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을 제외하자면 이연걸은 현재 홍콩 무술영화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과거와 현대를 오가면서도 그는 본연의 스타일 그대로 살아남았던 무술 배우다. <무인 곽원갑>을 끝으로 무술 배우로서 은퇴를 선언한 이연걸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초등학교 때 이연걸 주연의 <소림사>(1979)가 개봉했다. 당시 ‘중국 전국무술대회 5년 연속 우승’이라는 카피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격투기 스타일 혹은 성룡을 위시한 변형된 코믹 쿵푸에 적응돼 있던 관객들에게 공산 중국의 점진적인 개방과 맞물려 등장한 정통 우슈 영화 <소림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스튜디오 촬영 혹은 한국에서 로케이션한 홍콩 무술영화들과 달리 중국 본토의 광활한 풍경과 건축 양식은 무척 낯설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뒤늦게 찾아온 ‘정통’이었지만 차라리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한국 극장가에 첫 모습을 드러낸 이연걸의 느낌도 그렇게 다가왔다.
당시만 해도 강고한 죽의 장막 탓이었을까? 성룡 같은 친근한 형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갑작스레 마주하게 된 귀순용사 형제를 대하는 것 같은, 그래서 어딘가 서먹하긴 하지만 왠지 의무적으로라도 친해지고 보듬어줘야 할 것 같은 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것이 전혀 낯설지는 않았다. 이연걸의 이미지가 이전 홍콩 소림사 영화들의 단골 주연이었던 유가휘를 직접적으로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유가휘와 비슷하게 대머리로 종종 등장했던 무술 배우 왕우(汪禹)의 이미지 또한 그 안에 있었다. 최근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시리즈에 연달아 출연하기도 했던 유가휘는 이미 이연걸 이전에 황비홍, 홍희관, 방세옥 등을 줄기차게 연기했던 배우였다. 삼손이 머리를 기를수록 힘을 얻는다면 유가휘와 이연걸은 그 반대였다. 성룡, 홍금보, 원표, 원규 등 경극학교 출신 칠소복 배우들, 그리고 남방무술의 전통을 올곧게 추구한 유가량, 유가휘의 무술과도 다른 정통 우슈의 몸짓이 드디어 이연걸을 통해 시작됐다. 그렇게 총명한 눈빛의 대머리 미소년은 환한 얼굴로 한국 극장가에 나타났다.
조숙했던 아이 이연걸
이연걸 하면 언제나 대머리, 혹은 변발의 고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 첫 번째 이미지는 바로 <소림사>였다. 힘들게 수련을 하면서도 결코 웃음을 잃지 않고 끝내 악에 맞서 분연히 일어서는 ‘귀여운 파이터’의 이미지는 선배인 유가휘보다 더 앞서간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이연걸은 소림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체육과 무술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공산 중국의 소년이었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어처구니없게도 대학 입학 당시 북경 체육대학 체육과에 들어가려고 원서를 넣기 위해 줄을 섰지만, 뜻밖에도 그 줄은 체육과가 아닌 무술과였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어려서부터 무술 소년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8세 때 체육학교에 들어간 그는 등교와 동시에 하루 8시간 이상의 무술 수련을 쌓았다. 수련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고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취소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어린 이연걸은 늘 집과 떨어져 고된 무술 수련만 거듭했다. 비록 소림 제자는 아니었지만 이 생활 자체가 ‘땔 나무를 구하고 물을 긷는’ 소림사 식의 혹독한 수련방식, '소화운수(燒火運水)'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다.
아마도 이연걸은 세계영화사상 가장 키 작은 영웅일 것이다. 이소룡, 성룡 등과 비교해도 그는 단 한 번도 조연을 해본 적도 없다. 어린 나이에 <소림사>로 데뷔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주인공이었고 존경받는 영웅상을 연기했다. 그는 언제나 의젓하고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주변의 귀감이 된다. 이는 이연걸이 살아온 삶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1963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그는 유독 지기 싫어하는 성미에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의젓하고 튼튼해야 한다고 믿었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훈련을 거듭하다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참고 지냈다.
