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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교양자료 ###
▣ 5.18의 전 개 과 정 ▣
▷ 5월 18일 : 작전명 ' 화려한 휴가' 그리고 '위대한 항쟁'
한반도가 모두 숨죽인 그 날 항쟁의 불꽃은 전남대 정문에서 타올랐다.
18일 새벽 1시에 7공수가 전남대에 도착하여 도서관과 총학생회실에 있던 학생들을 체포 하고
아침에는 도서관에 나오는 학생들과 운동 나오는 시민들을 붙잡아 두들겨 팼다.
오전 10시 계엄령이 떨어지면 정문에 모이자고 미리 약속한 학생 등 200명이
'계엄군 물 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하자 '학생들은 즉각 해산하고 귀가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렇게 구호소리와 방송소리가 오가다
'돌격 앞으로!'명령과 함께 공수부대 20명이 교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패고 10여명을 끌고 학교 안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이것을 본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50명으로 늘어난 공수부대는 총을 등에 매고 진압봉을 든 채 돌격명령을 기다렸다.
마침내 명령이 떨어지자 진압봉을 머리위로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을 공격했다.
골목으로 흩어지는 학생들을 3명이 1조가 되어 끝까지 쫓아가 진압봉으로 내리치고 군화 발로 짓이겨
축 늘어진 학생들을 사냥터에서 잡은 맷돼지처럼 질질 끌고 갔다.
상가 유리창이 깨지고 주택 대문이 군화발에 부숴졌으며
이것을 말리는 시민에게는 쌍소리와 몽둥이가 날아왔다.
신군부의 '화려한 휴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민중의 '위대한 항쟁'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문에서 피한 학생들은 광주역에서 모이자고 소리치며 50분 뒤 200명이 다시 모였다.
어깨동무를하고 금남로에 온 학생들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김대중씨를 구속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정문에서 학생들을 두들겨 팼다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시민들은 이때만 해도 전두환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경찰과 최루탄에 쫒겨 골목으로 흩어졌다 다시 금남로에 모인 학생들은 금남로 시위가 어렵게 되자
시내전체로 퍼져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선전과 동참을 요구했다.
시위대가 2000명으로 불어나자 오후 1시부터 공수부대가 시내에 배치되었다.
유동 삼거리에 있던 시위대를 향해 대검과 진압봉을 든 공수부대가 공격을 하였다.
사람들은 좁은 골목을 찾아 숨어들었고 공수부대는 안방에까지 들어와 장롱을 뒤져 시위 대를 찾았다.
잡힌 사람은 진압봉에 얻어맞고 군화발에 짓이기며 대검에 찔렸다.
도망치는 학생 2명을 잡기 위해 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쫓아가는 사냥개도 있었다.
그들은 피 흘리며 축 늘어진 사람들을 트럭에 던져 싣고 전남대와 조선대로 갔다.
이곳에서 피 맛을 본 공수부대는 헬기에서 시위대 움직임을 보면서
경찰과 함께 시위대 를 공용터미널로 몰아갔다.
그리고 대검을 꽂은 채 사방에서 시위대를 향해 공격을 하였다.
터미널 광장은 피바다가 되었고 터미널 안에서는 최루탄이 터지고 그들의 칼부림은 신들린 듯 했다.
사람들 속에서 피눈물과 흐느낌이 일어났다.
2000명의 시위대가 칼부림으로 흩어지고 나자
그들은 시내버스를 검문하면서 명령을 듣 지 않으면 바로 개머리판으로 운전사와 안내양을 두들겨 팼다.
그리고 버스에 탄 청년들 을 진압봉으로 내리치고 끌고 갔다.
누구하나 이를 말릴 수 없었으며 말릴 경우 진압봉은 시민의 머리를 깨놓았다.
트럭에 싣지 못한 청년들은 길바닥에 팬티만 입혀 엎드리게 하 고서 등을 밟고 다녔다.
