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 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우리는 창세기에서 가장 안전하고 경건한 신앙의 초보를 배웁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 이루심은 하나님의 안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의 무동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①그것은 다만 더 이상 창조역사를 계속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② 그것은 창조된 모든 것을 유지하심과 기뻐하심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안식제도가 나옵니다. 사람의 안식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날에 일하지 않는 것도 그 목적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동작 상태를 경건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성수는 기독교의 사회적 공헌 중 하나입니다. 불신자들까지도 누리도록 확대된 은혜를 신자들이 못 누리는 것은 안타까움 중에 하나입니다.
1. 본문 1절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입니다.
2장 1, 2, 3절은 1장에 속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창조에 대해서 이미 언급된 역사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제정하신 것을 설명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모세께서는 6일 동안 하늘과 땅의 구조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요약해서 되풀이합니다. 1장 전반부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세상은 하늘과 땅,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만물” 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은 세상이 모든 장식물을 공급받았다는 것입니다. 서론은 세상이 순식간에 형성되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배격하기에 충분합니다. 본문은 마지막 일이 6일째 되는 날에 모두 끝났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이라는 표현 대신에 ‘풍요함’ 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모세께서는 마치 집집마다 가구를 비치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것처럼 이 세상이 모든 면에서 완전해졌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없는 하늘은 텅 비어 모든 장식물을 제거해 버린 궁전과 같을 것입니다. 만일 땅 위에 동물과 나무와 풀이 없다면 그 황량함은 초라하고 다 쓰려져 가는 집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세상을 계속 창조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부족한 것이 전혀 없이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2. 본문 2절은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취하신 안식이 어떤 안식인가 하는 질문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세상을 보존하시고, 섭리로 다스리시며, 모든 피조물을 아끼고 번성하게 하시는 등 계속 일하신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실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조금이라도 손을 거두신다면, 시편104편 29절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모든 것은 그 즉시 파멸되고 “무” 의 상태로 환원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인정받는 것은 정말 옳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영구한 보존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들의 창조를 마치시었습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일에서 손을 떼실 때 모든 일을 멈추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미를 좀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완전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시려고 마지막 손질을 하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라고 말한 의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실제적인 상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미 홀로 제의하신 것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대체로 이러한 표현은 세상의 구조가 완전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중지하셨기 때문에 창조물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며 번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가장 안전하고 경건한 신앙의 초보를 배웁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 이루심은 하나님의 안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의 무동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①그것은 다만 더 이상 창조역사를 계속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② 그것은 창조된 모든 것을 유지하심과 기뻐하심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안식제도가 나옵니다. 사람의 안식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날에 일하지 않는 것도 그 목적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동작 상태를 경건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성수는 기독교의 사회적 공헌 중 하나입니다. 불신자들까지도 누리도록 확대된 은혜를 신자들이 못 누리는 것은 안타까움 중에 하나입니다.
3. 본문 3절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입니다.
1) 여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의 방법대로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자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께 감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미는 하나님 바로 그분의 본성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 때때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능력을 얻은 사람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 라고 부릅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창24:31)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곱째 날을 하나님께 복을 받은 날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일의 탁월함과 위엄이 이날 기념되도록 사랑으로 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거룩하게 하시고” 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말을 즉시 설명하려고 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따라서 이제 모호한 점은 해결되었습니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카데쉬)라는 말은 일반적인 숫자와 구별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법으로 일곱째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셨다는 사실이 분명할 때에 성별 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복지를 염려하신다는 사실도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데에 6일이 소요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연속적인 시간이 필요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숙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에게 한순간은 천년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정하신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나머지 날 중에서 한 날을 따로 정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복은 엄숙한 헌신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복을 통해 일곱째 날에 대한 인간의 묵상과 정성을 요구하십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전 생애를 바쳐 행해야 할 임무입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이라는 웅장한 극장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공의와 권능과 지혜를 숙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것을 당연히 주의 깊게 관찰하고 숙고해야 하는 과제로 두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막고 또한 매일매일 묵상하는데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기 위해 매주 일곱째 날을 특별히 택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친히 거룩하신 모본으로 안식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 안식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세대의 모든 사람이 거룩히 여기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예가 영원한 규례가 되도록 일곱째 날마다 안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의도를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태만을 기뻐하시어 일곱째 날을 휴일로 지키도록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일에서 벗어나 세상의 창조주에게 쉽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안식일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장애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거룩한 휴식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와 권능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을 너무 소홀히 하여, 그들이 가장 성실히 권고 받을 때에도 무감각하게 지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로는 조금도 자극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보여 주는 그 표상 자체로만 호감을 주는 것으로 믿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도록 초청하고 격려하시기는 해도 순종하도록 더 부드럽게 대하거나 자극하지는 않으십니다. 더우기 우리는 이러한 일이 한 세대나 한 민족이 아닌 전 세계의 인류에게 해당되는 공통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규례가 율법으로 주어졌는데 유대인들은 잠시 이것을 생소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안식의 전조가 되는 법적인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안식의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안식일에 자신의 옛 백성에게 성육신의 상징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더욱 빈번하게 증거 하십니다. 우리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폐지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인간생활의 항구적인 통치에 속한 것이 있다는 것과 고대의 비유적 표현에 속한 것이 있다는 사실과의 차이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실 고대의 비유적 표현은 말씀이 성취되었을 때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안식은 육신의 금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더 이상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또 자신의 기호에 탐닉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이 이러한 휴식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은 단순히 한동안만 유효한 것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명령된 것인 만큼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2) 이제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이라는 말씀을 상고합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마지막 날 밤까지 끝마치셔야 했는데 마치 많은 시간을 들여 일을 하는 서투른 기술자의 한 사람인 것처럼, 어떤 동물은 반인반양이나 반인반수와 같이 미완성의 상태로 그냥 두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비웃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께 불손히 대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헛소리는 그들의 지도자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무서운 본보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존재를 주신 때부터 그것들을 보존하셨으므로 모든 일을 만들기 위해서 창조하셨다’ 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유치한 사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만들다’ 가 인간을 가리킨다고 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모든 것 위에 두시고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들을 완전하게 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완전하다는 사실이 여기에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 완전성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창조는 그러한 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일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