그를 본 어머니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밤새 울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어머니에게만은 밝은 미소를 보여야겠다는 게 어린 이연걸의 다짐이었다. 언제나 밝은 영웅 이연걸의 모습은 아마도 그러한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1974년부터 5년 연속 중국 전국무술대회 종합우승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고 믿음직한 가장이었다. 현실적으로도 그는 중국 당국에서 선발된 체육학교 학생이었고 매월 급료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국가로부터 지원 받았다. 비록 적은 돈이었지만 이연걸 일가 5명의 최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는 막내였지만 가계를 책임진 기둥이었다.
1974년에는 친선 사절 자격으로 백악관에 초청돼 닉슨 대통령 앞에서 무술 시범을 보이기도 하는 등 이연걸은 무술가로서 급성장하게 된다. 5년 연속 중국 전국무술대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 앞에 중국과 홍콩 사이의 거대한 장벽도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이연걸의 등장은 1997년 홍콩 반환 이전 대륙과 홍콩 사이 영화 교류의 상징과 같은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홍콩으로 건너오게 되는 본토의 우승혜, 조문탁, 오경 같은 무술 배우들도 이연걸이 닦아놓은 길이 있었기에 쉽게 홍콩에서 배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장흥염 감독의 <소림사>는 중국과 홍콩의 교류, 그리고 정통 우슈의 영화화라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격투보다 시연을 우선하는 우슈의 특성상 대결의 묘미는 상당부분 지워져 있지만 전혀 다른 율동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영화였다.
또한 <소림사>의 개봉은 그 타이밍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이었다. <소림사>가 나오던 시기를 전후해 성룡은 <캐논볼> 시리즈 등으로 할리우드 진출을 노리다 좌절하고 다시 홍콩에 돌아와 그의 본격적인 첫 현대물인 <오복성>(1983)을 내놓으며 박스오피스를 강타했다. 또한 허관걸, 맥가 주연의 <최가박당>(1982)은 홍콩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무술 일변도가 아닌 할리우드식 오락물의 새로운 전형을 마련했으며, 서극 감독은 <촉산>(1983)을 만든 뒤 SFX 효과 지원을 위한 전영공작실을 세웠다.
<소림사>는 홍콩영화계가 장차 <영웅본색>(1986)을 위시한 홍콩 누아르의 도래를 앞두고 급격하게 현대화 바람을 타던 시기에 갑작스레 등장한 전통적, 교과서적 무술영화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홍콩 스타들이 급속도로 칼을 버리고 총을 들고, 변발을 풀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난 대머리 시골 총각이 바로 이연걸이었다. 이렇듯 유가량 감독이 만든 3편 <남북소림>(1986)에 이르기까지 이들 <소림사> 3부작이라는 징검다리가 없었다면, 이후 서극 감독이 <황비홍>으로 인해 다시금 전통적 무술영화 붐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흐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바로 홍콩영화계의 유일한 근대인 이연걸이다.
영원한 황비홍의 그림자
이제 이연걸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레 황비홍이라는 이름이 겹쳐진다. 그만큼 이연걸이 조문탁에게 바통을 넘겨주기까지 출연했던 3편인 <황비홍 3 사왕쟁패>(1993)에 이르기까지, 서극 감독의 <황비홍>(1991-) 시리즈는 그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이연걸 이미지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황비홍은 언제나 홍콩영화의 역사와 함께 했다. 19세기 말엽 실존 인물인 황비홍은 홍콩영화 최초의 스타라 부를 수 있는 관덕흥 사부 주연의 <황비홍>(1949) 이후, 50년대에는 무려 60여 편의 황비홍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 캐릭터였다.
