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닫은 금광이 더위 쫓는 종유동굴로 변신
'진경산수' 정선 여행
가목리에는 장독 3500개가 도열한 된장 공장이
철도 없이 여름이다. 자연(自然)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인간이 퍼다 먹은 자원으로 인해 봄이 사라져버렸으니, 모든 게 내 탓이다. 아이들이야 물놀이철이 길어져 좋겠지만 섭씨 30도를 웃도는 5월이 어디 봄인가. 그래서 마련했다. 이 열 받는 계절을 피할 수 있는 ‘섭씨 8도’의 공간! 강원도 정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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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동굴 도깨비
강원도 정선은 진경산수의 땅이다. 송림과 활엽수림, 그리고 유장하게 흐르는 오대천이 어우러져 속 깊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땅 어디라고 그런 미학이 없는 곳 없겠지만, 정선은특히 그러하다. 적당한 산과 적당한 물, 그리고 마을과 숲이 방문객의 시심(詩心)과 한가로움을 자극한다.
식민 시대에 그 정선 땅에 금광이 문을 열었다. 이 천포광산(泉浦鑛山)은 1922년에 금이 발견된 이래 해마다 30킬로그램의 금을 생산하고 1945년 폐광됐다. 쓸쓸하게 동네 뒷산의 폐광으로 남아 있던 광산은 1980년대에 그 뒤쪽으로 종유동이 발견되면서 대박이 났다. 금보다 더 한 대박이었다. 관광객들이 몰려든 것이다. 국내에 종유동굴이 여럿 있지만 화암동굴처럼 폐광이라는 인간사(人間史)와 지질학적인 자연사(自然史)가 어우러진 동굴은 여기가 유일하다. 자, 그러니 이 미치광이 계절에, 진경산수의 땅에, 사계절 섭씨 10도 안팎의 지하 천국이 기다리고 있으니 놀러가지 않고 뭣들 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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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폭포 백석폭포.
수도권에서 간다면 영동고속도로 진부IC에서 나오면 여정이 좋다. 좋다 함은 풍경을 즐기는 드라이브코스가 좋다는 말이다. 6번국도와 59번국도로 바꿔가며 정선방향으로 가게 되면 오대천이 흐르는 수항계곡을 따라 차를 몰게 된다. 여기가 드라이브 즐기는 사람들이 천하제일의 코스로 꼽는 32킬로미터짜리 수항계곡 59번국도 코스다. 연전에 물난리로 복구공사를 한 부분은 마치 방공호처럼 둔탁한 콘크리트 제방이 덮여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른 특출한 방법이 있다면 모르되, 일단은 사람이 살아야 하니 어쩌겠는가.
마침 신록이 눈이 부셨다. 거뭇거뭇한 소나무의 진녹빛에서 참새 혀처럼 뾰족하게 솟은 청아한 연록빛까지 산은 온통 푸르다. 농담을 달리하는 녹색의 계조, 이 계절이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다. 드문드문 스러져가는 산벚꽃의 농염함까지 가세했으니, 그 어느 고도의 상상력을 가진 예인(藝人)이 아니라면 그 아름다움을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겠다.
문득 계곡의 중간 무렵에 왼쪽을 보면 폭포수가 떨어진다. 산꼭대기에서 떨어진다. 그 뒤로 산맥도 없고 고원지대도 없음이 분명한데, 물이 그리 힘차게 떨어진다. 백석폭포다. 해발 1170미터의 백석산에서 떨어진다. 표고 낙차는 116미터. 길에 600미터에 지름 40센티미터짜리 관을 묻고 주변 계곡수를 펌프로 끌어올려 만든 인공폭포다. 지난 겨울 동안의 혹독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폭포를 이루는 계곡수는 용케 살아남았다. 폭포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정선 아리랑의 발원지인 아우라지. 두 물의 합수점을 이곳 말로 아우라지라 한다. 여량 아우라지가 바로 아리랑의 발원지다. 정-말-미-안-하-지-만, 지금 아우라지에 가면 후회 막급이다. 정자가 하나 있고 그 앞에 님을 그리며 노래를 했던 소녀의 동상이 서 있다. 강에는 줄을 끌어당겨 물을 건너는 배가 떠 있다. 묘사는 여기까지. 그리고 아래 사진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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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 공사가 한창인 여량 아우라지. 정선 아리랑의 발상지다.
다리를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다. 주민의 편의와 교통을 위해 만듦은 분명하나, 이 민속학적인 사적지(史蹟地)에 무슨 다리는 다리인가.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이 의미 있는 공간의 보존을 구하는 쪽이 백배 옳았다. 소녀의 동상을 보려 함도 아니요, 정자에 앉기 위함도 아니다. 아리랑의 발원지의 종합적인 풍광 속에서 느낌을 가지려는 게 아우라지 방문객의 정서이니, 이 공사로 인해 방문객들의 목적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굳이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려면 아우라지에 가고, 아니면 42번 국도를 따라 임계쪽으로 길을 잇는다. 작은 마을인 임계에서 점심 식사. 임계 끝 무렵 오른쪽에 장수식당이 있다. 찌개 백반이 5000원 선인데, 나물 찬과 찌개, 밥 맛이 일품이다. 임계에 하나 있는 사거리를 지나서 오른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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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동굴 종유석
식사를 마치고 아까 그 사거리로 길을 돌려 정선, 태백 방면으로 좌회전을 한다. 이번 여행의 고갱이, 화암동굴 가는 길이다. 17킬로미터를 평탄하게 달리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왼쪽 421번 도로를 택할 것. 길은 급박하게 하늘로 치솟고 좌우로도 요동을 치니 숨이 가쁘다. 이정표는 화암약수, 화암동굴을 가리키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동면소재지에 당도하면 먼저 만나는 곳이 화암약수터다. 철분이 많아 맛이 알싸하고 새콤한 물이 하루에 1600리터가 솟는다. 지름 30센티미터 정도짜리 항아리로 에워싼 작은 샘이다. 그 작은 샘이 이렇게 광대한 공간을 창조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잘 정비된 공원도 좋고, 물맛도 좋은데 옆에는 이리 적혀 있다. “음용수로 적합하나 일부 성분이 과다하게 있으므로 많이는 마시지 말 것.” 욕심 부리지 말라는 소리다.
