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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江洞)
해반천(海畔川)가에 있는 강창포(江倉浦)였으며, 강창리에서 1947년 6월 강동으로 개칭되었고, 1981년 시승격과 함께 서부동에 편입되고 2통으로 나뉘었다.
◎ 거북산
외동 서쪽의 거북모양으로 생긴 산이다.
◎ 거인리
외동의 옛 명칭이며, 마을 앞의 정자나무인 은행은 도 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 500년, 높이 18m, 둘레 5.5m 이다.)
우부면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1914년 평전리를 합하여 내동리로 했다가 1947년 7월 6일 내동으로 고치고 2구로 나누었다가 1981년 7월 1일 시 승격시 행정상 내외동이되었다.
◎ 경암교
대성동과 연결하는 다리로서 1965년 준공했다. 이 다리에서 대성동 3거리까지의 길을 구지로라고 이름지었다.
◎ 경우개
옛날 허씨의 3형제가 여기에서 공부했으며, 1921년 삼우정을 지었는데 지금은 수인사가 되었다.
◎ 경운산
378m, 옛날 운참산. 조선초기까지 운참사가 있었다. 읍지에 김일손이 운참사의 승 지집에게 보낸 글이 실려 있다.
◎ 고조산
익산(益山)줄기의 끝인데 개가 엎드린 모양(복구형伏狗形)이라고 개혈(穴)이라고도 부른다. 부원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이 산의 남단에 있었던 공동묘지가 없어지고 토취장이 되었다가 그 자리에 시청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산은 원뫼 뿌리라고 하며, 분성산(盆城山)의 산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좌룡맥(左龍脈)이 이곳에서 반전(返轉) 하여 읍내를 되돌아보고 있는 형국이므로 고조산(顧祖山)이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말기까지 이 산에 성낭당, 기우단(祈雨壇) 등이 있었다.
◎ 구내 , 괴네
삼방동 3구, 옛날 내(川)가 흐르던 곳에 마을이 되었다고 하여 "옛고(古)"자 "내천(川)"자를 써서 고천부락이라고도 부른다.
◎ 구산동(龜山洞)
예종(睿宗)때 지리지(地理地)에 삼산리(三山里)로 나오니 이 이름은 오래된 것이다. 1941년 11월 구산정(龜産町)이 되고 1947년 6월 구산동(龜山洞)으로 고쳐 2구(區)를 두었다. 1981년 시 승격시 북부동에 들어가 2통(統)으로 나누었다.
<문화유적>
구지봉(지방기념물 제58호), 허황비릉(사적 제74호), 파사석탑(지방문화재자료 제227호), 구산동 고분군(사적 제75호), 국립김해박물관, 구산동마애불(지방유형문화재 제186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 남산
부원동 "남산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금관가야 시절 김해평야가 바다였기 때문에 당시의 놀이터로 "남산"이라 일컬었으며, 고조산 (顧祖山)이라고 한다.
◎ 남지터
현재 김해중학교 앞에 있었던 큰 못터이다. 이 못은 정조 13년(1789) 부사 김우현(金禹鉉)이 읍기(邑基)에 도움이 되고, 부민(府民)에 좋다고 하여 새로 판 못이다. 면적이 1,020척(尺)이였으며, 1956년 4월 못의 북부에 김해중학교가 들어서고, 1977년 2월 김해군청(현 가야세무서)을 착공하여 1978년 4월 준공되었으나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 내밑골
거북산과 함악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 내동(內洞)
우부면(右部面)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914년 평전리를 합하여 내동리로 옮겼다가, 1947년 7월 6일 내동으로 고치고 2구로 나누었다. 1981년 7월1일 시승격시 행정상 내외동으로 되었다. 경원교(慶原橋)로서 대성동과 연결되며, 대성동 3거리까지의 구지로가 시작된다.
<문화유적>
내동지석묘(지방기념물 제97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 내외동(內外洞)
경운산 아래쪽에 있는 내동과 외동이 1981년 7월 1일 시승격과 함께 내외동이 되었으며, 10개동 중에서 인구가 가장 적었으나, 1986년 12월 토지개발공사에 의한 택지개발로 총 767,074미터제곱이 조성되어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 당산할머니
1통의 새 각단에 있는 바위 너덜이며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은 형국이다. 정원 초 3일에 당산제를 지낸다.