<소년 황비홍> 같은 TV 시리즈도 큰 인기를 얻었으며 시리즈의 숫자와 리메이크된 수에서 이 황비홍 관련 작품은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을 정도다. 심지어 <취권>(1978)에서 성룡이 연기하는 인물도 황비홍이다. 황기영의 아들인 황비홍은 소림파 홍권(洪拳) 계통으로 철선권(鐵線拳), 오형권(五形拳), 공자복호권(工字伏虎拳), 괴자무영각(拐子無影脚)의 고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사자춤을 잘 춰 광주에서는 사자왕이라고도 불렸는데, 77세를 일기로 1924년 숨을 거둘 때까지 광동군과 광주의용군의 무술지도자로 일하기도 한 애국자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 홍콩 뉴웨이브의 대표주자인 서극은 다시 한 번 황비홍을 영화계의 중심으로 불러냈다. 황비홍은 무술을 공격이 아닌 자기방어와 정의를 위해 추구해야 한다는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영웅이었다. “중국 무술을 통해 세계에 중국을 알리고 싶다”고 공언해온 이연걸에게 황비홍은 더없이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당시 1997년 홍콩 반환이라는 위기감은 서구 열강의 야욕 아래 놓인 과거 홍콩의 현실과 유사했다. 외세의 침략에 전통 무술의 기세로 맞서는 황비홍이라는 난세의 영웅을 연기하는 데 있어 이연걸만한 적임자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이연걸은 홍콩에 있지 않았다.
1987년 <소림사> 시리즈를 끝내고 그 시리즈에서 함께 출연했던 배우 황추연과 결혼한 이연걸은 198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가게 된다. 그러면서 <중화영웅>(1988), <풍운인물>(1989) 같은 미국 로케이션의 현대 영화에 머리를 길어 출연했다. 그에게서 더 이상 앳된 소림제자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황추연과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던 이연걸은 <풍운인물>에서 함께 연기했던 배우 리지와 사귀게 되면서 1991년 이혼하게 된다. 몇 년 새 이민과 이혼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겪으며 이연걸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고 또 한번 삭발을 단행했다. 과거 <소림사> 시리즈 장흥염 감독의 열렬한 팬이었던 서극이 ‘황비홍은 무조건 이연걸’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황비홍>은 1990년대 쇠퇴기에 들어선 홍콩영화가 이전의 전성기를 회고하는 노스탤지어이자 새롭게 살아남고자 애써온 전략의 결정체다. 동서양의 문물이 혼재된 과거 중국의 모습은 그대로 국적 불명의 도시 홍콩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황비홍>의 영어 제목 역시 ‘옛날 옛적 중국에서’다. 그런데 황비홍과 이연걸은 적합한 조합이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이연걸은 홍콩에 연고를 둔 광동인이 아니라 홍콩 반환 이전에 중국 본토로부터 스카웃된 용병이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 홍콩 반환 이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고 종종 말해온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는 애초에 본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연걸은 중국사회의 전통적 영웅들을 줄곧 연기해왔다는 것과 별개로 사실 홍콩영화계의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였다. <소림사> 시리즈를 끝내고 별다른 미련 없이 이민을 떠날 수 있었던 데도 그런 이유가 크다. 이렇게 모호한 정체성의 스타가 황비홍이라고 하는 특정 지역사회의 영웅을 맡는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이연걸은 중국과 홍콩, 그리고 대만에 걸쳐 있는 그 모호한 화어권의 한계를 넘어 통합과 분리의 역동성 사이에서 기묘한 연결고리가 된 것이다. 홍콩영화계 안에서 그런 연결고리가 되는 스타는 이소룡과 성룡 외 이연걸이 거의 유일하다.