그리고 화암동굴이 있다. 약수터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길거리에는 ‘그림바위’ 이름이 적힌 업소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림바위=화암(畵巖)이다. 오른쪽에 엄청나게 큰 ‘아기 도깨비’들이 화암동굴을 알려준다.
말은 관두고, 이쯤에서 사진들을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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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 나와라 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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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종유석. 장군바위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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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동굴 전경. 섭씨 8도짜리 지하세계다.
그렇다. 인간에서 시작해 자연으로 끝나는 지하세계, 화암동굴이다. 여행 내내 온몸을 적셨던 땀이 동굴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오히려 서늘하기가 얇은 겉옷을 입어야 할 정도였다. 금광시절을 재현한 입구를 지나 계단이 나오면, 뜻밖에 가파른 계단이니 조심하시길.
앞서 얘기했듯, 자연사와 인간사가 어우러진 이 공간을 정선은 모범적으로 개발해 놓았다. 노약자를 위한 입장용 모노레일(입구가 산 위에 있다), 곳곳에 설치된 휴식공간, 금광시대의 각종 사연과 기록, 아이들에 눈높이를 맞춘 도깨비들의 금광과 적당한 배경음악 등. 이 무더운 봄날 연인 가족 할 것 없이 손잡고 가면 더위도 씻고 공부도 하고 눈도 즐겁게 할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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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목리 메주와첼리스트 된장독
그러면 이걸로 정선 구경이 끝인가? 천만의 말씀.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원랜드가 있다. 적당한 자제력만 있다면 충분히 놀 수 있는 도박장이다. 자신이 없다면 출입 금지. 또 아우라지로 돌아가면 구절리에 폐선된 철로를 이용해 만든 레일바이크도 탈 수 있다.
하지만 이번의 추천 보너스는 그 둘이 아니라 여기, 바로 ‘메주와 첼리스트’다. 들어는 보셨나, 눈앞에서 펼쳐지는 된장독 3500개의 합창을.
임계로 되돌아가 사거리에서 강릉, 동해방향으로 우회전한다. 고개를 몇 개 지나며 20분 정도 달리면 오른편에 ‘약초나라’라는 큰 간판이 보이고, 그 아래에 자그마하게 간판이 하나 더 붙어 있다. ‘메주 첼리스트’. 세속으로 내려온 돈연 스님과 첼리스트 도완녀가 결혼해서 만든 된장 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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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독 갯수는 3500개 정도.
왜 스님이 여자와 결혼했냐, 스님 맞냐, 따위의 질문은 하지 말자. 세상에 이유 없는 결과, 절대 없다. 스스로 정당하고 남이 납득하는 결과를 가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러면 된장 공장 운영하는 여자를 어떻게 첼리스트라 부르나. 같은 이치다.
송림 가득한 가운데에 도로가 나 있고, 그 중간에 왼쪽으로 커다란 장독들이 끝없이 서 있다. 경탄이 저절로 나온다. 어디에서 다 모았을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직원에게 그 숫자를 물으니 대략 3500개 정도라 한다. 독마다 된장을 담은 날짜와 양을 기록한 인식표가 붙어 있고, 장독대 입구에는 숯과 고추를 끼운 금줄이 쳐져 있다. 꽃밭에 청동으로 만든 장대가 서 있고, 거기에 짚신이 한 짝 걸려 있다. 아래에 적혀 있길,
달마의 짚신 한 짝은
이곳에 있다
너의 짚신 한 짝을 찾아
길을 떠나라
돈연 스님이 쓴 시다. 뜻도 아리송하지만 그 깊이도 가늠이 되지 않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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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의 짚신.
장독대를 구경하며 한가롭게 주변을 걷는다. 냇가에도 가보고, 찻집에서 차도 마신다. 그리고 된장도 사고 간장도 사고, 장아찌에 주전부릿감도 산다. 그득한 여유도 훔쳐온다. 그러면 아까 급박하게 돌아다니며 눈독을 들였던 진경산수가 가슴 속에서 부활하고, 서늘했던 그림바위의 지하세계도 떠오를 것이다. 미치광이 봄의 정선 여행, 여기에서 끝.
<여행수첩>
1.가는 길은 위 기사 본문에 있으니 그대로 참고할 것
2.먹을 곳
- 장수식당:임계에 있는 한식당. 노변의 한적한 식당이지만 맛은 죽인다.
- 화암동굴 및 화암약수터 앞 식당가. 콧등치기 국수와 곤드레나물밥, 약수돌솥밥 등을 시도할 것. 약수돌솥밥은 시간이 좀 걸리니, 미리 주문을 하고 약수를 즐기면 좋다.
3.묵을 곳
- 화암동굴 앞 그림바위호텔(033-563-6222)
- 화암약수터 화암장(033-562-2374), 화암파크(033-563-7731) 등
4.살 곳
- 메주와첼리스트:임계에서 동해 방면으로 20분 거리. 각종 장류와 주전부릿감을 살 수 있다. 작설차를 마실 찻집도 운영. www.mecell.co.kr, 전화 1544-2711
첫댓글 정말로 좋은 곳임에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