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과 음악미학(1)
“음악의 진정한 본질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정신적인 것이며, 그것은 음과 음 사이에 있다.”(루돌프 슈타이너)
1.
고대인들에게는 음악의 소재인 소리가 영물(靈物)같은 신기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소리로 이루어진 음악은 제식(祭式), 축제, 무술(巫術), 종교적 행사 등이 행해질 때, 가장 중심적 역할을 했다. 고대 서구의 경우 음악사상은 우주에 존재하는 천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동양의 경우 도가에서는 음들의 조화란 것이 자연에 의해 생성된 소리 그 자체 속에 내재해 있다고 보고, 유가에서는 외물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사상에 의거해 음악은 인간의 도덕적 교화 수단으로 기능했다. 다시말해, 고대 서구의 음악사상은 천체의 법칙이라 할 수 있는 진리에 입각해 확립되었고, 고대 동양에서의 음악사상은 사회의 윤리 도덕에 입각해 확립되었다. 예악사상의 핵심은「악기」의 제2장「樂論」의 첫 구절(악은 같게 하는 것이고, 예는 다르게 하는 것이다. 같으면 서로 친하고, 다르면 서로 공경한다. 樂者爲同 禮者爲異 同則相親 異則相敬)에 있다.
천체 음악(musica mundana), 인간 음악(musica humana), 악기 음악(musica instrumentalis) -보에티우스,《음악의 원리》
정말로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고, 큰 기물은 늦게 이루어지며,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상은 형체가 없다. 大方無隅 大器晚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노자,『도덕경』41장)
무릇 도란 깊숙이 안정되어 있고 심오하면서도 맑은 것이다. 따라서 금석의 악기도 이 도에 의하지 않고는 울리지 않는다. 이는 마치 금석의 악기가 소리는 지녔지만 두들기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윽한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고, 소리 없는 고요 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그윽한 어둠 속에서 홀로 밝은 빛을 보고 소리 없는 고요 속에서 홀로 조화의 소리를 듣는다.
夫道 淵乎其居也 漻乎其淸也 金石不得無以鳴 故金石有聲 不考不鳴 視乎冥冥 聽乎無聲 冥冥之中 獨見曉焉 無聲之中 獨聞和焉.(장자,「天地」편)
2.
음악미학, 또는 음악의 미학(Aesthetics of music)은 예술의 본질, 음악의 아름다움과 취향, 창작과 감상을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근대 이전 전통에서 음악미학은 리듬과 화성적 구성의 수학적, 우주론적 차원을 탐구했다. 이는 18세기에 들어와 음악을 듣는 경험, 즉 음악의 아름다움과 음악의 인간적 즐거움(jouissance)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철학적 전환의 기원은 바움가르텐과 칸트에 기인한다.
한편, 헤르만 헤세의 단편「시인」은 중국 문명의 요람인 황하를 중심으로 시인의 운명과 고독을 흐르는 음악처럼 묘파하고 있다. 죽은 연인을 살리기 위해 부른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시와 음악의 기원이라면,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 가운데 연주와 황홀, 번역과 향수(享受)는‘무사(Mousa)-뮤즈’에서 발원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여신으로서 무사는 신들의 왕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탄생한다. 그들은 각기 서사시와 서정시, 비극과 희극, 독창과 합창, 가무와 찬가, 역사 천문학을 관장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온』에 의하면, 무사의 신은 가장 근원적인 자석에 비견된다. 신의 말을 호메로스가 인간의 언어로 옮긴 것이 번역이고, 그것을 음유시인 이온(Ion)이 소리내어 연주하는데 이는 노래의 황홀경에 이끌린 기억과 감동의 순간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향수한다. 우리가 즐기는 문학예술 작품이 무엇이든 이러한 차원과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면 그 기쁨은 배가될 것이다. 문학과 예술이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한다면,우리는 하나의 징후다(F․횔덜린,「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가장 주관적인 예술로서 음악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존재 방식은 어떤가? 연주자는 음악을 어떻게 또 무엇을 표현하며, 감상자는 그 음악으로부터 무엇을 들을 것인가?
3.
․ 음악은 모든 지혜 모든 철학보다 한층 높은 하늘의 계시이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 음악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가련한 고아다. (로베르트 슈만)
․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월터 페이터)
이상의 예에서 보듯, 음악은 모든 지혜와 철학 위에 존재하며 (종교적) 계시와도 같다. 하여 그 기원을 알 수 없고 영적인 교감과 조화를 본위로 한다. 각각의 음이 갖는 개체성은 다른 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반복과 차이를 생성한다.‘즐거운 학문’으로서 음악은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다양한 감정(affectus)들을 불러 일으키며 질서화한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 리듬에서 신을 지향하는 이성적 리듬까지 다양한 층위를 논하며, 그 리듬에 상응하는 영혼론을 펼친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감각의 주체로서 미적 대상에 규칙성과 동등성을 부여한다. 음악의 리듬은 화성과 멜로디가 펼쳐지는 시간적 지평이다. 그 리듬은 음악의 세부 요소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심리적ㆍ생리적 활동과도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여기서 진정한 시간과 자아에 대한 미적 경험은 우리가 문학예술 작품을 읽는 이유가 된다. 음악의 시는 상상과 현실의 접점이자, 에너지와 질량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질점(質點)이다.
