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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
루카 1,26-38
나를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게 해 주는 원죄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인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에 다 들어있습니다.
은총은 죄로 끊깁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바치지 않으려 하는 이에게 은총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를 거절하셨습니다.
어떤 아들이 부모가 주는 돈으로 향락과 도박을 즐기는데 부모를 위해 감사의 선물을 할 수 있을까요?
이미 자아가 커져서 그것밖에 안 주는 부모를 원망합니다.
부모를 살해한 박한상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에게 부모가 준 돈은 은총이 아니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은총 중의 은총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시려면 그에 합당한 그릇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신비로운 그릇이 성모 마리아셨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처럼 뱀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라야 그 은총이 독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죄에 물든 인간에게는 아드님을 주실 수 없으셨고 오직 성모 마리아께만 아드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미리 성모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나 합당하지 않은 이에게 특은을 주는 경우가 있을까요? 하느님은 정의이십니다.
선물을 받을만한 이에게 그것을 주십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께서 아무런 공로 없이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 또한 하느님을 공의롭지 못한 분으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성모님은 절대 뱀과 대화하여 자신을 그의 비서가 되게 하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성모님은 뱀을 밟고 하느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성모님을 닮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도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는 안드레아 ‘앤디’ 삭스를 중심으로 한 영화입니다.
앤디는 언론인이 되고자 최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녀는 권위 있는 패션 잡지 ‘런웨이’의 강력하고 까다로운 편집장인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보조 비서로 취직합니다.
미란다의 정식 비서는 에밀리입니다.
그녀는 촌스러운 앤디를 비웃습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앤디는 다소 순진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한 젊은 여성으로 묘사되며, 고급 패션 세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저널리즘 산업에서 그녀에게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미란다 프리스틀리 밑에서 일을 맡습니다.
처음에 앤디는 까다롭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미란다의 작업과 기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앤디는 자신의 역할에 적응합니다. 그녀는 더욱 멋지게 옷을 입기 시작하고 자신의 직업에서 겪는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자신감을 얻습니다.
그녀의 헌신과 노력은 미란다의 존경을 얻지만 이러한 변화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앤디의 개인적인 관계는 특히 그녀의 직업이 그녀의 삶을 소모함에 따라 그녀의 남자친구, 친구, 가족과의 관계가 틀어집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파리 패션 위크에서 일어납니다. 비서 에밀리는 파리 패션 위크에서 미란다를 보조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란다는 에밀리 대신 보조 비서인 앤디를 선택합니다.
앤디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에밀리가 그렇게 소원하던 파리 패션 위크를 따라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앤디는 미란다를 편집장에서 교체하려는 음모에 대해 알게 됩니다.
긴장된 관계에도 불구하고 앤디는 미란다에게 경고합니다.
미란다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동료인 나이젤을 희생시킵니다.
이러한 배신행위와 자신의 직업이 그녀를 미란다와 닮아가게 만들고 있다는 깨달음은 그녀가 자신의 가치와 야망을 재평가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미란다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앤디도 에밀리에게 그렇게 한 것을 들먹이며 그녀가 자신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앤디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란다는 결국 누구나 다 자신과 같은
지위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앤디는 직장을 그만두고 미란다와 ‘런웨이’의 세계를 떠납니다.
그녀는 저널리즘의 뿌리로 돌아가 신문사에 지원하고 일자리를 얻습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친구들, 가족들과의 관계가 다시 정상화됩니다.
아른힐 레우뱅은 자신의 책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비서’입니다.
자아거나 하느님입니다.
자아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라고 하고
하느님은 이웃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 선택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성모님은 단 한 번도 자아의 비서가 된 일이 없으시고 그러지도 않을 분이십니다.
이것을 아시고 처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누구의 비서가 되어 ‘순종’하느냐만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해 ‘의미 있는 일’을 시키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돈을 내어줘야 하고, 육체를 절제해야 하며, 겸손해져야 합니다.