해가 질 무렵 광주일고 앞 도로에서는 집에 가던 여고생 웃옷을 찢어 버리고
가슴을 가리 며 주저앉자 군화발로 배와 가슴을 걷어찼으며 진압봉으로 온 몸을 갈겨댔다.
여학생은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를 본 시민들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분노하면 서도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더욱 아픈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통금시간이 12시에서 9시 로 앞당겨지고 10시부터는 시위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남대와 조선대 주택가에서 는 가택수색을 하는 공수부대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 5월 19일 : 공포의 밤이 가고 다시 투쟁은 시작되다.
그들은 알았다. 그리고 보았다.
몽둥이와 칼부림, 군화발 앞에서 맨몸뚱아리가 얼마나 힘없이 무너지는가를 !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이 민중의 이글거리는 분노임을. . . . .
아침부터 시민들은 어제밤 일이 걱정스럽고 궁금해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그 때 새벽에 도착한 11공수가 휴식을 하고서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하였다.
3000명의 시민들은 경찰 저지선 앞에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을 석방하라" 외치며
30분 정도 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나타난 지 10분도 못 되어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다.
골목과 상가로 피한 시위대를 쫓아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 람사냥을 하였다.
어제 결혼식을 마치고 가톨릭센타 뒤 미도장에서 자고 있던 신혼부부를 끌고 나와 신랑 의 머리를 깨뜨렸고
무등고시학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입구까지 막고서 짓이겼다.
어제처럼 여학생이 잡히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속옷까지 찢어 벗겼으며
배를 차고 넘 어지면 가슴을 짓밟았다.
남자들은 팬티만 입은 채 돌과 유리조각이 널린 도로에 머리를 박고 배로 기어다니게 하였다.
살기 위해 그들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장갑차는 시위대의 도망 길을 막고 있었다.
학생이 중심이던 어제 시위와는 다르게 이날부터는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투쟁을 전개하 였다.
오후 1시쯤 유동삼거리에 다시 모인 시민들을 향해 그들은 다시 달려들었고
붙잡힌 청년 1명은 알몸으로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려 몽둥이에 수없이 맞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축 늘어져 핏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일은행 사거리에서는 두 손을 묶은 청년을 트럭에 매단 채 계속 달렸다.
시위대열에는 형제를 잃어버린 가족, 친구 그리고 구두닦이와 식당 종업원 등
하층 민중 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2시가 넘어서자 2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청년들은 지하도 공사장에서 쇠파이프, 각목, 철근으로 무장하였다.
광주천에서 마침내 시민들이 첫 승리를 하였다. 4명의 공수부대가 200명 시민들에게 갇혀 한 명이 붙잡혔다.
"죽여라"하는 소리와 함께 시민들은 그동안 당한 울분을 실컷 풀었다.
그는 광주천으로 뛰어내렸고 시민들은 돌멩이를 사정없이 던졌다.
공수부대원은 그 자리 에서 쭉 뻗어 버렸다. 시민들은 승리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처음으로 맛보는 짜릿한 승리였다.
그리고 양동 복개상가에서도 공수부대 2명을 20명 시민들이 각목으로 뒤통수를 후려쳐 죽였다.
이 두 번의 승리소식은 시내에 알려져 힘을 합쳐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을 불어넣었다.
저녁에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내렸다. '광주의 눈물'이었다.
9시 통금과 함께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가로등까지 꺼진 밤거리는 돌멩이, 유리조 각, 최루탄..... 핏물과 비가 섞여 슬프게 울부짖고 있었다.
이날 밤에도 그들은 가택수색을 하여 청년들을 잡아갔다.
▷ 5월 20일 : 승리할 수 있는 투쟁
밤새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면서 가랑비로 변했다.
새벽 6시 사직공원 근처에서 노동자 김안부씨가 얼굴이 짓이겨지고 온몸이 얻어맞아 죽은 채 로 발견되었다.
20일은 시민들의 분노로 시작되었다.
금남로에는 베트남전에서 악명을 떨치고 부마항쟁을 탱크를 앞세워
1시간만에 눌러버린 특전 사 중에서도 특공부대인 3공수가 어제밤에 내려와 진을 치고 있었다.
