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때 |
1869(고종 6) |
태어난 곳 |
충남 천안 |
죽은 때 |
1940. 3. 13. |
호 |
석오(石吾) |
본관 |
연안(延安) |
1869(고종 6) 충남 천안~ 1940. 3. 13.
개요
대한제국기에 민권운동·자강운동에 앞장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시정부 지원의 우익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본관은 연안(延安). 이명은 이량(李亮).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
민권·개화 운동
아버지는 영해군수 병옥(炳鋈)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이다. 어려서 향리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10세 때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사는 할아버지 이석구(李錫九) 문하에서 수학했다. 1885년 상경하여 서울 봉익동(鳳翼洞)에 거처를 정했고, 곧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영해읍으로 갔다. 1892년 응제진사시에 합격했다. 1893년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해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개화민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국가의 비정(秕政)을 규탄, 성토하며 이권침탈에 반대하고 자체개발을 강조했다. 다음해 독립협회 회원들이 다수 가담하면서 각계각층을 포섭하여 민권민생투쟁을 전개했던 만민공동회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부국강병을 위한 각종 상소문을 제작, 주달(奏達)하다가 이승만(李承晩) 등과 옥고를 치렀다. 이승만과는 이때 이후 친숙한 동지가 되었다. 1898년 이종일(李鍾一)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이종일의 권유로 〈제국신문〉의 비상임논객으로 〈민족자강(民族自强)의 방도(方途)〉·〈위국(爲國)의 방도〉 등 수십 편의 논설을 기고했다.
신민회의 창설과 운영
1903년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등과 손잡고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운동을 전개했다. 상동교회에 하와이에 거주하는 강천명(姜天命)이 보낸 5원을 기초로 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청년을 육성했으며,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총무로서 직접 운영했다. 당시 상동교회·연동교회·묘동교회·숭동교회 등은 모두 양반교회인 동시에 외국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자립교회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방적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손잡고 결사대를 조직한 뒤 매국노의 응징과 일제의 철수를 주장하는 한편, 그들의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다음해 북간도 용정(龍井)에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 등과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 교포교육에 전념했다. 1907년 이상설이 이회영(李會榮)의 건의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특사로 파견되어 가자 그도 여준(呂準) 등에게 이 학교를 맡기고 귀국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이회영·이동휘·이갑·안창호·전덕기·김구·이종일 등 20여 명과 서울에서 비밀항일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신민회가 결성되기 1년 전에 이회영·이동녕 등은 "지금 국내에서 일고 있는 각종 항일투쟁을 볼 때 곧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니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서 보다 원대한 계획하에 장기적으로 독립운동를 꾀해야 승산이 있겠다"고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을 통한 무장독립전쟁론을 폈고, 이에 호응 참여하는 인사가 많았다. 그는 총서기로서 신민회의 실질적인 운영과 정책의 수립과 방략을 실시하는 일을 맡았다.
동삼성에서의 항일투쟁
1910년 식민지가 되자 원산에 계신 부모님께 하직서를 띄우고 가산을 정리, 그해 겨울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했다. 동지들과 교민의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이는 뒤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를 토대로 독립군 양성에 힘쓰면서 뒷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성장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신흥강습소는 그곳 토착민의 냉대로 곤경을 겪었으나 이회영이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교섭하여 빈 창고를 빌려 개설할 수 있었다. 그는 신흥강습소장으로 군사교관에다 사환까지 겸하면서 유능한 청년을 육성하여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3,500명의 인재를 육성, 실전에 배출했다. 경학사 이후 부민단(扶民團)·권업단(勸業團)을 잇달아 조직하고, 1915년 이상설 등과 같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 최초의 민주정부를 조직했다. 한편 〈대동신문 大東新聞〉·〈해조신문 海潮新聞〉을 발행했으며 대종교도가 되었다. 1918년말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한 39명 중의 한 사람이다.
[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방면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국내에서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즉시 비교적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하이[上海]로 갔다. 신규식이 마련한 상하이 프랑스조계 애인리(愛仁里) 숙소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3·1혁명 이후에 우리가 할 일은 세계혁명 이후에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임시정부의 수립이다. 이 일이 선행되어야 빼앗긴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직접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조계 내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국립임시사무소를 설치·운영했다. 정부를 수립함에 앞서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을 설립해 4월 10~11일 김신부로(金神父路)의 회의실에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이시영·조소앙 등과 서로 연구 검토해서 제정하고, 4월 13일 이를 내외에 선포했다.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체제의 순수 민간정부로 수립되었고 국무원·의정원·사법부로 3권을 분립했다. 이동녕은 국무총리에 취임해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당시 국내외는 상해임시정부 외에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가 있었고, 기호의 대한민간정부, 평양의 신한민국정부·조선민국임시정부 등이 설립될 단계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임시정부는 하나만 있어야 되겠다고 보고 5개월에 걸쳐 상해·노령·한성의 임시정부대표와 타협 끝에 제1차 개헌을 통하여 단일통합정부를 구성한 후 내무총장으로 단일통합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을 전담했다.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부재하거나 알력으로 국무가 원만히 처리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국정을 주관하다시피 했다. 이어 대통령직무를 대행했으며 국무령, 국무위원회의 주석 등으로 임정의 위기를 구했으며, 내정교통과 임정의 광복정책을 집행해나갔다. 전후 임시의정원 의장을 3번 역임했고, 행정부의 수반 등 요직을 두루 거쳐 국정을 처리해나갔다. 4차의 개헌을 주도한 그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이념하에 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김구 등과 조직, 이사장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투탄의거도 김구와 상의, 결행했다. 1935년 한국국민당 당수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성했다. 1940년 3월 13일 치장[綦江]에서 죽었다.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효창원(孝昌園)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