자아와 반대 일을 시키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원죄를 없애기 위해 의미 있는 일을 시키셨습니다(루카 5,1-11 참조).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크게 반대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며 자기 뜻을 접었습니다. 자기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려는 생각을 버리고 스승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원죄가 사라지자 은총이 들어옵니다. 수많은 물고기가 잡히자 베드로는 겁을 집어먹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결국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실 때, 깊은 데는 바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에고(자아: ego)의 생각을 수장시키는 곳입니다.
자아는 하느님의 말씀, 곧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명할 때 수장당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사시게 됩니다.
원죄를 없애는 방법은 이웃사랑의 계명에 순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
루카 1,26-38
주님께서 탄생하실 자리인 성모님의 태중은 품위 있고, 고귀하고, 정결해야 마땅합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지만, 큼직한 다이아몬드나 루비가 박힌 반지, 두툼한 금목걸이나 팔찌 같은 귀금속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관할까요?
걸레에 둘둘 말아 창고나 마루 밑에 던져놓지 않을 것입니다.
값나가고 귀한 물건이기에 시건 장치가 잘 되어 있는 보석함 속에 고이 보관할 것입니다.
무겁고 튼튼한 금고 속에 넣어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값나가는 보물도 그리 애지중지 귀히 여기는데,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님께서
열 달 남짓 거처하실 귀한 자리인 성모님은 보석함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품위 있고,
고귀하고, 정결해야 마땅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실 사다리로서 가장 순수하고 거룩한 존재,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신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가장 탁월한 선택이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죄와는 전혀 상관없으신 예수님께서 당신이 잉태되실 가장 적합한 자리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태중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의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 왔고,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다음 주에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아니면 존경하는 총장 신부님께서 저희 수도회를
방문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어디에다 모실 것입니까?
그 특별한 손님들을 아무 방에나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특실, 가장 넓고 쾌적한 방에 모실 것입니다.
물론 몇 사람이 며칠간 달라붙어 침실이며 화장실이며, 번쩍번쩍 광채가 날 정도로 깨끗이 청소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특별한 손님들에 대한 합당한 예우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바라보니 조금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교황님이나 총장님을 위한 거처 마련에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시는 과정에서 그분의 거처는 너무나도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의 합당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자 구원계획의 성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강론>
(2023. 12. 8. 금)(루카 1,26-38)
<우리도 성모님처럼>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라는 교리의 출발점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즉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고, 하느님이셨던 분인데(요한 1,1),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요한 1,14).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인류 구원 사업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그 ‘길’이 되실 분을, 또는 ‘통로’가 되실 분을 미리 선택하시고 뽑으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창조 이전의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 그대로 ‘예수님을 위한 길’을, 또는 ‘통로’를 하느님께서 마련하셨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도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가운데 일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와서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할 때 했던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하신 그 일들을 확인해 준 증언이기도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0-32).”
“은총이 가득한 이” 라는 말은, 성모님께서 처음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상태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음을 나타내는데,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셨기 때문에 당연히 ‘원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라는 말은, “은총이 가득한 이” 라는 말과 뜻은 같고 표현만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은, 성모님 쪽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말이 무슨 뜻인가?
그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는가?”, 또는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바로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을 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18).
이 말은, “저와 제 아내는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니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의 경우를 보면, 첫 질문이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입니다(루카 1,34).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즈카르야가 한 말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뜻이 다릅니다.
이 말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동정녀인 제가 아기를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뜻이고, 지금 요셉과 약혼 중이기 때문에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천사가 아기 잉태 과정을 설명하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35-37).>
성모님은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왜 내가 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같은 의문은 모두 건너뛰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먼저 물었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하는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또 그 일들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로 이미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성모님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단순하게 믿는
믿음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성모님의 질문과 천사의 답변 다음에 ‘위대한 응답과 순종의 말씀’이 나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은, 이해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마치 종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믿고 순종하겠다는 응답입니다.
이 응답으로 온 인류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그 일의 완성은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한평생 흔들림 없이 ‘응답과 순종의 삶’을 사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과 실행이 성모님 한 분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일도
‘한처음’부터 계획하고 실행하신 일입니다.
그 선택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모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끝까지 충실하게 ‘응답과 순종의 삶’을 살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되어서,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