10시쯤 30명의 젊은이들이 공수부대에 둘러싸여 벌을 받고 있었다. 남자들은 팬티만
여자들은 팬티와 가슴띠만 걸치고 있었다. 거의가 직장에 출근하다 잡혀온 사람들이다.
이를 지켜보던 조비오 신부는 "총이 있으면 저놈들을 쏴 죽여버리겠다"며 분노했다.
모든 시민들의 마음이 그러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 시민들은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을 하고
큰 화분과 교통표지판으로 바리게이트를 치 면서 공수부대와 맞섰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어제와 다르게 금남로의 3공수는 방어만 하면서 심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시민이 많아지고
도청을 둘러싼 모든 거리에 시 민들이 엄청나게 모여들고 어제 죽은 공수부대원 소문이 퍼져
그들도 이제는 시민들을 함부로 밀어부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저지선을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을 6시쯤에
유동삼거리 에서 버스와 트럭을 앞세운 200여대 차량들이 라이트를 켜고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민들은 감동의 박수와 함성을 지르며 차에 타고 뒤를 따르며 군경저지선을 향해 나아 갔다.
갑작스런 운수노동자들의 투쟁대오와 시민들의 치솟는 사기에 놀란 그들은
페퍼포그를 쏘면서 차량을 공격했다.
차량들은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최루탄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몽둥이에 머리가 터졌다.
시민들의 박수와 함성소리가 드높았던 금남로는 비명과 신음소리로 가득 찬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민중항쟁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린 불기둥이 되었다. 차량을 이용해 자신감을 얻은 시민들은
밤 9시 40분에 문화방송국을 불질러 버렸다.
이것은 자신들을 폭도라 하면 서 공수부대의 잔인한 행동을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고
미인대회나 방송하고 있는 언론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그리고 국민이 낸 세금으로 산 탱크와 총이 시민들을 죽이자 세무 서도 불길에 타올랐다.
시청에서는 시민들의 투쟁에 밀려 공수부대가 시청을 버리고 광주역에 방어진지를 만들 었다.
그러나 금남로의 저지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제 광주는 전남대와 조선대, 교도소 도청, 광주역만 빼고 해방구가 되었다.
시민들은 완전한 해방을 위해 수만 명이 날을 세우며 투쟁했다.
차량으로 저지선을 밀어부치고 화염병을 던지며
기름이 가득 찬 드럼통까지 폭발시키며 결사.항전하는 시민들에게
놀란 공수부대는 11시에 발포를 하고 말았다. 30명의 사상자 가 생긴 첫 집단발포였다.
방송차량을 탄 전옥주씨는 이 사실을 전 시내를 돌며 알렸고 시민들은 광주역으로 모여들었다.
시민군 차량들은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였고 시민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죽음을 건 투쟁을 벌였다.
마침내 새벽 4시 공수부대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수부대를 몰아낸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날 전남대로 도 망간 공수부대는
잡혀온 사람들에게 대검으로 분풀이를 하면서 화려한 휴가를 즐겼다.
▷ 5월 21일 : 시민군과 해방광주
부처님 오신날 아침이 되자 시민들은 다시 금남로에 몰려들었고
밤을 새며 투쟁한 시민 들을 격려하며 새로운 투쟁을 시작하였다.
젊은이들은 거의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을 하였고 아주머니들은 주먹밥과 음료수를 날랐다.
이제 광주 시민들은 모두가 한배를 탄 운명공동체였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공수부대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뜨거운 공동체와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어제 광주역에서 죽은 시신 2구 가 손수레에 실려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총으로 쏴 죽인 것도 모자라 몽둥이로 얼마 나 두들겨 팼는지 온 몸이 검붉게 피멍이 들었고
두 눈은 부릅뜨고 입안에는 피가 가득 차 있었다.
손수레는 저지선 앞으로 나가 공수부대가 직접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빛이 공수부대를 향해 타올랐고 결사항전으로 모아졌다.
