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산을 그리다(7, 끝)-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
155. 사군강산삼선수석첩(四郡江山參僊水石帖), 도화동(桃花洞)

이방운(李昉運, 1761~1823 이후), 조선 1802~1803년, 16면 첩,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
彩), 각 32.5×52.0cm, 국민대학교박물관
1802년 가을, 청풍 부사 안숙(安叔)은 청풍 도화동과 관아, 영춘 북벽, 단양의 명승지, 제천
의 수렴폭포와 의림지 등 사군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안숙은 조영경(趙榮慶, 1742~1809)
의 자이다. 그는 좋은 경치를 보면 자신의 감흥을 절구, 율시, 고체시의 운율에 맞추어 해,
전, 행, 초 등 다양한 서체로 표현하였다. 사군 명승지 유람을 계기로 그는 기야(箕埜) 이방
운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1803년 정월, 완성된 그림을 본 김양지(金養之)가 제작 경
위 등을 발문으로 남김으로써 시, 서, 화 삼절의 서화첩이 완성되었다.
이방운은 인척인 심사정과 강세황, 정선 등이 구사한 남종문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화첩의
일부에서도 확인된다. <도화동>에서는 소략한 필치로 산수를 즐기는 시인 묵객들의 모습을
그리고 능선을 따라 조그마한 미점(米點)을 가득 찍어 산세를 표현했지만 사실성과는 거리
가 있다. 이 화첩은 당시 지방관에 부임한 사대부들의 생활상이나 유람문화를 보여주는 실경
산수화로서 충청북도의 명승들이 연작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문동수)
156. 사군강산삼선수석첩(四郡江山參僊水石帖), 왼쪽은 수렴(水簾), 오른쪽은 의림지(義林池)

이방운(李昉運, 1761~1823 이후), 조선 1802~1803년, 16면 첩,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
彩), 각 32.5×52.0cm, 국민대학교박물관
왼쪽 수렴(水簾)의 제시(題詩)이다.
큰 명성 오히려 믿을 수가 없었는데 첫눈에 바라보니 명불허전이라. 아래로 내려가니 금석이
열리면서 높은 주렴(폭포수)이 하늘 중간쯤 걸려 있네. 옥구슬 같은 물방울 질풍처럼 흩어지
니 구슬 먹줄이 연달아 비껴 떨어지는 듯하네. 홀연 불꽃같은 삼복더위 생각하면서 폭포 앞
에서 이마를 드러내고 잤노라.
오른쪽 의림지(義林池)의 제시(題詩)이다.
水蘭山菊惜香衰 수란과 산국화 향기가 시드는 것 애석하게 여겨
小棹沿洄百頃遲 조그만 배 타고 넓은 강을 더디게 올라가네
自有渚涯成器局 저절로 물가의 형세가 이루어졌으니
誰云澇旱被盈虧 누가 장마와 가뭄으로 차고 줄어든다고 말하겠는가?
雲端不識源窮處 구름 저 멀리 물줄기 끝나는 곳 알지 못하는데
壑底惟看瀑始垂 골짜기 밑에는 폭포수 떨어지는 것만 보일 뿐이네
高唱大堤歌一曲 방죽노래 한 곡조를 큰 소리로 부르니
跳魚飛鴨各天姿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나는 오리는 천연스런 모습이어라
157. 학산묵희첩(鶴山墨戱帖), 방화굴(方化窟)

윤제홍(尹濟弘, 1764~1840 이후), 조선 1812년, 74면 첩, 종이에 먹(紙本水墨),
각 26.2×48.0cm
윤제홍은 자신이 돌아본 명승지를 기억 속에 담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승경에서 받은 인상을
구체화시키고 파격적인 구도로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였다. <방화굴>은 동두천의
소요산, 즉 지금의 자재암(自在庵) 전면에 있는 석굴(원효굴)과 원효샘, 폭포를 묘사한 것이
다. 소요사(逍遙寺) 건물은 생략되어 있어 1812년 이전에 폐사된 것과 일치한다.(문동수)
逍遙寺東 方化窟 景道寫
(소요사 동쪽에 있는 방화굴. 경도가 그리다)
158. 옥순봉도(玉筍峰圖)

윤제홍(尹濟弘, 1764~1840 이후), 조선 1833년, 축, 종이에 먹(紙本水墨),
각 67.0×45.5cm, 삼성미술관
이 그림은 충청도 단양의 명승 옥순봉을 그린 것이다.
1823년 청풍부사로 부임한 윤재홍은 옥순봉을 자주 유람하였다.
제발(題跋)이다.
余每游玉筍峰下 내가 늘 옥순봉 아래에서 노닐 때마다
切恨壁底无茅亭 절벽 아래에서 정자가 없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는데
近日得訪李凌壺帖 근래에 찾아가서 얻은 이능호(이인상)의 화첩을 보니
卽此本倘條余洗恨乎 곧 이 그림이 빼어나서 내 한을 씻어주는구나
159. 해악팔경도(海嶽八景圖), 보덕암(普德庵)

