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는 업장소멸(業障消滅)
우리 불자들은 기도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 기도는 ‘마음을 비우고 해야 한다.’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소원을 가져서는 안 된다.’라는 등의 말을 자주 듣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급한 소원이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또, 일체중생을 위한 기도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해탈과 관련이 있으니,
따지고 보면 자신을 위하지 않는 기도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도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서 기도는 비는 것이다. 도와 달라고 비는 것이 기도이다.
어떤 사람이든 힘이 있고 자신이 있을 때는 신심(信心), 곧 자기 자신의 의지로써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나약하고 자신이 없을 때는 의지할 것이 있어야 한다.
곧 신앙(信仰)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신앙이다. 신심이 아니라 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할 때는 매달려야 한다.
내 마음대로도 남의 도움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불보살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지하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기도(祈禱)이다.
1) 간절한 기도
기도할 때는 지극한 마음, 간절한 마음 하나면 족하다.
복잡한 형식이나 고차원적인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간절하게 부처님을 생각하고 지극한 마음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더 쉽게 이야기해 보자. 간절하다는 것은 마음을 한결같이 갖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소원이 있기 마련이고, 그 소원을 이룩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뭉쳐야 한다.
“잘 되게 하소서. 잘 되게 해주소서.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마음을 하나로 모아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신라의 원효 스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이야기하면서,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불 생각을 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져도 먹을 생각을 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얼어 죽든 굶어 죽든 상관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밥 생각, 불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하다 보면 처음 얼마 동안은 마음이 잘 모이지만,
조금 지나면 갖가지 잡념들이 더욱 많이 일어나게 된다.
몸이 고단하다는 생각, 내가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
공연한 기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이 기도를 망쳐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억지로 없애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없애려고 하면 더욱더 일어나는 것이 번뇌 망상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회의가 생기고 잡념이 일어나는 고비를 만나면,
거듭 소원을 곧게 세우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빠져들게 되고
잠깐이라도 깊은 기도 삼매에 빠져들면
불보살의 가피력(加被力)을 입어 소원을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간절한 기도 가피의 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경북 영천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50대 초반의 처사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수년 전, 그 처사는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끼며 굴신조차 할 수 없는 허리 병에 걸리고 말았다.
처사는 들것에 실려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고,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다니며 침도 맞고 한약도 달여 먹었지만 전혀 효험이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구니 스님이 된 처사의 여동생이 찾아왔고,
여동생은 관세음보살 기도를 할 것을 권하였다.
“오라버니, 관세음보살을 지성껏 부르면 죽을병도 능히 고칩니다.
그까짓 허리 병 하나 못 고치겠습니까?
누워서 특별히 할 일도 없을 것이니, ‘노는 입에 염불한다.’라고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외우십시오.”
얼마 동안 처사는 동생이 시키는 대로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그러나 깊은 믿음이 없었던 그는 열심히 외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영영 불구자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염불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져 버렸다.
‘관세음보살을 외운다고 어찌 허리 병이 나을까. 보냐? 나도 참 바보지.
일은 고사하고 걷지도 못하고 방구석에만 누워있어야 하는 이내 신세…
아, 차라리 콱 죽어버리자.’ 그는 가족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도 못 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먹고 죽어버리게 농약 가져오너라. 빨리 가져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족들을 향해 ‘농약 먹고 죽어버리겠다.’라고 소리치자,
견디다 못한 가족들은 다시 동생 비구니 스님을 청하였다.
“오라버니,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 보세요.
틀림없이 허리가 나아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병원에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고쳐?
여러 소리 말고 농약이나 가져 와! 콱 죽어버리게.”
“그렇게 농약 먹고 발광하다 죽고 싶소?”
“그래, 이제 사는 것도 지겹다. 빨리 농약이나 가져오너라.”
헛간으로 뛰어간 동생 비구니는 농약 한 바가지를 푹 퍼서 가지고 와서
오라버니의 입 앞에 갖다 대며 소리쳤다.
“자. 입을 벌려요. 내가 부어 넣어 줄 테니까.”
“…”
“뭘 망설여요? ‘아-’ 하라는데…”
처사는 여동생의 당돌한 행동에 깜짝 놀라 입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농약을 먹지 않으려거든 지금부터 관세음보살을 부지런히 외우세요.
부지런히 외어 꿈속에서도 관세음보살을 외우게 되면,
묘한 약이 생기기도 하고 용한 의사를 만나 병이 금방 낫게 될 것입니다.”
여동생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처사는 그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소리 내어 관세음보살을 찾기가 쑥스러워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念)-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7일째 되던 날 저녁, 처사는 문득 꿈을 꾸었다.
처사가 사는 동네에 의사 한 명과 세 명의 간호사가 갑자기 찾아와서,
“악성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모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라며 동네 사람 모두를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처사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의사 앞으로 가자,
의사는 다른 사람은 거들떠볼 생각도 안 하고 처사를 끌어당겨 청진기로 진찰하는 것이었다.