할리우드로 간 이연걸
애초에 이연걸은 성룡과 같은 '동도서기'를 꿈꾸었다. 강박적인 해외 진출을 꿈꾸기보다 홍콩에서 그 작품 자체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 할리우드의 초청을 받게 될 것이란 생각 말이다. 하지만 성룡과 달리 이연걸 스타일은 쉽게 변형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황비홍> 이후 정소동 감독의 <동방불패>(1992), 원규 감독의 <방세옥>(1993) 정도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사극 액션영화라는 울타리 안에서 상승의 여백을 찾을 수 없었다. 실제 무술 연기를 지향하는 자신의 무술영화가 더 이상 흡입력 없는 단계에까지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본인이 출연한 <황비홍>의 뻔뻔한 아류작인 왕정 감독의 <황비홍 철계투오공>(1993) 같은 영화에 본인이 그대로 직접 출연하는 예는 정말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일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다시 현대물인 <보디가드>(1994), <영웅>(1995), <탈출>(1995) 등에 출연하며 스타일 변신을 꾀했다. 당시 그가 꿈꾸었던 동도서기의 가장 극명한 예가 바로 정소동 감독의 <모험왕>(1996)이다. 변화를 모색하던 이연걸과 또한 <동방불패> 이후 결정타를 내놓지 못한 정소동 감독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대작 프로젝트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 스타일을 강화하는 것보다 성룡의 <용형호제>(1986)가 그랬던 것처럼 할리우드 적인 ‘활극’ 흥행요소를 홍콩식으로 적용했다.
대대적인 엑스트라를 동원해 기차가 시가지를 덮치고, 마적두목(이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무인 곽원갑>에서 어린 곽원갑의 아버지로 나오는 예성이다)이 괴물로 변하며, 만리장성이 무너지는 CG 장면 등 <모험왕>은 홍콩식 블록버스터의 최고점을 지향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연걸의 <용형호제>’라 할 만한 <모험왕>에서 이연걸은 <인디아나 존스> 식의 ‘박사’로 출연한다. 여기 등장하는 일본군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독일군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모험왕>은 이연걸의 영화들 중 가장 특이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험왕> 이후 이연걸은 직접적인 할리우드 진출을 모색한다. <리쎌 웨폰 4>(1998)로 할리우드로 가기 앞서 출연한 이인항 감독의 <흑협>(1996), <황비홍 6 서역웅사>(1997), 동위 감독의 <히트맨>(1997) 등은 일종의 포트폴리오 같은 영화들이다. 황비홍식의 밝은 영웅 이미지를 벗고 이때부터 그의 얼굴은 본격적으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서구 관객들은 황비홍 같은 친근한 영웅의 이미지보다 보다 날렵하고 쿨하고 직선적인 영웅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그렇게 소년의 미소를 잃어버린 이연걸은 할리우드 데뷔를 죽음으로 시작한다. <리쎌 웨폰 4>에서 베트남 난민과 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 중국인들은 비참해 보인다. 주윤발과 함께 <대호출격>(1988)에서 호흡을 맞췄던 또 한 명의 액션 스타 이원패는, 난민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해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초반부터 죽어 나간다. 여기서 이연걸은 자기 동포마저 마음대로 이용하고 죽여버리는 사악한 중국인 마피아로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흰색과 검은색 두 가지 색 의상만 입고 나오는 데서 연상되듯 그는 정말 단순무식 과격하다. <황비홍>에서 무작정 금산(金山)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려는 중국인들을 제지하던 그가, 여기서는 그 반대의 위치에 선 것 같은 씁쓸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이연걸의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작은 <로미오 머스트 다이>(2000)일 것이다. 킬링타임용 영화치고는 115분이라는 제법 긴 시간의 대부분을, 이연걸의 할리우드 입성 최초의 주연 영화임을 축하하려는 듯 이연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난도의 스피디한 쿵푸 연기로 도배하고 있다. 여기서 이연걸은 원규 무술감독과 함께 했다. 성룡, 홍금보, 원표와 함께 중국 경극학교에 입학해 무술과 연기를 배웠고 그 사형제들과 함께 칠소복으로 활동했던 원규는 서극, 원화평과 결별한 이연걸이 <방세옥>(1992)과 그 속편인 <대도무문>(1993) 등을 통해 새로이 파트너로 택한 감독이다.
