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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1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야고보 4,1-10 마르코 9,30-37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 안에서 말씀은 죽는다
알베르 카뮈의 희곡 중 「오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중부 유럽의 외딴 들판에 한 모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그만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그 집에는 원래 ‘쟌’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가출하여 지금은 두 모녀만 살고 있습니다.
두 모녀는 가난과 고독에 지친 나머지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여인숙에 투숙하는 손님 중에서 특별히 돈 있어 보이고 혼자 투숙하는 남자 손님에게만
마취약을 먹인 후 목 졸라 죽이고 소지품을 뒤져서 돈과 보석을 빼낸 다음에는 강물에 빠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고독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서했지만 점점 이것이 상습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장한 젊은이가 투숙했습니다.
돈도 있어 보이고 성공한 남자처럼 보였습니다.
두 모녀는 그 젊은이를 그 날 밤 마취약을 먹인 후 죽이고, 그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다 떨어진 신분증과 사진을 보니, 바로 28년 전에 가출했던 바로 ‘쟌’이었습니다.
‘쟌’인 것을 확인한 순간 모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실신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모녀는 ‘쟌’을 죽여 갖다 버린 그 강물에 뛰어 들어 자살을 합니다.
이웃을 죽여 자신의 배를 채우다가는 결국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구원자도 죽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또한 말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은 이웃을 죽여야만 하기 때문에 말씀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생명체든 남을 죽이지 않고 자기 생명을 연명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자고 이웃을 죽이다보면 결국 예수님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온 전체를 죽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 중, 특별히 육체에 해당하는 욕구, 혹은 육체의 주인인 ‘자아’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또 자아나 육체의 욕구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욕구가 생존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 하느님의 뜻과 맞서게 됩니다.
그러면 말씀이 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러 가시는 중인데 그분의 제자들은 누가 높은지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곧이듣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괜히 물어보았다가 정말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이 작은이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말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우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려면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으려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이 이해 될 리가 없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릴 것이고 심지어 자기 생각에 맞추어 가르침을 왜곡합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 말씀을 주님으로 모시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죽이십시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웃을 받아들이는 만큼 말씀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서학자들보다 마더 데레사가
성경말씀을 더 잘 이해하신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임과 이웃사랑은 하나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1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9,30-37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실제로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마르 9,31)
당신 입으로 직접 수난과 죽음을 예고를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예견되는 끔찍한 상황이 눈앞에 떠올라 마음이 엄청 산란하셨을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두려우셨습니다.
이런 스승님의 마음과는 달리 제자단의 반응은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그간 자신들이 꿈꿔왔고 상상해왔던 길이 아니었기에 때문에 일부러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고 있는 왕국과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이고있는 극단적 미성숙과 스승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몰이해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카파르나움에 위치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을 하였느냐?”
앞서 걸으시던 예수님께서 뒤따라오던 제자단의 분위기를 눈치채셨던 것입니다.
계속 티격태격하며 뒤따라오던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 당신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길에서 한바탕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노상에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교회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봉사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입니다.
매일 교회 안에 머물면서, 매일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마음과 정성이 없기에, 그저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있기에 가장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돌아봐야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스승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허깨비같은 몸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을 전혀 따라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제자, 무늬만 제자였던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진 예수님이신데, 그래서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승님이 걸어가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 함께 진지하고 숙고하고 고민할 법도 한데,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제자라면 스승님이 겪고 계신 고뇌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기 위해 노력할텐데,
그래서 스승님을 따뜻한 말로라도 위로해드리고자 노력할텐데,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누가 큰 사람인가?
스승님의 나라가 서면 누가 오른쪽 왼쪽에 앉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절대로 굽힐 수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과 사명, 핵심 사상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화요일 강론>
(2024. 5. 21. 화)(마르 9,30-37)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3-37)”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시는데(마르 9,30-32), 제자들은 그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시에 제자들의 주 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마르 10,37), 그들은 그냥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 또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욕이 더 커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보통 사람들’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특별한 사람들’로 변화되지만, 예수님 수난 전에는 그런 문제로 자주 다투고 논쟁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라는 말은, 사도들도 자기들의 논쟁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명예욕과 자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스스로 낮추라는 예수님 말씀은 높아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도 아니고, 높임을 받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다음 말씀이 더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하느님 나라는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나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나라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똑같은 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에는 “하늘나라에는 높은 자리도 없고, 높은 사람도 없다.
그 나라에는 사람들 사이에 서열 같은 것이 없다. 그러니 그런 문제로 다투지 마라.” 라는 뜻도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끼리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하고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3) ‘꼴찌, 종, 어린이’ 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을 알아야만 낮춤과 겸손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 단어의 뜻을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것이 싫어서 실천을 안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아예 모른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런 지식으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생활입니다(마태 7,21).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을 알아야만 할 정도로 주님의 가르침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4) 뒤의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낮춤’과 ‘섬김’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입니다.
<세속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직책의 높고 낮은 차이가 있고, 누군가는 높은 직책을 맡아야 합니다.
그러나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월감을 가져도 안 되고, 교만해져도 안 됩니다.
<만일에 직책을 내세우면서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린다면, 그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낮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거나 비굴해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원하는 직책을 얻지 못하거나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일이 생기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해도 속으로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은, 실제로는 참 많이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자존심 하나만 제대로 다스려도 성덕을 쌓는 일에 큰 진보를 이룰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