◎ 대동면(大東面)
김해부의 동쪽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동면이라고 하여 11개리가 있었는데 1914년 월당리와 평촌리를 합하여 월촌리로 하여 10개리가 되었고, 1944년 10월1일 면 이름이 하등(下等)과 발음이 비슷하므로 대동면으로 개칭하였다.
1984년 김해시 불암동으로부터 대동면을 지나 상동면에 이르는 도로가 포장 되었다.
현재 10리(덕산, 월촌, 조눌, 대감, 괴정, 초정, 예안, 주동, 주중, 수안)28마을이 있다.
<문화유적>
예안리고분군(사적 제261호), 산해정(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
◎ 대성동(大成洞)
향교(鄕校)가 옮겨온 뒤 교동(校洞)이 되었다가 1914년 우부면(右部面)의 북외리(北外里)와 삼산리(三山里)의 일부를 합하여 답곡리(沓谷里)가 되었다가 1941년 11월 1일 대성정(大成町)으로 고쳤다가 1947년 6월 현재의 대성동(大成洞)으로 개칭되고 2구로 나누었다. 향교(鄕校)의 대성전(大成殿)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성동(大成洞)이라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대사리(大寺理)로 나오는데, 고려때 부터 금강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기 때문이며, 1981년 7월 1일 시승격과 함께 북부동으로 되고 8통으로 나뉘어졌다.
<문화유적>
향교(鄕校, 지방유형문화재 제217호), 대성동고분군(사적 제341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 동상동(東上洞)
좌부면(左部面) 동쪽의 위에 있는 마을로 1914년 대성리와 부원동의 각 1부(部)를 병합하여 동상리가 되었다가, 1941년 11월1일 조일정(朝日町)으로 고치고, 1947년 6월 다시 동상동이 되어 2구(區)로 나누었다.
1976년 4월 20일 읍의 중부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읍사무소(1955년까지)와 경찰서(1962년까지)가 이곳에 있었다.
1981년 7월1일 시승격과 함께 19통으로 나누었으며, 1983년 11월 3일 동청사를 새로 지었다. 1984년 9월 14일 호계천(虎溪川)의 복개공사착공, 행정상 20통으로 나누었다.
<문화유적>
분산성(사적 제66호), 만장대, 해은사, 타고봉, 분산봉수대, 사충단(지방기념물 제99호), 분성대, 중궁터, 연화사, 미륵마애불 등의 문화재가 있다.
◎ 말맛
안동부락, 옛날 역촌으로 말을 매던 곳이다.
◎ 명법동(明法洞)
옛날 칠산면의 성법리, 대법리, 음법리였다가 우부면 음법리가 되었다. 1947년 6월 음법을 명법동으로 개칭하고 2구로 나누었고, 음법, 대법, 성법 등의 지명을 보면 법당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 듯하다. 1981년 시승격과 함께 칠산동에 들어가고 2통으로 나뉘었다.
<문화유적>
칠산동고분군(지방기념물 98호)
◎ 모유정
중종때 전라우수사를 지낸 류옹(신옹)이 공북장을 지었는데, 순조5년(1805) 기인리로 이건하였다. 지금은 미식재(류홍귀 건립)의 현판이 걸려 있다.
◎ 무접
외동 임호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나비가 춤추는 형국이라 해서 무접마을이라고 함.
◎ 물레바위
우암 뒤의 바위이며, 그 아래는 계곡이다.
◎ 물방곡
안동부락, 안동 동쪽 골짜기, 옛날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어 여름철에 물이 많았으나 30여년 전에 매몰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 배중개
이수(梨樹)라고 하며, 예종때 지리지에 활천리의 이수개원이 있다고 하였으며, 남역에서 청석의 남정원을 지나 이곳에서 고개를 넘어 대동면으로 가는 역로에 있었던 원우(阮宇)였다 또한 배징개라고도 했는데 이는 풍랑시 배를 정박하였기에 불리워진 이름이다.