청년들이 가득 탄 대형버스와 장갑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 맨 앞에 서고
차량 위에 서는 태극기를 든 청년들이 시민들을 선동했다.
박수와 함성이 금남로를 진동시키며 투쟁 은 절정을 향해 나아갔다.
버스 2대가 저지선을 향해 돌진했고 곧바로 총소리가 났다.
버스 1대는 운전사가 총을 맞아 즉사하고 분수대를 들이받았으며 한 대는 안전하게 빠져 나왔다.
또 다시 장갑차 한 대가 저지선을 향해 나아갔고 총탄이 쏟아졌으나
도청 옆 도 로를 빠져나가면서 공수부대원 1명을 깔아 뭉겨 버렸다.
차량대열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도청으로 나아갔다.
1시쯤 도청 옥상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집단발포가 이뤄졌다.
운전수와 맨 앞에 섰던 시민들 그리고 차량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들이 저격수들 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피할 틈도 없이 피를 흘렸다.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한 일은행 사거리에서부터 대오를 만들었다.
이 때 가톨릭센타 앞에서 대학생 4명이 태극기 를 펼쳐들고 도로 한 가운데로 나갔다.
청년들은 시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구호를 외쳤고 도청쪽에서 날아온 총탄은 그 청년들을 쓰러뜨렸다.
자비와 사랑이 가득 차야 할 부처님 오신날 금남로에서는 56명이 숨지고 5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청년들은 총을 구하기 위해 나주와 화순 등으로 빠져나갔다.
마침내 오후 3시 첫 시민군이 금남로에 나타났다.
1000여명의 시민군은 공수부대와 혈전을 벌였다.
전남대병원 12층 옥상에는 10여명의 청년들이 기관총 2정을 설치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 자 시민들은 만세를 불렀고 공수부대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옥상에서는 도청이 사정권 안 에 있었고 분수대 주변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잘못 사격하면 주택과 시민들이 다칠 수 있어 기관총을 쏘지는 못했지만
그 자체가 공수부대에게는 커다란 공 포였다.
6시쯤 마침내 공수부대는 도청을 버리고 조선대로 도망갔다. 텅 빈 도청을 보며
시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광주는 해방되었다.
공수부대가 물러가고 도청이 시민군 손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밤사이 광주시 전역에 전해 졌다.
흥분과 감격에 젖어 이른 아침부터 도청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들을 보며
계엄군의 잔학상에 치를 떨었고 앞으로의 상황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가졌다.
시민들은 치안확보와 질서를 위해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면서
처절했던 상처를 지워갔다.
지난밤 지역방어 전투에 참가한 시민군은
무질서하게 돌아다니는 차량을 등록시켜 임무 를 부여했으며
시민군을 재편성하여 각 지역으로 신속하게 배치하는 등
자체 조직을 통 제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한다.
도청에서는 시내 유지급 인사, 목사,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계엄사에 요구할 협상조건을 토론하고 무기회수를 시작했다.
일부 도청 수습위원들의 구성에 불만을 느낀
홍남순, 김성용, 송기숙 등 재야인사들도 남동성당에서 따로 모임을 갖고
수습대책을 논의하였다.
5.18 수습대책위원회는 회수한 무기 중 일부를 가지고
상무대 전남.북 계엄분소를 찾아가 7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계엄군측과 협상, 오후 5시경 협상결과를 도청 광장에서 보고하였다.
그러나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계엄사의 요구와 피의 대가를 보상하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엇갈린 가운데
협상의 내용을 전해들은 시민 들은 협상대표를 향해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저녁때쯤 김창길을 위원장으로 한 학생수습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무기회수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다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학생 수습위원과
윤상원등 진보적 학생운동 출신과 기층민중이 중심이 된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25일 생겨난다.
시위는 목포, 해남, 강진 등 시외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무기탈취와 차량시위가 계속되었다.
△ 투사회보팀 활동
공수부대의 학살만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18일부터 전남대내 '대학의 소리'구성원과
극단 '광대' 회원이 무등영아원에서 제작하여 시내에 뿌렸다.
