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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 주 얼 ▣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하늘나라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5.18묘역에 누워있는 최미애씨는 임신 8개월에 공수부대가 쏜 총탄에 맞아 25세로 생을 마쳤다.
두 달이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태아는 10여분 동안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며 엄마와 운명을 함께 했다.
평범하고 아름다운 이 여인은 원한과 분노가 가득 담긴 손수레에 실려 먼 세상으로 떠나갔다.
5.18민중항쟁은 이처럼 임산부에게까지 무차별 총질을 하며
시민을 학살한 군부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워 인간애를 꽃피어낸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땅에 묻혀버린 한 생명을 위해
우리는 광주얼을 잘 보듬어 안아
민족의 희망을 낳는 새 생명으로 부활시켜야 하며 세계얼로 승화시켜야 한다.
광주얼은
저항정신, 공동체 정신, 역사에 대한 책임정신
민족자주와 민족대단결 정신이 어우러져 있다.
▷ 광주얼은 저항정신과 공동체정신이다.
1. 짐승에서 인간으로, 인간의 존엄성(인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정신
권력의 노예가 된 전두환과 인간사냥꾼이자 살인기계인 공수부대는 화려한 휴가를 광주에서 보냈다.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손옥례씨는 대검에 왼쪽 젖가슴이 찔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70센티 박달나무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온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지고
아랫배에는 수십발의 총탄세례를 받았다.
항쟁기간 가장 잔인하게 학살된 그녀의 시신을 본 가족들은 충격으로 풍지박살이 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일을 잊기 위해 술로 세월을 보내다 81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화병으로 가슴앓이를 하다 86년에 딸 곁으로 갔으며
동생 손병석씨는 지금도 정신분열증세를 앓고 있다.
그들은 꽃다운 처녀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평범한 가정을 송두리채 짓밟아 버렸다.
조대부고 3학년에 다니던 김부열군은 19일 학교에 다녀와
"조선대 앞에서 군인들이 여대생을 붙잡아 속옷만 입혀놓고
토끼뜀을 시키더라"는 얘기를 하며 몹시 열을 냈다.
그리고 항쟁에 참여하다 주남마을 뒷산에서 발견되었는데
시신의 머리는 사라지고 왼팔은 잘려 있었다
65세의 김명철씨는 대문에서 얻어맞아 숨졌고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고 있던 14살 방광범군과
동네 산소에서 놀던 11살 전재수군은 그들의 사냥감이 되었다.
5살이던 김내향양도 부모와 같이 가다 총탄이 척추에 박혀 평생을 휠체어에서 보내야만 한다.
20년이 흐른 지금 아이는 어느새 25살의 처녀로 성장하였지만 그녀는 아픈
역사를 몸에 담고 살아가야만 한다.
공수부대는 여학생들을 집단 성폭행 하였다. 전대생이던 장00씨는
정신이상으로 끝내 스스로 생을 접었고, 경신여고 1학년 유00양은 지금도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사냥꾼들은 이처럼 광주를 '피와 통곡의 바다'로 만들었다.
18일 오후 5시쯤에 공포에 질린 광주의 거리는 무서움에 떨었고
비가 내린 19일 밤에도 시민들은 분노와 무력감을 곱씹으며 처절한 밤을 보냈다.
그러나 시민들은 악마들이 씌운 짐승의 굴레를 벗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일 오후 6시 도청을 향해 진군하는 운수노동자들의 위대한 투쟁을 계기로
그들은 공포와 무력감을 극복하고 결사항전을 통해 아름다운 운명공동체를 만들었다.
자식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에 뛰어드는 어머니의 모성애처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시민들은
원초적 본능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구두닦이, 공사판 일꾼, 넝마주의 등 천대받던 사람들도 시민군이 되어
항쟁의 최전선에 선 주인공이 되었다. 밑바닥 인생만 살던 그들이 시민들의 뜨거운 애정을 확인하면서
사람대접 받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자긍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광주시민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한 순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공수부대와 싸웠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인권)을 지키고 사는 것이다.
존엄성이 짓밟혔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바쳐 저항하고
존엄성이 살아 숨쉴 때 우리는 모든 창조적 에너지를 바쳐 헌신한다.
광주얼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한 저항정신이다.
2. 폭도에서 유공자로,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저항정신
광주는 예로부터 의로운 도시다.
동학농민의 함성, 항일의병의 말굽소리 그리고 광주학생의거 등 조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당당하게 떨쳐 일어선 의로운 정신이 깃들어 있는 도시다.