이후 이연걸 영화 액션의 대부분은 이연걸과 원규 두 사람의 머리로부터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로미오 머스트 다이>는 이연걸이 원규와 함께 홍콩에서 만든 현대물 후기작들인 <보디가드> <탈출> <영웅> 등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와이어를 이용한 공중 격투 신은 기본이고 상대역인 트리시(알리야)와 한 몸을 이루어 벌이는 격투 신은 <영웅>에서 아들을 들고 마치 쌍절곤처럼 다루는 액션 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소방 호스를 물 먹인 끈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장면은 그의 장기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황비홍> <방세옥> 이후 이연걸의 영화들은 엇비슷한 제목만큼이나 판에 박은 듯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소룡과 이연걸, 쿵푸하는 다윗
<리쎌 웨폰 4>에서 멜 깁슨은 이연걸을 향해 “네가 브루스 리인줄 아냐?”고 빈정거린다. 그리고 <로미오 머스트 다이>에서 이연걸은 동생의 살해 소식을 듣고 홍콩의 감옥을 탈출해오는 것으로 설정돼 있는데, 그것은 이소룡의 <용쟁호투>(1973)의 구조와 흡사하다. 할리우드 진출 이후 이연걸은 집중적으로 선배인 이소룡, 성룡과 비교됐지만 그 무게중심은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듯 조금 더 이소룡 쪽으로 기운다. 초기작들인 <중화영웅>과 <풍운인물>에서 해외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이미지는 영락없이 이소룡의 그것이다. ‘무술정신의 고취’라는 점에서 이연걸은 이소룡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리메이크작인 <정무문>(1994)에서 이소룡이 연기했던 진진을 그대로 연기한 것이나, 이소룡이 출연했던 TV 시리즈 <그린 호네트>의 영화화인 <흑협>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이연걸의 초기 현대물 중 하나이자, 서극이 <황비홍> 이전에 이연걸과 처음 만났던 <용행천하>(1989)도 예외는 아니다. 이연걸은 이소룡처럼 고독하다. 성룡처럼 주변의 지형지물을 지혜롭게 이용하지도, 적당히 물러설 줄 아는 융통성도,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치는 꾀도 부리지 않는다.
얼굴에는 웃음이 없고, 졸졸 따라다니는 졸개들과 거구의 백인 악당이 있으며, 결코 대결에서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이소룡의 운명이 그러했듯 이연걸의 정체성은 언제나 ‘화교사회의 해결사’로 귀결된다. <중화영웅> <풍운인물>을 시작으로 <용행천하>를 거쳐 <무인 곽원갑>에 이르기까지 그 이미지는 한결같다. 그는 체격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허허실실 성룡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귀여운 파이터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 역대 쿵푸 액션 스타들 중에서 이연걸처럼 ‘똘똘한’ 이미지는 이소룡도 성룡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소룡이 되고 싶은 나머지 유독 최근 현대물에서 좀체 웃는 법이 없다. 아쉽다면 아쉽지만 이연걸의 지향점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더 원>(2001)에서 “날 죽일 순 있어도 내 머리만은 건드리지 마라”고 얘기하는 자존심은 바로 이소룡의 그것이다.
홍콩영화계에는 아주 뚜렷한 스타의 계보가 있다. 장철 감독의 영화를 거친 <외팔이> 시리즈의 왕우, 그리고 <복수> <대결투> 등 찰떡 궁합을 과시했던 적룡과 강대위 콤비, 이전과 이후 모든 무술영화를 쓸어버리고 만신전에 오른 이소룡, 그리고 비장미를 버리고 코믹 무술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취권> 이후의 성룡이다. 하지만 특수효과 기술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홍콩 누아르의 물결 속에서 ‘무술 못 하는’ 배우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당시 홍콩영화계에서 남자배우의 경우 모든 무술 배우가 스타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모든 스타는 무술 배우였던 셈이다.
