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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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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자유소통광장 스크랩 4. 고조선의 패수는 하북성 보정시 지역을 흐르는 당하이다
사람이 하늘이다 추천 0 조회 247 16.08.15 10:21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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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8.15 11:13

    첫댓글 의문점이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님께서 올린 지도를 보면... 고조선 유물로 알려진 세칭 비파형동검, 고인돌의 분포지를 벗어난 곳에... 왕검성이 있습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해서 올리는 질문입니다.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 작성자 16.08.15 11:16

    반갑습니다. 비파형 동검은 하북성 보정시 당현일대에서 발굴된 적이 있으며, 고인돌이 산동성지역에서 발견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비파형 동검이나 고인돌이 하북성이나 산동성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수량이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비하여 적을 뿐입니다. 고조선은 지역이 넓어 진한 마한 변한의 삼조선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제가 연구한 바로는 진조선(진한)은 하북성지역이고, 마조선(마한)은 한반도와 만주일대이며, 번조선(변한)은 산동성과 강소성 절강성 등의 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 작성자 16.08.15 11:22

    @사람이 하늘이다 삼조선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하였으며, 그 생활 풍습에도 많이 차이가 있었으므로 마조선(마한)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고인돌이 삼조선 전체의 공통적인 묘제라고 판단할 근거는 없습니다. 차라리 삼조선의 강역을 비정하려면 삼조선에 널리 유통되었을 명도전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 16.08.15 16:42

    @사람이 하늘이다 역시 제 예상과 다르지 않군요?

    하북성 일대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견된 적이 있지요?... 하지만 한반도와 만주지역만큼 많은 양이 아니지요... 이는 보정시가 변방일지언정 핵심은 아니라는 반증이 되고요.

    마찬가지로 산동성이나 하북성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지만... 제 고향인 전남 고흥보다도 적은 숫자로 남아 있겠지요?

    이 역시 보정시를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으로 판단하는데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아니라면....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의 유물, 유적이 아니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 16.08.15 16:42

    @사람이 하늘이다 '고인돌이 삼조선 공통의 묘제라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일한 묘제가 발견되면... 이를 단일국가(엄밀히 말해서 단일세력권)로 판단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 아닐까요?

  • 작성자 16.08.15 16:57

    @金子 마조선(마한)지역은 한반도와 만주일대로 고대로부터 계속 한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진조선(진한) 지역인 하북성과 번조선(변한) 지역이었던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은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기자조선이 들어서고, 기원전 2세기 경에는 위만조선이 들어서는 등 한족과의 교류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하북성 지역에서 비파형동검이나 고인돌이 한반도나 만주보다 적게 나타난다고 하여 그곳이 변방이었다고 볼 근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 16.08.15 20:17

    @사람이 하늘이다 저는 만주부터 제주도까지 분포하는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이후부터는 제가 작명한 당랑동검으로 부르겠습니다.) 이 고루 분포한 이유를...

    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통신과 교통이 원활하지 않던 선사시대(?)... 그 사람들은 어떤 헤게모니를 공유했기에 고인돌과 당랑동검을 유물로 남겼을까요?

  • 작성자 16.08.15 20:36

    @金子 "만주부터 제주도까지 비파형동검이 고루 분포했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님이 생각하는게 있다면 먼저 이야기 하고 남의 의견을 묻는 것이 순서 아닐까요?

  • 16.08.16 09:00

    만주부터 제주도까지 당랑동검과 고인돌이 널리 분포된 것은 사실이고요.

    교통과 통신이 원활하지 않던 시기에... 그토록 넓은 지역에 동일한 유물, 유적이 분포했다함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겁니다

    그걸 님들은 행정, 군사력에의한 지배로 이해하시는데... 저는 신앙의 결과로 봅니다.

    국경과 관계 없이... 생민들의 믿음의 결과가 동일한 유물을 남겼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왕검성이 보정시에 있었건, 강화도에 있었건 제게는 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상으로 제 생각을 밝혔을 뿐이니 큰 의미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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