“보통 주사로는 당신 병을 고칠 수가 없소. 저 침대 위에 누우시오.”
처사가 침대 위에 눕기 바쁘게 의사는 맥주병만 한 큰 주사기를 가져와서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허리에 꽉 찌르는 것이었다.
“아야!”
처사는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고, 꿈에서 깨어나서 보니 자신이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불편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몸을 뒤척이는 거조차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구제 불능의 허리 병이 완전히 나아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처사가 조급증과 무기력 속에 잠겼을 때
영영 기도를 그만두었다면 어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을 수 있었겠는가?
여동생 스님의 적절한 방편으로 처사는 관세음보살을 찾는 기도를 마음속으로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한 허리 병이 완쾌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수많은 생각들을 잘 단속하여야 한다.
오히려 잡생각이 일어날수록 마음을 굳게 다져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나를 속일 불보살은 없다.’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더욱 부지런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불자여, 요긴하게 마음에 새겨라. 기도 성취의 비결이 ‘간절 절(切)’, 이 한 글자 속에 있음을!
물체의 형상이 길면 그림자도 길고 소리가 크면 메아리도 크듯이,
내가 드리는 정성이 크면 클수록 불보살의 감응(感應)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간절 절(切)’, 이 한 글자가 온몸에 사무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삼매에 빠져들어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력을 크게 입게 될 것이다.
부디 지극한 마음, 간절하고 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하기를 당부드린다.
2) 요행수를 바라지 말라
둘째는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자력(自力)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불자 중에는 ‘기도하기가 어렵다’라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런데 그 까닭이 기도법을 몰라서라기보다는 마음의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곧 기도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수십 년을 절에 다닌 신도조차 요행수를 바라며 기도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도에는 요행수가 통하지 않는다. 태양은 어느 곳에나 평등하게 빛을 준다.
그리고 그림자는 그 빛을 받는 물체의 모습과 비례한다.
같은 태양 빛을 받는 사물일지라도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가 바르고,
형상이 길면 그림자가 길며, 형상이 짧으면 그림자가 짧은 법이다.
이처럼 불보살의 광명정대한 자비는 언제나 중생들의 정성과 함께 할 뿐,
요행을 바라는 마음과는 결코 함께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요행수를 바라고 기도를 하는 일이 많다.
심지어 “측신(厠神)-에게 기도하면 재수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변소에까지 밥을 가져가서 기도하고,
‘아무개가 족집게’라는 소문을 들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곳을 찾아가 점을 보기까지 한다.
사실은 신(神)이 내린 용한 점쟁이라 할지라도 ‘내’가 아는 것 이상은 알지 못한다.
하다못해 ‘내’가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알고 있는 것이라야지,
점을 보러 가는 ‘내’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알아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나’도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냥 넘겨짚어서 하는 말일뿐이다.
그러므로 헛된 것에 의지하여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불자라면 불보살의 광명정대한 자비에 의지하여 자기의 정성을 다 바치는 자력의 기도를 해야만 한다.
“점쟁이가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기도를 한번 해볼까?”
“내가 절에다 많은 돈을 시주 했으니까, 부처님께서 봐주시겠지.”
이렇게 요행수를 바라는 기도는 마음에 잔뜩 때를 끼게 하고 언젠가는 사도(邪道)로 빠져들게 한다.
나아가 진실한 불법은 10만 8천 리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업장(業障)이 소멸하기는커녕 더욱 두터워질 뿐이다.
정녕 지나치게 타력(他力)에 의존하여 자기 속까지 빼주게 되면
올바른 신심(信心)을 회복해 가지기가 매우 어렵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도리를 분명히 알아서 요행수를 떠난 자력의 기도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만 하면 업장은 저절로 소멸하고 복은 저절로 찾아 들게 되는 것이다.
불자들이여, 부디 명심하라. 부처님을 돌로 만들었든 쇠로 만들었든
나무로 만들었든 기도(祈禱) 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도하는 장소가 사찰이건 집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지극정성을 드리면 모든 업장이 소멸하고 복은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부디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신심 있는 기도 하라.
신심 있는 기도를 할 때 환희심이 샘솟고, 환희심이 생기면 신심도 더욱 확고해진다.
아울러 환희심이 가득한 곳에는 괴로움이 있을 수 없고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평안함이 깃들게 되는 것이다.
신심 있는 자력의 기도. 이 기도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자기 능력에 맞추어서 일심지성(一心至誠)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면 되는 것이다.
요행수를 떨쳐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모름지기 요행수를 버리고 참된 '나'의 신심을 다 바치는 기도를 하라.
이것이야말로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비결이요,
기도를 통하여 해탈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요긴한 가르침이다.
- 일타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