이렇게 홍콩 누아르는 홍콩 스타 시스템에 있어 하나의 거대한 인식론적 단절의 순간이었다. 이연걸은 그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무술 스타였다. 마지막이었던 만큼 그는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연걸이 출연한 홍콩영화들 중에서 버디무비를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로 원톱 주인공 ‘솔로’라는 점, 영화 속에서 최대한 로맨스가 배제되고 있어서 또한 ‘솔로’라는 점은 이소룡과 이연걸이 처한 주요 환경이었다.
이소룡과 이연걸은 중국 무술의 정신과 기예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다윗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보다 거대한 적과 싸운다. 특히 3편을 끝으로 <황비홍> 시리즈를 떠났던 이연걸이 <황비홍 6 서역웅사>로 다시 복귀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황비홍> 시리즈를 서부 개척시대로 옮겨 거기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정체성에 관해 질문하고 있는 이 영화는 미국에 도착한 황비홍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다. 홍콩 반환 이후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화교사회의 상황과 자신의 영토를 모두 잃어버린 인디언들의 고민은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황비홍은 웨스턴 장르의 백인 총잡이들과도 싸움을 벌인다. 이연걸이 이소룡과 같은 운명을 지닌 중화권 격투의 대리자라지만 이것은 거의 엽기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종종 콜로세움 같은 글래디에이터들의 무대 안에서 백인과 맞선다는 점에서도 이소룡(<맹룡과강>)과 이연걸(<크레이들 투 그레이브> <더 독>)은 비슷한 운명을 지녔다.
<무인 곽원갑>의 중요한 이미지 컷도 바로 그러한 백인 자이언트와의 싸움이다. 단지 더 오래 살고 있기 때문일까? 사실 이연걸의 운명은 그보다 더 가혹해서 후기작으로 갈수록 더욱 거대하고 많은 백인들과 싸우고 있다. <키스 오브 드래곤>(2002)에서는 거의 수십 명의 경찰들과 싸우고, <크레이들 투 그레이브>(2003)는 더 압권이어서 영화 속에서 ‘쿵푸 하는 제임스 본드’라 불리는 그가 실제 복싱, 격투기 챔피언 배우들과 비밀 지하 결투장에서 가공할 일대 다수의 대결을 벌인다.
이소룡과 이연걸이 같은 토대 위에 있다 할지라도 선명하게 갈라지는 지점 또한 존재한다. 이소룡에게서 갖게 되는 위압적인 느낌, 경외의 대상으로 물신화되는 느낌이 이연걸에게는 없다. 기본적으로 이연걸은 성룡처럼 친근한 현실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크레이들 투 그레이브>에서 이연걸을 만난 한 죄수는 대뜸 한국말로 어색하게 “너 키 큰 백인들 좋아해?”라고 묻는다.
그러자 이연걸은 “난 한국말 못 해”라고 영어로 대답한다. 유독 이연걸은 다른 홍콩 배우들과 달리 중국, 한국, 일본, 딱 그 어느 나라 사람처럼 생겼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쩌면 아시아권 전체에서 그가 얻은 인기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성룡의 사람 좋은 웃음 또한 그와 맥락을 함께 한다. 하지만 성룡의 ‘총각 강박증’과 비교하자면(그것의 가장 최고점이 바로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이다) 이연걸은 종종 든든한 아버지로 등장했다.
성룡이 아마도 평생을 통틀어 <취권> 등으로 시작한 소자(小子, 청년) 캐릭터를 버리지 못할 운명이라면, 이연걸은 일찌감치 가장 혹은 리더 캐릭터의 전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소룡도 완성하지 못 했고 홍콩 배우들 중 주윤발과 더불어 그가 유일하게 올라선 자리다. 이소룡에게 있지만 성룡에게 없는 것, 성룡에게 없지만 이소룡에게 있는 것이 이연걸에게는 있다. 바꿔 말해 그것은 이연걸이 그 둘 누구 하나도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도 같다.
