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23]
중국사회 전반에서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한 중국공산당의 조치는 경제부문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 소유를 강화하는 형태로 추진됐다. 이는 토지개혁을 통해 개인에게 분배한 토지를 집단적, 또는 국가적 소유의 형태로 전환하는 핵심 작업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부터 농업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조선족 농촌마을에서 10여 가구를 묶어 하나의 ‘호조조’를 형성해 공동생산방식을 추구해온 중국공산당은 1950년대 후반 들어 이를 강화하여 ‘인민공사’라는 대규모 집단생산방식을 도입했다.
이 제도의 전환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농업은 물론 공업 등 모든 부문에서 생산증대를 위한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조선족사회를 포함한 중국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토지, 가축, 대형농기구 등 모든 생산수단은 인민공사의 공적소유가 됐다. 소작농 신분에서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받아 노동계급으로 신분이 격상된 후 정성들여 가꾼 땅을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가져간 것이다. 인민공사는 생산조직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정부기능까지 대신했다.
즉 생산조직+그 지역의 정부기능=인민공사였다.
인민공사는 모든 것을 분배하고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인민공사의 설립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적 소유제도가 완성된 것으로 평가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이미 대약진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958년 5월 중국공산당 제8기 2차 회의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앞으로 나가며 많이, 빨리, 좋게, 절약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총노선이 결정됐고 이를 계기로 대약진운동이 시작됐다. 대약진운동은 농촌에서의 인민공사 설립운동과 병행해 전개됐다. 모든 생산부문에서 생산을 증대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이 운동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은 주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운동이 모두 실패함에 따라 조선족사회는 물론 중국사회 전체가 크게 영향받았다.
반우파투쟁과 민족 정풍운동으로 마음이 상했던 조선족동포들은 무상으로 분배받은 토지를 사실상 몰수 당한 데다 사회경제적 여건마저 어렵게 되자 중국에서의 정착을 포기하고 북한으로 귀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제도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계급투쟁을 위한 이념적 편향과 오류로 인해 빚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고 박해를 받았다.
조선족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족동포들에게도 문화대혁명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중앙에서는 권력투쟁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지만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민족문제가 핵심 화두였다. 문화대혁명이 계급투쟁을 위해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내에서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반수반자(反修反資)를 핵심 구호로 내세웠으나 소수민족 거주지역에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민족문제로 인한 현실적 과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문화대혁명은 조선족동포들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미 1950년대 말 민족 정풍운동을 통해 다중 조국관을 버리고 중국 단일 조국관을 함양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여전히 북한을 조국으로 인식해온 조선족동포들은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표면적으로는 중국 공민으로서의 국가정체성을 보다 확고히 갖게 됐다.
연변지역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재해지구’로 불린다. 문화대혁명 기간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망한 사람이 2천653명에 이른다. 그중에는 맞아 죽은 사람이 433명, 구타를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인해 숨진 사람이 737명, 핍박에 못 이겨 자살한 사람이 1천483명이 포함되어 있다. 국공내전 기간 동안 참전한 조선인 중 사망자 수가 3천9백43명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참고서적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