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급전’ 경고등… 단기차입금 비중 40% 육박
[산업계 ‘급전’ 경고등]
기업 3만곳 회계 분석 결과, 급전 의존 3년새 최고
경기침체에 돈줄 말라… “업황 부진 부실위험 커져”
SK케미칼은 경기침체 직격타를 맞아 2분기(4∼6월) 연결기준 적자로 전환했다. 사업 실적은 부진한데, 바이오 등 연구개발(R&D) 비용이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지난달 공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단기차입금은 2723억 원(개별기준)이다. 작년 동기 1337억 원의 두 배가 넘고, 2년 전(29억 원)과 비교하면 94배로 늘어났다. 전체 외부 조달 자금 중 단기차입금의 비중도 2021년 6월 0.9%에서 올해 6월 49.3%로 급등했다.
기업들의 외부 자금 조달 유형 중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차입금 의존도가 지난해 40%에 육박하며 3년 내 최고 수준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자금 조달이 쉽지 않자 국내 기업들이 고금리의 급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24일 동아일보가 한국경제인협회에 의뢰해 국내 비금융 외부감사 대상 법인기업 3만1908곳의 최근 3년간 회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조사 대상 기업의 외부 자금 조달 규모는 2020년 913조7000억 원에서 지난해 1163조4000억 원으로 27.3% 증가했다. 외부 자금은 장·단기 회사채와 장·단기 차입금을 합친 금액이다. 이 중 단기차입금의 비중이 같은 기간 35.5%에서 39.0%로 크게 뛰었다. 특히 2021년을 기점으로 기업들이 ‘급전’을 더 많이 빌리기 시작하면서 지난해 단기차입금이 장기차입금보다 더 많아졌다.
회사 성장성을 담보로 대중에게 발행하는 회사채나 상환 기간이 1년 이상인 장기차입금에 비해 단기차입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기업의 유동성 리스크가 커진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 입장에선 장기 저리 대출이 유리한데도 당장 자금 조달이 어려우니 단기로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이럴 때 업황이 좋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경기 악화가 겹치면서 부실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관광 7228억, 신세계건설 1615억… 대기업들도 ‘급전’ 리스크
기업자금조달, ‘급전’ 40% 육박
건설-관광-유통 ‘불황형 차입’ 늘어… 부채비율 100% 넘는 기업도 급증
3년전 전체의 62%서 작년 75%로
저신용 기업들은 신용등급도 하락… 이자내기 힘든 ‘좀비기업’ 전락우려
“정책자금 투입… 줄도산 막아야”
창업 28년 차를 맞은 토종 장난감 기업 손오공은 저출산 위기가 시작된 이래 수년간 매출이 급전직하했다. 2015년 매출 1250억 원, 영업이익 104억 원까지 기록했던 회사는 지난해 60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여기에 경기 침체와 금융 경색까지 덮쳐 회사는 단기차입금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단기차입금은 1년 내 상환해야 하고 금리가 높아 기업 입장에선 최후의 수단인 ‘급전’에 가깝다. 손오공은 2021년 말 27억 원에 불과했던 단기차입금을 올 6월 말 기준 94억 원으로 3.5배로 늘렸다. 이 회사는 지난해 신용등급이 8등급으로 강등되며 기업 활동으로 번 돈으로 이자조차 내기 힘든 ‘좀비 기업’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24일 본보가 한국경제인협회에 의뢰해 최근 3개년간 상반기(1∼6월) 반기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손오공 외에도 다수의 저신용 기업이 단기차입금 의존 확대와 신용등급 하락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저신용 기업은 조사 대상 중 한국신용평가 신용평점이 C∼D(7∼10점)인 곳들이다.
전기장비 제조 중견기업 다원시스는 단기차입금이 2021년 6월 말 513억 원에서 올해 6월 말 997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동시에 신용등급도 8점에서 9점으로 한 등급 낮아졌다. 단기차입금 증가와 동시에 신용등급이 떨어진 곳들은 섬유 제조업체 일정실업(같은 기간 45억 원→147억 원)과 의료기기 업체 옵트론텍(688억 원→700억 원) 등 대부분 경기 흐름에 민감한 곳이었다.
이번 분석 대상이 된 비금융 외부감사 대상 법인기업 3만1908곳 중에는 반기나 분기보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중소·중견 기업까지 포함돼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까지 이어지는 산업계의 실질적인 부채 리스크를 잘 드러내는 지표인 셈이다.
분석에 따르면 재무안정성의 핵심 지표인 부채비율(자기자본 대비 부채)이 100%를 넘긴 기업 비중도 확대일로로 치닫고 있다. 2020년 1만8399개로 전체 조사 대상의 62%였던 것이 2021년 1만9765개(63%), 2022년 2만3873개(75%)로 크게 늘었다. 이들 기업의 지난해 단기차입금 의존도는 37.6%였다. 한경협은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에서 단기차입금 비중이 집중적으로 증가하면서 금융시장 전반으로 부실화가 전이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 중에서도 급전 리스크에 노출된 곳들이 생겨나고 있다. 주요 그룹 계열사 중 화학·관광·식음료 등 소비자 경기 영향이 큰 기업들이나 최근 한파를 맞은 건설사가 대표적이다. 신세계건설은 무차입 기조를 깨고 2021년 6월 15억 원 수준이던 단기차입금을 올 6월 1615억 원까지 확대했다. 조달 자금 중 단기차입금 비중은 60.8%나 됐다. 롯데관광개발(331억 원→7228억 원), 해태제과(282억 원→715억 원) 등 관광·유통업계 기업들도 불황형 차입에 나섰다.
산업계 자금 구조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당분간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는 점도 기업들의 시름을 가중시키고 있다. 하반기(7∼12월) 들어 일각에서 미국발 금리 완화 기조가 시작될 거라는 기대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최근 국제유가가 급등세로 돌아서면서 긴축 기조 유지 전망이 나온다. 지인엽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제관계 문제가 얽혀 유가를 비롯한 외부 리스크가 당분간 쉽게 방향성을 갖긴 어려울 것”이라며 “실물 부문의 기업들이 1차적으로 충격을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계기업의 줄도산이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정책자금 투입이 검토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유정주 한경협 기업제도팀장은 “통화정책 불확실성이 큰 현 시점에서 산업계 전반의 단기차입금 확대는 추후 리파이낸싱(재융자) 등으로 인한 재무 불안정 심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금리 인상에 따라 일시적인 재무구조 악화를 겪는 기업에는 적절한 정책금융 편성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