바로크 시대 음악 들을 때마다
팔레스트리나 들을 때마다
그 시대 풍경 다가올 때마다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
―김종삼,「라산스카」전문
보헤미안 김종삼의 아름다움에는 이렇다할 내용이 없다(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북치는 소년」). 순수한 시의 아름다움은 본래 어떤 내용, 어떤 이유와도 친연성을 갖지 않는다. 주제 중심이 아닌 이미지 위주의 시는 더욱 그렇다. 라산스카의 시인은 고전음악 애호가로서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드빗시, 말러, 세자르 프랑크 외에도 많은 음악가들을 편애한다. 그에게 시의 밀의(密意)는‘라산스카’에 있다. 라산스카는 흔히 러시아계 유태인으로서 미국에서 활약한 소프라노 여가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시인 자신은 이에 대해 비밀로 붙인다. 한 연구자(김지녀: 2013)에 의하면, 라산스카를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의 악곡 구성 방식인 랏산(Lassan)과 프리스카(Friska)가 결합된 조어로서 음악가가 아니라 음악의 새로운 형식으로 보고 있다. 바흐와 헨델, 비발디가 크게 활약한 바로크 시대나 로마악파의 시조이자 대위법 음악의 대가인 조반니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을 들을 때마다나가 생각하는 것은 순수한 죄에 대한 자기 고백과 의식이다. 음악의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나의 대비는 죽어서도 영혼조차 없다고 하는 말미에 와서 절정에 달해 있다. 천상의 소리는 향기처럼 흩어져 별과 사랑의 노래로 남지만, 지상에 홀로인 나는 떨어진 잎으로, 죽음의 엘레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내면의 슬픔과 고독, 다이몬(daimon)은 오히려 성성(聖性)에 가깝다. 하늘나라와 죄, 맑은 물과 죽음의 문지방에는 라산스카의 영혼과 형식이 있다. 성과 속의 미적 거리와 경계에는 랏산과 프리스카의 결합이 그런 것처럼, 라산-스카의 비밀이 있다. 성이라는 속, 죽음이라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 모순의 일치에는 시와 예술 그리고 생의 진리가 은닉되어 있다. 하여 ① 바로크 시대의 음악과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 ② 절벽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 서글픈 어부의 그물 걷는 소리,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공기를 가르는 종소리, 별빛이 흐르는 소리 ③ 물소리 바람 소리 피리 소리 치터 소리 등은 위의 작품들 속에 나오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 존재 그 자체로서 음악의 시학 내지는 들림-부름의 현상학이다.달이 지구에게 고유한 지인(하이데거,「헤벨-知人Hebel-der-Hausfreund」)인 것처럼, 시와 음악은 우리의 지인(知人)이자 지음(知音)이다. 다음의 시에서 거문고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琴詩 / 소동파
若言琴上有琴聲 약언금상유금성
放在匣中何不鳴 방재갑중하불명
若言聲在指頭上 약언성재지두상
何不於君指上聽 하불어군지상청
만약 거문고에 거문고의 소리가 있다면
갑(匣) 속에서는 왜 울리지 않는가
만일 손가락 끝에 소리가 있다면
그대 손끝에서는 왜 들리지 않는가
*시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거문고를 배워야 한다. 설문해자에 거문고는 악기라고 하였다. 시는 사상-감정(性情)에서 표현되는데, 거문고는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므로 음악에서 거문고는 시에 가장 가깝다. (閔生詩集 序, 남공철,『귀은당집』)
4.