광주시민들도 이런 의로운 역사성과 민주화 성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다른 지역은 계엄령이 확대되자 조용히 수그러 들었지만
광주는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부세력에 맞서 희생을 감수하며 일어섰던 것이다.
도청이 함락된 뒤에도 민주주의를 위한 줄기찬 투쟁은 계속되었다.
간첩의 배후조종을 받아 정부를 뒤집으려 했다는 폭도로 불리면서도
오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길에 광주시민과 전국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두 나섰다.
6월항쟁의 힘으로 쟁취한 88년 '광주민주화 운동 국회청문회'는
광주의 진실이 알려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의 힘으로 95년 학살자를 감옥으로 보내면서
'진실과 정의는 언젠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민중과 역사 앞에서 증명하였다.
투쟁과 함께 20년 세월이 흘러 광주시민들은 폭도의 오명을 벗고
당당히 민주주의를 지키고 키운 유공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3. 해방 광주와 공동체 정신
죽음을 넘어선 극한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은 생명, 피, 밥, 재산, 마음을 아낌없이 나누며 진한 운명공동체를 꽃피웠다.
그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용감한 시민군에게는 환한 웃음으로 애정을 보이는 여유가 있었다.
"시민 여러분, 피를 주십시오. 헌혈을 하십시오. 피가 없어 형제들이 죽어갑니다." 는
피로 쓴 헌혈차의 방송을 듣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피를 내놓기 위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피가 남아돌아 그만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기 피도 뽑아 달라고 애원을 하는 통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의료인들도 일주일 동안 비상 철야근무를 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박금희양은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나오다 10분 뒤에 양림다리에서 총탄에 맞아 숨졌다.
방금 전 자신의 뜨거운 피를 바쳤던 박금희양은
차가운 피를 철철 흘리며 기독병원으로 실려왔으나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고등학생인 박현숙양은 도청에서 시신을 닦는 일을 하다 관이 부족하자
화순으로 관을 구하러 가다 주남마을에서 숨졌다.
죽은자들의 영면을 위해 관을 구하려 가다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도청에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시장 아주머니들은
쌀과 돈을 걷어 주먹밥을 만들어 손수레에 싣고 도청으로 달려왔고
시민군이 탄 차량에는 음료수와
빵 그리고 담배가 넘쳐났다.
5.18은 거의 모든 시민이 참여한 투쟁이었다.
학생, 노동자, 농민, 황금동 술집 아가씨 등 남녀노소 신분을 뛰어 넘어
투쟁과 운명 공동체를 창조하였다.
5월 21일 금남로에서는 71만 시민 중 20만이 참여하는
세계항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민중적인 항쟁을 일궈냈다.
또 자랑스러운 것은 당시 시내에는 45개 금융기관이 있었는데
털린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총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에 절도사고 하나 없었다.
이것은 광주시민들이 자신의 행동목표를 민주주의 수호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폭도들이 날뛰며 도시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
97년 인도네시아 사태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항쟁임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이 간직한 자랑스런 전통이다.
또한 시민들은 공수부대가 물러간 후 놀라운 자치능력을 보여 주였다.
도청 앞 분수대에서는 매일 집회가 열려
시민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누구나 연사로 나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였다.
피보다 진한 연대감과 높은 도덕정신
그리고 자치능력 투쟁과 운명공동체는 총과 피와 밥으로 만들어졌다.
4. 역사에 대한 책임정신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도청에 남은 전사들은 오늘 비록 죽지만 민중과 역사가
그들을 승리자로 만들 것을 확신하며 목숨을 바쳤다.
그들이 보여 준 역사에 대한 책임정신은 우리 가슴에서 용솟음치고 있다.
5. 민족자주와 민족대단결 정신
88년 전남대 총학생회 학술부에서 만든 책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이제야 알았다. 우리 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27일 새벽 도청에서 한 전사가 죽어가며 남긴 말이다.
25일 도청 궐기대회에서
미국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하러 온줄 알았던 그들은
목숨을 바치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민족자주 없이 민주주의도 없다'는 것을. . . . .
그리고 26일 마지막 집회를 마치며 광주시민들은 '우리의 소원'을 부르면서
광주의 비극이 분단 때문임을 몸으로 느꼈다.
★ 자료출처 : 5.18 행사위 5.18 사적지 안내 교육자료집에서 발췌함 ( 2002년 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