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 4-7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저희 부모님은 그 시대 사람들 중에서는 알맞게 유식하고 선하신 분들이었습니다. 그 부모 밑에서 여러 형제들과 함께 자라는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교육방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어릴 때, 그리고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는 작은 잔소리꾼이셨고, 아버지는 굵은 잔소리꾼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든지 알아듣기 원하셨기 때문에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고, 그 교육이 어느 정도 성공하여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기록이 그런 스타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거듭거듭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듣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기초요, 성숙이기 때문입니다.
1. 본문 4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입니다.
1) 여기에서 모세께서 받으신 계시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장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학식이 있는 많은 사람이 문체의 특이성은 물론 1장에서 언급된 인간 창조와 같은 몇 가지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설명으로부터 모세의 역사 초반부가 모세 시대보다 더 오래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인도아래 원시적인 연대기의 여러 가지 단편을 수집해서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정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론에 밑바탕이 되는 주요한 논쟁은 1장 초반부에서 2장 3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엘로힘이라는 칭호로만 불리신다는 것과 2장 4절에서 3장 마지막까지는 하나님이 한결같이 ‘여호와 엘로힘’ 이라고 불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 5장에서는 엘로힘이나 여호와의 칭호가 각각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몇 가지 원인으로 언급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상이한 기록이 서로 다른 표현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모세는 진리만을 전하려 했으므로 이런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라고 설명되어 왔습니다.
2) 모세는 “대략”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천지의 ‘기원’을 마음 깊이 새기도록 유도합니다.
세상이 영원했다고 가장하거나 천지 창조에 대한 기억을 말살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려는 배은망덕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더 재능이 있고 독창적인 사람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게 하여 모두가 스스로 신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오직 창조된 순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가르치는 것이 결코 불필요한 반복이 아닙니다. 그러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건축자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로 전체를 말하는 제유법에 의해서 천지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칭호를 표현한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완성되어 세계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5-6절은
“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⑥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입니다.
이 구절은 앞 절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헐벗은 것이 보기 흉한 모양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초목과 채소들을 이 땅에 장식물로써 꾸며 주셨기 때문입니다. 명사 (시카)는 식물이라고 번역되는데, 때로는 나무로 번역되기도 합니다(창21:15). 그러므로 그 단어가 이 구절에서 ‘수풀’ 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앞에서 속을 말하는 듯했는데 여기에서는 종을 가리키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전에는 채소들이 3일째 되는 날 창조되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그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감지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그것들이 그 당시에 생기고 보존되며 번식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채소와 나무는 씨에서 발아하여 자랍니다. 또한 뿌리로부터 이식하기도 하고 가지를 뻗어 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방법을 아주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과 똑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덧입히신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성장할 수 있는 씨, 뿌리, 식물이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의 권능으로 모두가 갑자기 생겨나 존재하도록 했습니다. 그것들은 본질적인 힘으로 지탱될 수 있도록 영속적인 활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소생 작용이나 비의 도움이나 관개 시설이나 사람들의 경작으로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물을 공급하시기 위해 만드신 수증기에 의해서 지탱되게 한 것입니다. 실제로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비와 인간의 경작을 배제하십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친히 경작하시는 안개 능법으로 하셨습니다. 경작은 자연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는 땅에 필수적인 수분을 공급하여 본래의 습기를 유지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다”라고 말할 때 모세께서는 동시에 하늘의 큰 비를 내리고 멈추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비와 가뭄이 바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3. 본문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입니다.
1) 본문 7절 첫부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입니다.
모세께서는 인간의 몸이 땅에서 취해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앞에서 인간의 창조에 대해 생략했던 것을 더 설명합니다. 모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주 존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오만하게 유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즉시 최초의 기원을 제시합니다. 모세는 지금 인간의 우월성이 외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어리석은 자들이 자기들의 성품이 탁월하다는 것을 자랑하게 내버려두십시다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땅은 모든 생명체를 내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담의 몸이 흙으로 지어졌으며 감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육신을 가지고 정도가 지나치게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겸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모세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도록 또 다른 면에서 덧붙여 말합니다. 또한 모세는 특출한 징표로써 인간을 잔인한 동물들과 구별했습니다. 사실 이 동물들은 일순간에 땅에서 생겼지만, 사람은 점진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권리로써 땅이 만들어 낸 모든 피조물보다 인간을 월등하게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순식간에 인간을 땅에서 솟아나도록 명령하시지 않았겠습니까?
2) 본문 7절 중간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든지, 우리는 이 구절을 인간의 동물적인 생명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그래서 “생기”라고 하는 말을 ‘숨’이라는 단어로 해석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모세가 여기에서는 모두에게 공통적이 것만을 언급했으므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구절에 나타나 있는 것이 영혼의 하찮은 기능, 즉 육신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감정과 동작을 부여하는 것뿐이지만 인간의 영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것들과는 필연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먼저 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이 생활하며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영혼을 부여받았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능력이 다양하고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근거로 모세가 여기에서 그처럼 다양한 것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1장에서 언급된 지적인 면을 생략한 것이라고 추측해도 전혀 불합리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인간의 창조에 대해 세 가지 문제를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인간의 죽은 몸은 땅의 먼지, 혹은 티끌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생기를 부여받아 생명력 있는 동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이 영혼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놓으시고 거기에 불멸성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7절 끝 부분은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입니다.
우리는 (네페쉬)라는 말을 영혼의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형용사 ‘생’이라는 단어는 여기에만 적합한 것이지, 일반적으로 쓰이는 영혼의 능력을 모두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이 구절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진흙 형상이 생기를 부여받았다고 말씀하기 때문이요, 이로써 인간이 생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에 의해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진 소생의 영과 이 같은 생기 사이에 하나님의 대조를 제시합니다(고전15:45). 사도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아담의 인격 안에서는 완전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거듭나서 하늘나라의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고유한 은혜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언급한 것 뿐 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인간의 생명이 단지 ‘세상적인’ 것으로서 확고하고 안정된 일관성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