강에서 연등 놀이가 벌어지던 어느 날 저녁 한훅은 혼자서 강 건너편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강물 위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 등걸에 기대어 수천 개의 등불이 빛을 발하며 강을 따라 유유히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아주 오랫동안 방랑한 끝에 그는 강의 원천에 도달했다. 거기에 무척 쓸쓸하게 대나무 오두막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오두막 앞에는 그가 강가 나무 줄기 옆에서 보았던 그 노인의 돗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현금(弦琴)을 켜고 있었다. … 신비로운 음악이 은빛 구름처럼 계곡 사이를 맴돌았기 때문에, 완벽한 언어의 달인이 조그만 현금을 옆으로 치우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청년은 감미로운 놀라움 속에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회색으로 변한 하늘에는 한없는 방랑의 그리움 속에 두 마리 왜가리가 날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시구보다 훨씬 아름답고 완벽했기 때문에 한훅은 서글펐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 곁에 머물며 치터 연주를 배웠고, 그 다음에는 피리 부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나중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시를 짓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듣는 이의 영혼을 물결 위에 바람처럼 뒤흔들어 놓는 그 은밀한 예술을 한훅은 서서히 익혀 나갔다. 그는 산 가장자리에 걸려 머뭇대며 떠오르는 태양과, 물속에서 그림자처럼 설핏 사라지는 물고기들의 소리 없는 움직임과, 봄바람에 흔들리는 어린 버드나무를 묘사했다. 그가 지은 시를 듣다 보면, 그것은 떠오르는 태양과 노니는 물고기와 속삭이는 버드나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늘과 세계가 그때마다 한 순간 완벽한 음악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헤르만 헤세,「시인」부분
시인의 고독과 운명을 내면화한 이 단편에는 무엇보다 헤세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와 미적 감수성이 돋보인다. 주인공 한훅은 자신이 관조하는 모든 것들을 한 편의 시 속에 온전히 되살려내고 싶어 한다. 그의 고독은 지상의 아름다움과 타자화된 자아로서 욕망을 동시에 가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데에 기인한다. 황하를 배경으로 완전한 시인을 꿈꾸는 한훅에겐 유일한 스승이 있다. 그는 보라색 옷을 입은 기품 있는 노인으로서 언어의 달인이자 완전한 자유인이며 음악의 신이다. 그는 시의 아름다움과 비밀이 현(絃,玄)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스승의 문하에서도 한훅은 자신이 원하는 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때면 깊이 상심하며 귀향을 꿈꾼다. 아니, 스승을 증오하며 심지어 목을 조르려는 마음까지 내비친다. 그러다가도 한훅은 다시 스승 곁에 머물며 피리와 치터 연주를 배우고 시를 짓는다. 슈만의 음악과도 같이 그것은낙담과 흥분이 하나가 된 심리적 음색과 분위기로서 후모어(미셸 슈나이더,『슈만, 내면의 풍경』)에 속한다. 이 경우 후모어(Humor)는 유모어(humour)와 기분(humeur)을 포괄한다.
한훅이 저녁 강물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물빛을 바라보는 것은 사이의 존재 미학이자 유현(幽玄)이다. 등불이 수면에 흔들린다. 무수한 방랑 끝에 도달한 강의 원천에는 음악이 있다. 숨어 우는 피리 소리. 그 피리의 아름다움과 깊이는 구멍(空)과 흐름(flow)에 있다. 고통을 승화시키는 절대 도구이자 사물인 피리(소리)로 인해 천지와 만물은 비로소 깨어난다. 좋은 가문과 남부럽지 않은 재산, 규수와 정혼까지 하며 뛰어난 학문과 품행을 갖춘 스무 살의 청년 한훅, 시인을 향한 그의 꿈은 이 모든 것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도저한 슬픔과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미학의 근원적 감정이다. 한훅에게 태양과 물고기와 나무는 단순한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며, 그의 시작(詩作)이 갖는 의미는 세계와 대지가 순간의 느낌과 조화 속에서 하나의 존재, 하나의 음악이 되는 것이다. 자연과 사물 자체는 시보다 아름답고 완벽하다.
헤세는 스승으로 대변되는언어의 신(神)을 상정하여 그 신이 슬픔을 노래하면 모든 것이 다 슬퍼하고, 그가 스산함을 노래하면 모든 것이 다 스산해진다.헤세가 말하는 음악의 언어로서 시 또는 신은 그림자처럼 사람들의 외부에 존재하며, 우리의 내면을 파고 든다. 한훅처럼 시를 대하라는 헤세의 언명은 미완의 인간이 보다 완전한 세계로의 지향을 의미한다. 음악가가 자기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시인은 자신의 예술을 위한 독자적인 도구가 없다. 인간이 가진 언어 중 그 어느 것도 고양이의 긴 꼬리가 그려내는 유려한 곡선이나 오색 찬연한 날개를 펼치는 극락조가 보여주는 우아함과 재치, 광채와 명민함에 따라가지 못한다.
[참고문헌]
․ 김지녀,「라산스카의 의미에 대한 시론試論-김종삼의 시와 음악」.『한국문학이론과 비평』60권, 2013.
․ 김채수,「고대 동서양의 음악사상 비교 연구」,『일본어교육』제 49집, 2009.
․ 루돌프 슈타이너, 미하엘 쿠르츠 편(김현경 옮김),『천체의 음악 인간의 신비』, 무지개다리너머, 2021.
․ 이마미치 도모노부(이영미 옮김),『단테〈신곡〉강의』, 안티쿠스, 2010.
․ 임승국,「장자와 혜강의 음악관 비교 연구」, 원광대 대학원 한국문화학과 박사논문, 2022.
․ 추교준,「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의 리듬 이론 비교-동등성aequalitas 개념을 중심으로」,『音樂論壇』(한양대 음악연구소) 32집, 2014.
․ 헤르만 헤세(김지선 역),『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뜨인돌출판사, 2006. 기타
차시예고
16회(10.02.) 이태호 (철학박사/통청인문학아카데미 원장) 현과 황홀(1) 17회(10.16) 김상환 (문학박사/시인) 현과 음악미학(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