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때부터 테니스 선수로 진로를 정했고
20대 초중반까지 나름 촉망받는 선수로 생활하며
가끔 저소득층 아이들 재능기부로 테니스 수업도 가곤 했다.
그 날이 있기 전까지.
어김없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길
아파트 앞에 사람들이 웅성이며 모여있었고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베란다에 아이 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땐 영웅심리가 생긴건지 아니면 단순한 내 몸의 반응 이었던건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냈고
아이는 무사했지만 내 양 어깨와 손목은 망가져,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다시는 선수생활을 할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재활과 함께 다시 테니스채를 쥐어보려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시작되는 통증에 기량의 10프로도 발휘하지 못했고, 그렇게 내 선수 생명은 끝이났다.
하루하루 어떻게 견뎠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학교도 그만둔 채, 그 누구도 안만나고 왠종일 방에 틀어 박혀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내 주변 동기들은 모두가 자리를 잡고 무언가 이루기 시작할때
나는 모든걸 잃었으니 버틸 자신이 없었던거지.
지금도 가끔 생각하는건
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하면 나는
삼십대 초반, 십년이 지난 지금
나는 무슨일을 해도 몸이 망가져 제대로 해내기가 힘들었고
하고싶은것, 잘하는것도 없었기에 그냥 시간에 맡긴채 흘러가는대로 살았더니
아직도 자리잡지 못하고, 얼마전 S대학교 앞 카페에서 무경력자도 뽑아준다기에 그곳에 지원해 일하는 중이다.
나이는 먹었고 경력도 없지만 죽기는 싫고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해보게 되는것 같기도 하고.
무경력자 뽑는다해서 사장이 엄청 못됐거나 깐깐할줄 알았는데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주시기에 부담감은 덜했지만
역시나 어딜가나 진상들이 문제였을 뿐이지.
대학 근처라 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이곳에 오는 손님 중 눈에 띄는 손님이 한명 있다.
늘 많은 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들어와 아메리카노만 시키는 학생.
주변은 시끄럽고 모두의 시선은 그 아이에게로 가있지만
대답은 늘 단답에 무표정이었기에 인상에 남았던것 같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건
가끔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 학생의 칭찬위주였는데
잘생겨서 여자들이 맨날 뭐 사다주니 좋겠다,
테니스 실력까지 타고나니 세상 불공평하니 뭐니
너는 미래 걱정 안해도 좋겠다는 둥
그냥 듣고 있으면 웃기는 얘기들이지만
테니스 선수라는 말이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 나이쯤엔 테니스 선수로 활약했으니까.
잠깐은 감상에 젖어있는데
아, 진상 손님이 나타났다.
일단 무조건 죄송하단 말부터 해야했기에
사과부터 하고 안되는 이유를 설명 드렸더니
그럼 환불해달라 진상을 부리기 시작하고
그래도 안된다 말씀들이니
폭언이 이어진다.
나를 정말 열받게 하는 말은
그 말과 함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난 그저 알바생일 뿐이니 속으로 참고 또 참는데
그 학생이 카운터로 걸어오더니
손에 들고있던 이물질이 묻은 휴지들을 아저씨 머리를 잡고선 입에다 쑤셔 넣더니 나를 보며 말한다.
"이거 쓰레기통이니까 여기다 버리는거 맞죠, 누나"
아저씨는 학생의 행동에 억억 거리다 휴지를 뱉어내곤 쌍욕을 내뱉으며 멱살을 잡는데
주변에서 아저씨를 말리기 시작하고
경찰 부르니 마니 소란이 있었지만
내가 먼저 손님이 제게 언어폭력을 행사하신거라 말하니 씩씩거리고는 나가버린다.
소란이 있은 후, 주변 학생들은 다 나갔지만 그 학생 혼자 나가지 않고 뭔가 할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더니 나에게 다가오는데
"계속 오면 기억할거라 생각했는데.. 저 기억 안나요?"
"글쎄요.. 저랑 알던 사인가요?"
내 말에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숨을 한번 크게 마신 후 뭔가 결심에 선 표정으로 말한다.
"십년. 저 그 시간 동안 누나를 찾아다녔어요. 근데도 못찾겠어서 내가 유명해지면 혹시나 알아봐줄까봐 그렇게 기다렸어요"
십년? 그땐 내가 선수생활.. 그리고 저소득층 재능기부 하러 다녔을 땐데
아, 설마 그때 나한테 테니스를 배운 아인가?
그제서야 학생의 얼굴과 그때 한 아이의 얼굴이 겹친다.