◎ 봉곡
나비가 춤추는 모양의 지형때문에 무접(舞蝶)이라고 한 것을 지금은 무정이라고 부른다. 고종 초에 정현식부사가 중국 금릉(남경)의 검승을 본받아 임호산을 봉밍산이라고 하고 이 마을을 붕곡리라고 고쳤다. 1914년 외동리에 병합되었다.
◎ 봉황동(鳳凰洞)
처음 회현리인데 1914년 고서리와 강창리 일부를 병합하였다. 1914년 11월 1일 일본인들이 봉황정으로 부르다가 1947년 6월 25일 봉황대가 있어 봉황동으로 개칭하고 2구를 두었다. 1981년 7월 1일 시 승격으로 회현동에 들어가 9통을 두었다.
옛날에는 성중리, 안인리였으며 1958년 10월 김해교육청이 이곳에 세워졌으나 그 건물은 지금 회현동사무소가 되었다.
<문화유적>
가락국시조왕 궁허(宮墟), 봉황대(지방문화재자료 제87호), 여의각, 회현동패총(사적 제2호), 봉황대지석묘 등의 문화재가 있다.
◎ 부원동(府院洞)
김해부의 원우(院宇)가 있었던 곳이며, 1914년 차전리(茶田里), 강창리(江創里), 고서리(古西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부원리가 되었다.
1941년 11월1일 영정(榮町)으로 고친 것을 1947년 6월 부원동으로 개칭하고 3구로 두었다. 1981년 7월1일 시승격과 함께 11통으로 나누게 되었으며, 1980년부터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어 신시가지를 형성하고 시청, 군청(현 김해세무서)을 비롯하여 등기소, 보건소 시외버스주차장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 북부동(北部洞)
김해시의 북부에 있으며, 1979년 5월 1일 북부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1년 7월1일 시승격과 함께 대성동, 구산동, 삼계동을 합하여 북부동이라는 해정동을 만들고 22통으로 나누게 되었다.
◎ 불암동(佛岩洞)
활천면 불암리인데 선암(仙岩, 선바위)이라고도 했다. 영조때 부사 김영수의 필적을 새긴 선유대(仙遊臺)가 있었고, 유계(儒契)에서 세운 선유정(仙遊亭)도 있었다.
1914년 가락면 창만리와 하동면 수안리 각 1부를 병합하고 좌부면 불암리가 되었다. 1947년 6월 불암동으로 개칭하여 3구로 나누었다가 1981년 7월 시승격과 함께 지내동을 합하여 행정상으로 불암동이 되어 6통으로 나뉘었다.
1978년 2월 15일 강동지구가 부산시로 편입됨에 따라 김해교로서 부산 강서구와 경계를 접하게 되어 경상남도의 관문이 되었다.
◎ 삼계동(三溪洞)
옛날 북곡리(北谷里)였으며(경상남도지리지), 좌부면(左部面)의 삼거리로서 세갈래로 갈라지는 곳이며, 삼지원(三岐院)이 있었다. 뒤에 삼계리로 고치고 1914년 두곡리를 병합하였다. 지금도 부산,마산,밀양의 세방향으로 가는 국도의 분기점이 되며, 1950년 12월 육군공병학교가 옮겨온 뒤 마을의 모습이 점차로 바뀌었고, 1981년 7월1일 시승격과 함께 북부동으로 들어가 2통으로 나뉘어져 있다.
◎ 삼방동(三芳洞)
좌부면 삼방리가 1947년 7월 삼방동이 되고, 3구를 두었다가, 1981년 7월 시승격과 함께 삼안동에 들어가고 3통으로 나뉘었다. 윗삼방과 아래삼방으로 나뉜다.
김해성의 4충신중의 이대형과 그의 아들 우두, 그의 질녀인 열녀 이씨(주익창의 처), 이세사람의 출신지로 삼강의 꽃다운 인물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삼방이라고 한다.
<문화유적>
은하사(지방유형문화재 제238호), 신어산
◎ 삼안동(三安洞)
활천면의 북동쪽에 있으며, 1981년 7월 시승격과 함께 삼방동과 안동을 합하여 삼안동이 되었다.