조정규(趙廷奎, 1791~1860 이후), 조선 1860년, 액자, 비단에 먹(絹本水墨),
각 108.3×48.0cm, 개인 소장
조정규는 어해(魚蟹)를 비롯하여 산수, 인물 등을 잘 그려 명성이 높았던 19세기 중반의 대
표적인 화원화가이다. 현존작을 보면 어해에서 장한종(張漢宗, 1768~1815 이후)의 화풍을
이어받고, 산수에서는 정선과 김홍도의 화풍을 발전시켰는데, 그 참신하고 이색적인 분위기
에서 동시기 활동하던 김하종, 엄치욱과 공통점을 갖는다.(김울림)
보덕암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부속 암자이다. 고구려 시대에 세워졌으며 조선왕실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고 귀중한 유물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건물은 167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절벽에 높게 걸린 암자로 그 아래에 구리쇠 기둥 하나를 받쳐 놓았는데 그 길이
가 약 7m이고, 절벽의 높이는 20m가 넘는다. 구리기둥 위에는 사가집ㆍ배집ㆍ합각지붕을
섞어 지은 3층 암자를 앉혔다. 집안에 들어서면 뒷벽이 절벽인데 그 한가운데에 보덕굴이 뚫
려있다. 보덕암은 황해도 장수산에 있는 현암(懸菴)과 더불어 절벽에 의지하여 지은 희귀하
고도 특이한 다락 건물로 구리기둥이 3층이나 되는 집을 떠받들고 있는 건축기교와 전통적
건축양식을 보기 좋게 배합한 점이 특징이다.
161. 해악팔경도(海嶽八景圖), 해금강(海金剛)

조정규(趙廷奎, 1791~1860 이후), 조선 1860년, 액자, 비단에 먹(絹本水墨),
각 108.3×48.0cm, 개인 소장
한 물이 하늘과 잇닿아 만 리에 펼쳐지니 一水連天萬里長
외로운 돛단배 곧바로 해금강을 향하네 孤帆直指海金剛
층층이 쌓인 옥순봉(玉笋峯)은 기이함을 다투고 層層玉笋爭奇怪
점점이 구름 낀 산은 아득히 보이누나 點點雲鬟見渺茫
와황이 달군 돌 남겨 놓은 것 알겠으니 知是媧皇留鍊石
하백이 바다를 바라보고 탄식한 일과 같구나 還如河伯歎望洋
바람 타고 부상 아래에 정박하여 乘風欲泊扶桑下
여섯 용을 채찍질하여 태양을 받들게 하고 싶네 鞭起六龍擎太陽
――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 1776~1852), 「배를 띄워 해금강을 향하면서 근옹의 시에
차운하다(泛舟向海金剛次近翁韻)」
162. 해악팔경도(海嶽八景圖), 삼일포(三日浦)

조정규(趙廷奎, 1791~1860 이후), 조선 1860년, 액자, 비단에 먹(絹本水墨),
각 108.3×48.0cm, 개인 소장
서른여섯 갠 봉우리 고둥과 나방 오밀조밀 晴峯六六斂螺蛾
잔잔한 물결과 장난치는 쌍쌍의 흰 물새들 白鳥雙雙弄鏡波
삼 일 동안 노닐고는 아직도 다시 안 찾으니 三日仙遊猶不再
십주에 멋진 곳 많다는 걸 새로이 깨닫겠네 十洲佳處始知多
―― 간이 최립(簡易 崔岦, 1539~1612), 「삼일포(三日浦)」
163.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부분

조중묵(趙重默, 생몰년 미상, 19세기 활동), 조선 1868년, 10폭 병풍, 비단에 엷은 색(絹本
淡彩), 1폭, 10폭 각 127.9×34.1cm, 2~9폭 각 128.0×36.5cm, 국립중앙박물관
홍제원 일대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북한산을 대화면에 포착한 실경산수이다. 모두 열 폭으로
구성된 연폭 형식의 병풍으로, 제1폭과 제10폭은 작품의 제작경위를 밝힌 발문이다. 인왕산
서쪽의 산세와 도로, 원경의 북한산 봉우리들이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추모현(追慕峴,
무악재), 홍제원, 미륵당 등 주요 지점들은 그림과 함께 지명을 표기하였다.
조중묵의 호는 운계(雲溪), 자산(蔗山) 등이며, 현종, 고종 대에 여러 차례 어진화사로 참여
할 정도로 초상화에 뛰어났다. 산수화에서는 다소 섬약하고 형식적인 남종문인화풍을 구사
했는데, 이 그림에서는 실경의 산세를 사실적이고 견고한 형태로 드러내었다.
발문에 따르면 박경빈(朴景彬)이 부친의 묘소를 인왕산 자락의 명당으로 이장한 후, 무덤과
주변 경관을 그림으로 그려 늘 가까이에서 문안을 올리려는 뜻을 담아 병풍을 제작하게 하였
다. 제5폭 중앙에 무덤을 향해 산을 오르는 선비가 박경빈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부친의 묘소 위치를 후세에 전하려는 기록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실경의 장대한 산수미를
병풍 형식으로 표현한 흥미로운 작품이다.(이재호)
164.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부분

165. 석파정도(石坡亭圖)

이한철(李漢喆, 1808~1880), 조선 1860년경, 8폭 병풍, 면에 색(絹本彩色),
141.0×251.5cm,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멀리 우뚝 솟은 북한산을 배경으로 인왕산의 자락에 잇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서(別墅),
즉 석파정을 그린 것이다. 이 별서의 원래 주인은 철종 때의 영의정을 역임한 권세가 김흥근
(金興根, 1796~1870)이었다. 그는 이곳을 물줄기 세 곳이 모인 절경이라는 뜻에서 ‘삼계동
(三溪洞)’이라 이름 지은 후 줄곧 삼계정으로 불려왔다. 이것을 몰수한 이하응이 1866년에
서 1873년 사이 이한철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문동수)
166. 구룡폭포(九龍瀑布)
첫댓글 청풍이 옛날엔 큰고을이었나보네요. 도화동으로 한번 줄그어 가보고 싶군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