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고
다가가면 피하기 바빴건 아이었는데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먼저 다가갔더니 어느순간 내게 마음을 열고 열심히 테니스 수업을 따라와 줬던 아이.
"어?!!!너 ..승준이지?"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그제서야 얼굴이 밝아지더니
활짝 웃으며 네 라고 대답한다.
늘 무표정이던 아이가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다는 이유 하나에 이렇게 웃는다는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날 그 시간동안 기다렸다는게 고맙기도 하고.
그 후로도 늘 매일 같이 카페를 들렀지만
달라진건
오늘은 왠일인지 친구들과 여럿이서 모여 왔고
여전히 친구들과 있을땐 무료한듯 의자에 기대 커피잔만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한 친구가 승준에게 이번 소개팅은 꼭 나가야 한다며
이번에 나오는 애들 이쁘다는 얘기를 꺼낸다.
하지만
승준은 그런 얘기 싫다고 몇번 말했냐며, 그만좀 하라 말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리고
승준이 나간 사이
저 새끼 고자니, 게이일거니, 잘난척 하는거니 남자애들의 뒷담화가 시작된다.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내가 뭐라할 입장은 아니지.
학생들이 모두 나간 후, 승준이 다시 가게로 들어오더니
생각치도 못한 말을 꺼내는데
"누나 저 소개팅같은거도 나간적 없고, 여자도 안만나요. 운동만 했어요"
"어? 어 그렇구나"
"그게 끝이에요?.. 누나는 진짜 저한테 궁금한게 하나도 없나보네요"
성준은 내 손에 반창고와 연고 하나를 쥐어주더니 나가 버리는데
내 손에 상처들은 언제 또 봤던 걸까..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걸어가는 성준을 향해 외친다.
일이 끝날 때까지 성준은 카페에 앉아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기다렸고, 손님들 중 누군가가 나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진상을 부리려 하면
눈에 레이저가 나올것 처럼 그사람을 쏘아보곤 했다.
반대로, 승준이 잘생겼다며 여자손님들이 다가가 대쉬할때면
승준은 한결같은 자세로 대처하는데
그렇게 일이 끝나고
승준과 함께 길을 걸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들을 하나씩 꺼내는데
누군가에게도 부끄러워 하지 못했던 얘기들이라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해진 느낌도 있고.. 내 얘기가 부담스러울까 걱정도 됐기에 성준에게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한심하지. 그때 그렇게 테니스 그만두고
나이 서른넘어서 까지 아르바이트나 전전하고 있으니까"
"아뇨 멋있기만 해요"
"어?"
"뭘 하든 뭐가 중요해요.
뭔가를 하고 있다는게 중요하죠. 나같으면 힘들어서 그만뒀을거 같은데 누나는 계속 하고 있잖아요.
그거 엄청 대단한건데.."
"이게 뭐가 대단해. 그냥 먹고 살려고 하는건데"
내 말에 승준은 걷던 걸음을 멈춰 서고는
앞으로 다가와 내 손을 살며시 잡는다.
"그게 진짜 멋진거죠. 안 포기하고 안 죽고, 살려고 뭐든 해본가는거.
누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저한텐 멋있는 사람이에요.
세심하고 자상한 면이 멋있고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면도 멋있고..
너무 멋있어서 매번 반하는 것 같아요 "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성준은 웃으며 내게 한가지 제안을 하는데
" 누나. 제가 며칠 뒤 대회에서 우승하면 저랑 데이트 한번만 해주세요."
하지만 승준은 아쉽게도 결승전에서 떨어졌고
준우승에 그쳤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가게 앞에 서성이고 있는 승준을 발견하고
그정도면 정말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 듬어주니
승준은 내게 비맞은 강아지 마냥 축 쳐진 어깨로
내게 살며시 기댄다.
"누나랑 데이트 못하는 거죠..? 우승 못했으니까"
승준은 활짝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 후 갑자기
내 볼에 뽀뽀를 하고는 뛰어가며 외친다.
"십년 기다렸으니까 이정도는 용서해줘요!! "
지금 내 감정이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너무 미래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첫댓글 더 줘
승준아 이리온.
아 맛있다 더줘
아휴 남주 상상가게 어쩜 사진도 저렇게 적절한
귀엽네..ㅋ
ㅎㅎㅎㅎㅎ
더 줘.
재밌다 ㅎㅎ
와...에바네 더줘더줘더줘'!!!!!!!! 개존잼 미쳤네;
미쳤네..냠냠굿
나 연하 좋아했네...
아뇨 전 먼 미래까지 생각할래요....
박수함성 와 너무좋다 글쓴아 시험기간이라 인생 팍팍했는데 덕분에 행복해졌어 알라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