◎ 상동면(上東面)
김해부의 동쪽 위쪽에 있는 면이며 20개리가 있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6개리(여차리, 감로리, 매리, 대감리, 우계리, 묵방리)가 되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감물야촌(甘勿也村)으로 나오며 고려때에는 감물야향(甘勿也鄕)이 있었다.
◎ 생림면(生林面)
김해군 내부에서 가장 높은 무척산(無隻山)이 있어 숲이 울창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또는 오서의 동쪽애 뭇새가 숲을 바라보는 형국(군마망림형群馬望林形)이 있다고 하고, 생철과 봉림을 합한 이름이기도 하다. 처음 생림면 7리였는데(사촌. 나전. 봉림. 금곡. 생철. 도요. 마사) 1914년 구역폐합으로 안양리, 생림리가 생겨 9리가되었으며 동시에 하북면 용덕리 일부와 밀양군 하남면 삼랑진 일부가 병합되었다.
1983년 2월15일 금곡리와 생림리의 장재부락이 이북면으로 이속되어 8개리가 되었다.
생림면은 조선후기에 마현(馬峴)고개의 북쪽은 이작(생철, 마사, 안양, 도요)이라고 하고, 그 아래쪽은 일작라고 하였는데, 일이작의 구분은 농지의 작황에 따라 나누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문화유적> : 무척산
◎ 서부동(西部洞)
김해시의 서부에 위치한 강동, 전하동, 흥동을 합하여 1981년 7월 시승격과 함께 신설되었다. 9통으로 나누었다
◎ 서상동(西上洞)
세종때 지리지(地理志)의 대기리(大岐里)이고 예종때 대기음리(大岐音里)였다가 도화동(桃花洞)으로 고쳤다. 좌부면(左部面)의 북내동(北內洞)이었다. 김해부의 행정 중심지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군청, 등기소, 금융조합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1914년 좌부면의 고서리와 능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북내동이 되었다.
1941년 11월 1일 일본인들이 대화정(大和町)으로 부르다가 1947년 6월 서상동으로 개칭하고 2구를 두었다. 1981년 7월 1일 시승격과 함께 회현동에 들어가 1~7통으로 나누었다.
◎ 수인사
운참사의 옛터에 경운재가 있다가 1956년 수인사를 세웠는데 5층석탑이 있다.
◎ 안동(安洞)
활천면때 마마(馬麻)와 안인(安仁)을 합하여 양리라고 하다가 1914년 좌부면 마마리가 되었다. 마마란 이름이 좋지 않다고 1947년 6월 안동으로 고쳐 4구를 두었다. 1968년부터 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되어 구획정리를 하였고 1981년 시승격과 함께 삼안동에 들어가 7통으로 나누게 되었다.
<문화유적>
초선대와 초선대마애불(지방유형문화재 제78호)
◎ 양장골
양중골 이라고도 하며 불암과 지내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양장(良將)은 양동(良洞)으로도 불리워 졌으며 그 서쪽 이수(梨樹)의 동쪽에는 흰학이 숲에서 춤추는 모양의 백학무림형의 명당이 있어 다자손(多子孫) 대부귀의의 땅이라고 한다.
◎ 어방동(漁防洞)
좌부면 어방리였다가 1914년 남역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1947년 어방동으로 고쳐 3구로 나누었다. 1976년 4월 김해읍의 동부출장소가 이곳에 설치되었다가 1981년 7월 시승격과 함께 활천동에 들어가 5통을 두었다.
어방동은 신어산의 영구암(靈龜庵)에서 내려와 초선대까지 배를 타고 갈 때 길목에 있는 마을로 이곳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이므로 어떤 도사가 와서 물고기를 잡지 못하도록 방(榜)을 써 붙인 곳이라고 전한다. 앞들은 마구들, 남쪽들은 서물들, 앞의 수로는 새 도랑이라 한다.
◎ 영웅이,영운이
신어천 상류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고 안개가 끼는 일이 많다. 일설에 산신령이 구름타고 내려와서 놀았다고 한다.