21일부터 투사회보라는 이름으로 들불야학이 중심이 되어 광천동 천주교회와 들불야학 교실에서 제작하였다.
물자조달, 문안작성, 등사, 배포조로 나뉘어
윤상원, 김영철, 박용준, 김성섭, 윤순호, 나명관, 전영호 등이 주축이 되어 활동했다.
24일부터 YWCA내 신협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그동안 산발적으로 제작된 유인물을 통 합하여
'민주시민회보'라 하였다. 항쟁기간에 시민들을 선전선동한 유인물은 26일 제 11호 를 마지막이었다.
▷ 5월 22일 - 26일 : 해방광주와 영웅들
도청에서 밤을 샌 500명 시민군은 시내치안과 외곽 방어진지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시신안치와 범국민 궐기대회를 벌였다.
광주로 들어오는 5곳(화순, 담양, 목포, 비아, 송정리)을 가로막은 공수부대는 이 곳에서 양민학살을 즐겼다.
22일 07:30 전남대에서 암매장된 고등학생이 발견되었다.
전남대 학생과에서 일하던 서명원씨 말에 따르면
"전남대에 있던 공수들이 모두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출근했다.
직원들과 함께 곳곳을 둘러보았다.
가정관 한 강의실에서는 한 가마니는 족히 될만한 양의 머리카락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허리띠가 500여개, 신발 100여개가 널려있고 바닥에 는 피가 흥건히 고여있었다.
그 많은 피로 보아 사람이 죽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암매장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그럴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학교 뒷산을지 나다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니 솔잎이 많이 쌓여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땅을 파보니 시체 1구가 나왔다. 온몸이 대검으로 찔린 상처가 있고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있었다.
광주상고생 같았다. 나는 그 시체를 상무관으로 옮겼다." 나중에 그는 상주상고 1학년 이성귀군으로 확인되었다.
22일 15:00 도청 앞에서 제 1차 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이날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두 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 로 결정했다.
원하는 사람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고 토론과 발표을 했다.
시가행진의 코스와 요령 및 선언문 내용, 그리고 시내 치안유지 방법 등이 토론 되었으며,
광주 깡패단인 오비파와 화신파 두목들도 연단에 나와 민주화 투쟁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특히 질서유지에 역점을 두고
시민들로 치안대를 구성 경찰서장집, 박인천 사장집, 관공서 등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폭력, 방화, 강도를 방지했다.
시위차량도 조직적으로 나누어 지휘차, 대변인차, 식량수송차, 무기수송차, 시민수송차로 역할을 전개했으며
또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과 석유의 매점매석을 막았다.
광주시민들은 7번의 집회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새로운 질서와 사회상을 창조하였다.
25일 궐기대회에서는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소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투쟁을 다짐했다.
이 노래는 광주시민들이 항쟁기간 가장 많이 부른 노래다.
도청 옥상에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 가십시오."
300명 시민이 도청에 남았다.
투쟁위원들은 여자와 고등학생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했다.
살아서 증언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 . . .
그러나 10명의 고등학생들은 형들과 함께 죽겠다며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날 밤 윤상원 대변인은 시민군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 5월 27일 새벽 : 패배와 승리
새벽 2시 도청에 비상이 걸렸다.
그리고 윤석루 기동타격대장의 결의에 찬 명령이 떨어졌다.
"한치의 물러섬 없이 끝까지 죽음을 무릎 쓰고 싸운다."
6시 그들은 현실에서 죽어가고 개처럼 두들겨 맞고 붙들려갔지만
역사투쟁에서 마침내 승리하였다.
확인된 희생자는 26명으로 노동자 12명, 대학생 6명, 고등학생과 재수생 8명 이었다.
그들은 지금 5.18묘역에 누워
민중에게 끝없는 힘과 용기를 주고 있으며
그들의 심장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다.
★ 자료출처 : 5.18 행사위 5.18 사적지 안내 교육자료집에서 발췌함 ( 2002년 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