 알몸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에덴의 상태가 마하트의 상태, 현존(Being)의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절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라는 분별의 나무를 따먹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자신과 대상을 분리시키는 에고(Doer I, 행위하는 나, 아함)가 발생한다.
개체라는 에고로서의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수치심, 즉 죄성을 갖게 되고 자신의 몸을 숨긴다. (Done I, 경험하는 나, 찌타)
그리고 더군다나 자신의 잘못된 책임을 이브라는 대상에게 씌운다.
또 이브는 자신의 잘못을 뱀 탓으로 돌린다. 아마 뱀은 분별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이곳에서부터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또 다른 자신인 분리된 상대를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를 하나됨(ONENESS)의 에덴에서 추방하고
그 벌로 아담에게는 죽도록 땀을 흘러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존의 고통,
이브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번식하려는 출산의 고통을 내린다.
더구나 자신이 본래 누구였나를 망각하게 하기 위해
에덴에 장막을 쳐버린다.
모든 만물이 하나였던 낙원,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생존과 출산의 고통으로 개체로서의 에고는 강화된다.
그 후, 인류는 수겁의 누적된 고통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더욱 에고가 강해지고
본래 자신이 누구였던가는 완전히 잊게 된다.
분리의 마음은 두려움을 낳고
에고는 두려움이라는 먹이를 먹고 더욱 강화가 된다.
어쩌면 지금 시대가 인류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막바지의 시대일까?
한편 극심한 고통은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자각, 바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게 되는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누군인가를 알게 되면 두려움을 놓게 되고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바로 바로 사랑이다.
사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떨쳐버릴 때 사랑은 나타난다.
사랑은 생명이자 존재 자체, 즉 본래 자신인 I AM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사랑‘인 것이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