◎ 외동고개
일명 선지고개. 김해시와 주촌면과의 경계가 된다
◎ 외동(外洞)
우부면(右部面)의 외동리인데 내리(內里)의 바깥쪽이며 예전에는 거인리(居仁里)라 불렸고, 1914년 봉곡리를 병합하였다. 1947년 6월 외동으로 고쳐 2구로 나누었으며, 1981년 7월1일 시승격과 함께 내외동으로 행정상 통합되었다. 마을 앞의 정자나무인 은행은 도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 牛岩(우암)
소바위이며, 쇠바위(金岩)가 소바위가 됐다고 하기도 하고, 소(牛)같이 생긴 바위의 형상을 따서 우암(牛岩)으로 부르기도 한다.
◎ 이동(二洞)
칠산의 가장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一洞과 二洞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부면(右部面)의 이동리가 되었다가 1947년 6월 이동으로 고치고 2구로 나누었다. 1981년 7월 시승격과 함께 칠산동에 들어가 3통으로 나누었다.
◎ 임호산
유민산. 가조산. 호구산. 안민산. 봉명산. 임어산. 약산 등 여러가지 별칭이 있다. 대부분 호랑이 형상같다 하여 임호산이라 부르며 호랑이의 벌린 입이 너무 험악하다고 악산이라고도 부른다. 가락국 장유화상이 이 호랑이의 입이 되는 곳에 절을 세워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다고 안민산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전설에는 가락국 9대 겸지왕(족왕)때 여의낭자와 정혼한 황세장군을 왕이 유민공주의 부마로 삼았으므로 여의는 파혼의 고민끝에 죽고 황세 또한 여의를 그리다가 죽어 버렸다. 유민공주도 경운도사를 따라서 임호산에 들어가 입산수도했으므로 산 이름을 유민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 장유면(長有面)
가락국때 수로왕의 처남인 장유화상이 장유불반했다는 장유산, 장유사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고려시대에 장유촌, 유하촌이었다. 조선중기에 유등야면으로 고치고, 순조 10년(1810년) 유하면이 되었다. 고종 16년(1879) 다시 유등야면으로 돌아갔다가 22년(1885)에 장유면으로 개칭되었다.
고종 25년(1888) 장유면 8리(부곡, 유하, 내덕, 무계, 대청, 삼문, 신문, 관동)와 수남면 4리(율하, 장유, 응달, 수계)로 나누었다가 914년 합병되어 장유면이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김해서부의 중심지로서 버스노선과 우편국, 금융조합 등이 있었고 지금은 십여년 전부터 중앙을 관통하는 남해고속도로와 최근 창원터널이 개통되면서 부산, 김해, 장원, 마산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택지개발과 경상남도 복합유통단지 설치 등 여러 가지 대규모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 장유의 활기찬 미래가 펼쳐질 날이 멀지 않았다.
<문화유적>
유하패총(지방기념물 제45호), 무계리지석묘, 능동석인상석(지방유형문화재 제71호), 장유화상 사리탑(지방문화재자료 제31호), 장유계곡
◎ 전하동(田下洞)
우부면 전하리인데, 1914년 좌부면 강창리의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1947년 6월 전하동으로 개칭하고 2구로 나누었다.
밭아래라는 뜻으로 밭아리라 부르며, 해반천과 봉곡천가에 좋은 전답이 있기 때문이다. 1981년 7월 시승격과 함께 서부동에 들어가고 3통으로 나누었다.
◎ 주촌면(酒村面)
주주봉(酒主峰) 또는 주지봉(酒旨峰)아래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酒旨는 술말로서 술마을이 된다. 풍수지리설에도 옥으로 만든 술잔 모양(玉杯形)의 명당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주촌지(酒村池)가 나온다.
1914년 주촌면과 주서면을 합하여 주촌면이 되었다. 주서면은 산밖의 4개리였다.
<문화유적>
양동리 고분군(지방지정기념물 제136호), 천곡리 이팝나무
◎ 즐티
임호산에서 내려오는 대울로 즐티라는 풀이 많이 자생하였기에 생긴 이름이다.
◎ 지계천
못개 도량. 내동의 안들 복판에 있는 응수로이다.
◎ 지윽길
응동과의 경계이며, 함박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이다.