<무인 곽원갑>, 아날로그 고수의 거대한 퇴장
한중 합작 프로젝트인 <칠검>을 완성하고 그 드라마 제작까지 준비하고 있는 서극 총감독은 이 드라마를 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재미있는 이유가 있다. 1980년대 장흥염 감독이 <소림사> 시리즈로 중국 무술 붐을 일으켰었다. 평소 장 감독님의 공로를 흠모해왔고, 제자로의 교분도 가지고 있었다. 작년에 장 감독님이 <칠검하천산>을 하고싶다고 할 때 흔쾌히 함께하고 싶다고 해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림사>의 주인공이었던 이연걸을 <황비홍>에 등장시켰던 서극의 이 얘기 속에는 <무인 곽원갑>의 제작 배경도 그대로 담겨 있다. <소림사>를 통해 이연걸을 발굴하고 다시금 전통 무술영화 붐을 일으켰던 장흥염 감독은 <소림사>를 만들기 전까지 6년여의 공백이 있었다.
바로 <백발마녀전>(1980)을 끝으로 무술영화 연출을 쉬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발마녀전>은 <무인 곽원갑>의 우인태 감독이 1993년 임청하를 주인공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런데 오리지널 <백발마녀전>의 히로인이었던 포기정은 <소림사>로 돌아오기까지 장흥염 감독이 만들었던 <대풍랑>(1976) <통천림기>(1979) 등에서 단골로 주연을 맡았던 배우다. 바로 <무인 곽원갑>에서 곽원갑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배우가 바로 그다. 오우삼의 <첩혈가두>(1991)에서 양조위의 엄마로 나오고, 곽요량의 <용재변연>(1999)에서 유덕화의 엄마로 나오고, 허안화의 <천언만어>(1999)에서 이강생의 엄마로 나오고, 원규의 <버추얼 웨폰>(2002)에서 서기의 엄마로 나오고, 이동승의 <망불료>(2003)에서 장백지의 엄마로 나온 포기정은 그 존재만으로도 <무인 곽원갑>에서 장흥염과 우인태와 이연걸을 잇는 중후한 무게감을 불어넣는다.
<무인 곽원갑>에서 어린 곽원갑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배우 예성 또한 평소 ‘이연걸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해온 정통 무술 배우로, 이미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세라프 역할로 얼굴을 알린 바 있다. 이렇듯 <무인 곽원갑>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연걸의 무술영화 은퇴작’이라는 무게감에 값하는 캐스팅과 설정으로 가득 차 있다.
과거 <화평본위>(1995)를 끝으로 할리우드로 떠났던 주윤발은 영화 속에서 마치 홍콩에 대한 은유와도 같은 화평반점의 수호신처럼 등장했다. 이연걸 또한 <리쎌 웨폰 4>로 할리우드를 향해 떠나가기 직전 출연한 <히트맨>(1998)에서 별로 다르지 않았다. 영화에서 ‘살수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연걸은 악질 악당들만을 죽이면서도 돈을 받지 않는 킬러다. 일본 재벌과 외국인 킬러들을 응징하고 여자와 어린이를 보호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화평본위>의 주윤발처럼, 홍콩에 대한 작별인사를 건네면서도 ‘그래도 홍콩은 내가 지킨다’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무인 곽원갑>을 통해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이연걸의 모습도 그와 맥락을 함께 한다. 그는 홍콩영화계가 배출한 가장 왜소한 파이터지만 한편으로 가장 큰 책임감을 짊어진 배우였다. 책임감이 클수록 실수도 많은 법이기에 이제는 그의 범작들도 이해하려는 마음이 앞선다. 또한 자신의 활약과 더불어 원화평, 원규, 정소동 등의 무술감독이 자연스레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됐다는 점은 작품 개개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중요하다. 그는 그렇게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면서 성룡과 더불어 무술영화가 홍콩을 넘어 초국적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테크놀로지에 의탁하지 않는 마지막 아날로그 고수로 살았다. 이연걸의 퇴장과 함께 세계영화계는 또 하나의 거대한 오리지널리티를 잃었다.
주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