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참 마음’
‘선(禪)’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눈을 통해 본다고 하지만 마음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주장자 들어 보이며) 이것은 물질입니다.
그러나 마음 없이 볼 수 없으니 이것(주장자 들어 보이며) 또한 마음입니다.
이 한마디에 알아들었다면 선의 정수를 보았다 하겠습니다.
주장자와 마음을 나눠 놓고 분별하며 보려 하는 사람은 영겁이 지나도 ‘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주장자를 보이는 사람과 보는 사람,
주장자와 보는 사람의 마음이 따로 있는 한 선은 저 허공에 있을 뿐입니다.
생로병사 거스를 수 없어
나타나는 세계와 그 세계를 보는 주체가 둘이 아닌 자리,
바로 그 자리를 일컬어 우리는 선이라 하고 불법이라 합니다.
여기서 불(佛)은 마음이고 법(法)은 물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오랜 무명으로 인해 지수화풍의 四大로 구성된 이것을 두고 ‘참 나’라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중히 여기는 이 몸뚱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임산부가 사내아이를 얻고는 경사 났다고 해 이름도 ‘경자’라 했습니다.
부모님의 정성으로 곱게 잘 자라던 ‘경자’가 생후 18개월째 되는 달부터 감기에 걸리며 설사하더니
시름시름 앓고 말았습니다. 큰 병원서 진찰해 보니 암이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시련이 갑자기 그 가족에 닥친 것입니다.
또 얼마 전 TV를 통해 맹인(盲人)이 교사 자격증을 얻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분의 인생담(人生談)을 들어보니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여고 시절 가벼운 안질환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며 심하게 돼 대학 시절에는 실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후 결혼도 했지만 결국 맹인(盲人)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그분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공부를 해 교사 자격증까지 땄습니다만
본인이 시력을 잃을 줄 꿈엔들 생각해 보았겠습니까?
또 제가 아는 분 중 한 사람은 좋은 직장을 잘 다니다가 외국 출장길에서 큰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발가락이 썩어 가더니 발목이 썩고 급기야 무릎까지 썩어 다리를 자르고 말았습니다.
누구든 육신의 병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결국 이 육신은 고(苦) 덩어리입니다.
병만 안 들면 고가 아닐까요?
이 육신 하나 잘 먹이고 잘 입혀 편하게 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하고 삽니다.
고(苦) 덩어리인 육신을 위해 더 큰 고(苦)를 겪으며 사는 게 우리 인생이란 말입니다.
이 육신 아무리 편하게 잘 보존해도 결국 죽으면 재 한 줌 외에 남길 것이 없습니다.
이런 육신을 두고 우리는 ‘참 나’라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참 나’는 유무를 떠난 ‘나’입니다.
삶과 죽음, 여자와 남자라는 구분을 초월해 있는 자리입니다.
만상의 근본이요, 만유의 본체가 바로 이 ‘참 나’ 자리입니다.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상을 두고 우리는 ‘나’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착각을 한 순간에 바로 깨는 것이 선(禪)입니다.
자신의 생사에 매이지 않은 진면목(眞面目)을 깨닫는 것이 선입니다. 그러나 그 선은 세간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온갖 것이 본디 나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 만물은 ‘본래 나’에서 이뤄진 것들입니다.
본래 자리를 볼 수 있는 창을 잠시 열어 보이겠습니다.
만물은 마음에서 발현
마조 스님의 제자인 대주 혜해(大珠 慧海)가 쓴 『돈오입도요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주 스님은 다른 선사들과는 달리 자신의 깨달은 바를 직접 저술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깨닫는 방편에 관한 한은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선사는
“오직 돈오(頓悟)만이 생사 해탈을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돈오입니까?”
“일체 망념을 단박에 깨는 것이다. 돈오란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돈오(頓悟)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닦아가야 합니까?”
“근본을 닦아가야 한다.”
대주 스님이 말씀하신 ‘근본’은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모든 게 갖춰져 있습니다.
세계라 하면 어떤 세계가 있습니까? 지하 세계, 수중세계, 동·식물 세계, 나아가 우주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 세계는 참으로 신비한 세계입니다. 왜 신비한 것일까요? 우리 마음이 신비하기 때문입니다.
백천만 억 세계는 중생의 마음이 발현돼 나타난 것입니다.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이 있는데
이런 능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겠습니까?
모두 마음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요달(了達) 하면 자타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깨어납니다.
세상의 모든 게 마음 작용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만법의 왕입니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 한 송이 들어 보인 것이나,
달마 스님이 면벽 9년을 하신 뜻은 바로 이 마음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중국 홍주(洪州) 마조(馬祖) 스님에게 두 아들을 보내 고승을 만든 황 거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마조 스님 문하에서 열심히 정진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님 은혜로 이생에서 억겁(億劫)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했다.”라며
환희에 차 아버님을 뵈려 서천 고향을 찾았습니다.
광채가 나는 두 아들을 본- 황 거사는 “부처님 잘 오셨습니다”라며 합장하며 말했습니다.
“나 대신 성취했으니 장합니다. 두 부처님께 부탁할 게 있습니다.
나를 키워준 분은 부모지만 나를 완성 시켜 주는 분은 벗이라 했습니다.”
완성이란 내 면목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나이가 많은 아버지이지만 자신이 도를 이룰 수 있도록 두 아들이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홍주에 주석하고 있던 마조 스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두 아들은 마조 스님에게 사정을 전했고 이에 마조 스님은 법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황 거사가 법당 법석에 앉은 마조 스님에게 예를 올리자 마조 스님이 물었습니다.
“먼 길서 오셨습니다. 지금 서천에 있습니까? 홍주에 있습니까?”
마조 스님은 황 거사의 몸뚱이가 어디 있는지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선문답을 듣는 그놈, 그 자리를 물은 것입니다.
두 아들을 마조 스님에게 보낸 것만 보아도 황 거사의 근기는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조 스님의 선문답에 황 거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집안에 두 가장이 없고,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없습니다.”
보통 선기(禪機)가 아님을 간파한 마조 스님이 한 번 더 묻습니다.
“올해 나이가 몇입니까?”
“여든다섯입니다.”
“이리저리 계산하는 나이는 몇 살입니까?”
바로 그 말에 85세의 황 거사는 깨달았습니다. 선 법문에는 큰 공덕이 있습니다.
황 거사처럼 당장 확철대오 못해도 선 법문 듣는 그 근기만으로도 다음 생에서의 깨달음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선 법문에 관심 없는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 스님의 일성이 무엇입니까?
"보리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이 마음만 쓰면 곧 성불하리라. (菩提自性 本來淸淨 但用此心 直了成佛)"입니다.
우주를 흔들고 만고에 빛날 사자후(獅子吼)입니다.
청정함이란 무엇입니까? 선악시비취사(善惡是非取捨)가 없는 마음. 구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얼마나 많은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려 합니까?
다겁생(多劫生)을 버리지 못한 그 업습(業習)을 버리지 못한데 기인합니다.
선악(善惡)의 마음을 보살의 마음으로 바꿔가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생긴 지혜 광명으로 그 업을 녹여야만 합니다.
부처님 보듯 타인 공경해야
『화엄경』은 깨달음 바를 서술해 놓은 경전입니다. 그 경전에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부처님은 누구입니까? 봉은사 법당에 모셔진 이 부처님만을 이릅니까?
아닙니다. 중생은 물론 세상 만물이 다 불성을 가진 부처님입니다. 예배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 청정한 마음이 자리한 그곳이 극락이요 정토입니다.
그 마음을 전하려 부처님은 물론 옛 선사와 조사가 그토록 많은 방편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 아니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 현산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