◎ 지내동(池內洞)
좌부면 지내리였다가 1947년 6월 지내동이 되었다. 그때 2구로 나누었는데, 1981년 7월 시승격과 함께 행정상으로 불암동에 들어가 6통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내라함은 못의 안쪽에 있는 마을인데, 공단이 안동에 생긴 뒤 안동과의 사이에 앞도랑이 새로 생겨 경계가 되었다.
◎ 진례면(進禮面)
예종(睿宗)때의 경상도지리지(1469)에 의하면 부서 진례촌(府西 進禮村)으로 나와 있었다. 가락국때 수로왕이 왕자를 진례성주(進禮城主)로 봉했다고 하고, 통일신라 말에는 김인광(金仁匡)이 진례성 제군사(諸軍事)가 되어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봉림사의 진경대사탑비에 의하면 진성여왕때 김율희가 진례성 제군사였다고 나와 있다. 이를 보면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하나의 작은 고을을 이룩하고 말기에는 호족이 자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예종때의 경상도지리지(1469)에는 부서진례촌으로 나와 있다.
조선시대에는 청천면(靑川面)으로서 청내라 속칭하였다. 진례면 열두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두 청천(時川)에 모여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열두청내'라고 불렸다. 청천소모진(時川召募鎭)은 7진관(鎭管)의 병마도호(兵馬都護)가 습열(習閱)하던 곳으로 지금의 예비군 훈련장 같은 곳이 창원으로 부터 이곳에 이설되어 뒤에 웅천(지금 웅동면 청천)으로 옮겨갔다. (광해군 8년부터 효종 7년까지 이곳에 있었음. 즉 1616 - 1656사이임)
1894년 갑오경장때 진례면 5리(청천. 시례. 송정. 초전. 신안)와 율리면(栗里) 9리(산본 .신월. 송현. 담안. 고모. 고령. 관동. 성버. 개동)로 나누었다가 1914년에 중북(中北)면의 의전리 일부와 죽고리 일부를 합병하여 진례면이 되었다.
◎ 진영읍(進永邑)
1914년 3월1일 하계면 6리(하계, 여래, 우동, 진영, 방동, 좌곤)와 중북면 6리(신룡, 내룔, 설창, 죽곡, 의전, 본산) 및 상북면 계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계면으로 개칭하고 설창리에 면소를 두었다. 면소인 설창리는 현종 7년(1666년) 국가의 납세물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고, 인근 화포천까지 강물이 밀려왔던 곳이다.
1928년 4월1일 진영읍으로 개칭하고 면소도 진영리로 이전하였다. 1942년 10월1일 읍으로 승격, 현재 13리 45마을이다.
현재의 읍소재지인 여래리는 옛날 절터가 있었던 곳으로 풍수설에 따라 군사들 진영(陣營)의 형국이며, 금병산을 상제봉조형(上帝奉詔形)으로 보고, 여래리 동쪽을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으로 생각하여 주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1905년 5월13일 마산선철도가 개통되어 진영역이 생기고, 김해서부의 교통의 요지, 농산물집산지가 되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산마루에 선달바우가 있다.
<문화유적>
봉화산마애불(지방지정문화재 제40호)
◎ 칠산동(七山洞)
김해의 서부에 있으며, 조만강(潮滿江)을 경계로 하여 김해시 장유면과 인접하고 있다.칠산은 일곱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치봉산이라고 부르며, 그 일곱 봉우리의 밑마다 마을과 우물이 있으며, 화목리의 앞 들에는 일곱개의 둔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경지정리하여 완전히 없어졌다.
김해부 칠산면이었다가 1914년 우부면에 병합되어 김해읍때까지 있다가 1981년 7월1일 시승격과 함께 풍류동, 화목동, 명법동, 이동을 합하여 칠산동이 되었다.
◎ 평지마을
평전마을이라고 하며, 옛날의 평전리로서 내동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평지말
내동 2구, 동네가 비록 산 바로 아래에 있으나 대체로 평온한 마을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 풍류동(豊留洞)
옛날 풍류리이며, 칠산의 북쪽에 위치하여 바람이 세게 불어오기 때문에 생긴 지명인 듯하다. 일설에는 가락국시대의 놀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풍류(風流)를 즐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1947년 6월 바람에 날리는 것을 풍족하게 머물라고 유유동(留留洞)으로 고쳤다.
◎ 한림면(翰林面)
김해부의 북쪽에 있는 상북면과 하북면이 1914년 병합하여 이북면이 되었다. 이북면 4리(가동, 가산, 장방, 시산)와 하북면 6리(신천, 용덕, 명동, 안하, 퇴래, 병동)을 하나로 합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생림면으로부터 금곡리 및 생림리 일부(장재)를 편입시켜 모두 12리 43개부락이 되었다. 1984년 1월 1일 한림면으로 명칭을 개정하였다.
<문화유적>>
퇴래리고분군,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185호)
◎ 호계천
현재 부원 8통과 부원 9통을 관통해 지나며 북쪽으로는 부원 3통과 부원 12통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보통 남문 밖 다리라고 부른다. 1933년 국도 개통과 함께 가설되어 오랫동안 김해읍의 입구가 되어 왔다.
남쪽은 강창포(江倉浦)에 이르고, 세월이 오래되어 모래가 쌓이므로 정조 14년(1790년)에는 내를 곧게 만들었다.
순조(純祖) 31년(1831년) 직천(直川)은 읍기(邑基)에 해롭다고 부사 권복(權馥)이 또 다시 곡천(曲川)으로 고쳤다고 한다.
◎ 화티바위
무점 뒤에 있는 바위로서 화투모양으로 생겼다.
◎ 화목동(花木洞)
동네 가운데 있는 우물가에 큰 백일홍 고목이 서 있었기 때문에 꽃나무 샘이라 부르고, 이 때문에 화목리가 되었으며, 이 꽃나무는 6.25동란 무렵에 없어졌다.
1947년 6월 화목리로 고쳐 4개부락으로 나뉘었다.
◎ 활천동(活川洞)
김해부 활천면이었다가 1914년 좌부면에 병합되었고, 1918년 김해면에 병합되고, 1981년 7월 1일 시승격과 함께 옛날의 활천면의 서부인 삼정동, 어방동을 합하여 활천동이 되어 10통으로 나누었으며, 활천은 궁천(弓川)으로써 삼방동 뒤의 활뿌리(弓根)에서 발원처요 활처럼 휘어져 흘러 내려 신어천이 되고, 서낙동강에 합류된다.
◎ 회현동(會峴洞)
가락국 시대의 정절(貞節)의 여인 여의(如意)의 이름을 따서 여우고개라 불렀는데 이것이 여우고개로 바뀌어 호현(狐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다시 한자로 회현리(會峴里)리라 부르게 되었고, 우부면(右部面)의 회현리(會峴里)였는데 1914년 고서리(古西里)와 강창리(江倉里) 일부를 병합하였다. 1981년 7월 1일 김해시 승격과 함께 서상동, 봉황동을 합하여 행정상으로 회현동이라 하고 17통을 두고 있다.
◎ 흥동(興洞)
임호산(林虎山-流民山,加助山)의 남쪽에 있으며, 흥부암(興府庵), 흥복원(興福院) 등이 있었다. 1914년 화목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우부면 흥동리가 되었다가 1947년 6월 흥동으로 고쳐 4구로 나누었다가 1981년 시승격과 함께 서부동이 되고 4통을 두었다.
<문화유적>
어서각(지방문화재자료 제30호), 선조국문교서(보물 제951호)
첫댓글 형님덕분에 김해토박이보다 김해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네요.. 형님이 올리신 글 읽고 가끔씩 김해토박이들에게 아는척도 해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한번에 못 읽고 두번 나눠 읽어 보았네요.. 우째 이리도 모르는 것이 없으실까? 언제나 좋은 교훈적 글 고맙습니다. ^0^
오아시스는 역시 우리의 목마름을 풀어주네요. 김해에 대해 더욱 잘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숙제 잘했어요!!!김해에 더잘알았구요.. 이사 온지..몇일안되서요.ㅎㅎ
학교과제로 '김해지역 지역명칭 조사' 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회수가 갑자기 급상승했네요...
활천성당 카페가 학생들 과제작성에 도움이 되었다니 참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