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과 음악미학(2)
4.
강에서 연등 놀이가 벌어지던 어느 날 저녁 한훅은 혼자서 강 건너편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강물 위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 등걸에 기대어 수천 개의 등불이 빛을 발하며 강을 따라 유유히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아주 오랫동안 방랑한 끝에 그는 강의 원천에 도달했다. 거기에 무척 쓸쓸하게 대나무 오두막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오두막 앞에는 그가 강가 나무 줄기 옆에서 보았던 그 노인의 돗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현금弦琴을 켜고 있었다. … 신비로운 음악이 은빛 구름처럼 계곡 사이를 맴돌았기 때문에, 완벽한 언어의 달인이 조그만 현금을 옆으로 치우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청년은 감미로운 놀라움 속에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회색으로 변한 하늘에는 한없는 방랑의 그리움 속에 두 마리 왜가리가 날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시구보다 훨씬 아름답고 완벽했기 때문에 한훅은 서글펐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 곁에 머물며 치터 연주를 배웠고, 그 다음에는 피리 부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나중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시를 짓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듣는 이의 영혼을 물결 위에 바람처럼 뒤흔들어 놓는 그 은밀한 예술을 한훅은 서서히 익혀 나갔다. 그는 산 가장자리에 걸려 머뭇대며 떠오르는 태양과, 물속에서 그림자처럼 설핏 사라지는 물고기들의 소리 없는 움직임과, 봄바람에 흔들리는 어린 버드나무를 묘사했다. 그가 지은 시를 듣다 보면, 그것은 떠오르는 태양과 노니는 물고기와 속삭이는 버드나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늘과 세계가 그때마다 한 순간 완벽한 음악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헤르만 헤세,「시인」부분
시인의 고독과 운명을 내면화한 이 단편에는 무엇보다 헤세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와 미적 감수성이 돋보인다. 주인공 한훅은 자신이 관조하는 모든 것들을 한 편의 시 속에 온전히 되살려내고 싶어 한다. 그의 고독은 지상의 아름다움과 타자화된 자아로서 욕망을 동시에 가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데에 기인한다. 황하를 배경으로 완전한 시인을 꿈꾸는 한훅에겐 유일한 스승이 있다. 그는 보라색 옷을 입은 기품 있는 노인으로서 언어의 달인이자 완전한 자유인이며 음악의 신이다. 그는 시의 아름다움과 비밀이 현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스승의 문하에서도 한훅은 자신이 원하는 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때면 깊이 상심하며 귀향을 꿈꾼다. 아니, 스승을 증오하며 심지어 목을 조르려는 마음까지 내비친다. 그러다가도 한훅은 다시 스승 곁에 머물며 피리와 치터 연주를 배우고 시를 짓는다. 슈만의 음악과도 같이 그것은낙담과 흥분이 하나가 된 심리적 음색과 분위기로서 후모어(미셸 슈나이더,『슈만, 내면의 풍경』)에 속한다. 이 경우 후모어Humor는 유모어humour와 기분[humeur]을 포괄한다.
한훅이 저녁 강물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물빛을 바라보는 것은 사이의 존재 미학이자 유현幽玄이다. 등불이 수면에 흔들린다. 무수한 방랑 끝에 도달한 강의 원천에는 음악이 있다. 숨어 우는 피리 소리. 그 피리의 아름다움과 깊이는 구멍[空]과 흐름[flow]에 있다. 고통을 승화시키는 절대 도구이자 사물인 피리(소리)로 인해 천지와 만물은 비로소 깨어난다. 좋은 가문과 남부럽지 않은 재산, 규수와 정혼까지 하며 뛰어난 학문과 품행을 갖춘 스무 살의 청년 한훅, 시인을 향한 그의 꿈은 이 모든 것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도저한 슬픔과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미학의 근원적 감정이다. 한훅에게 태양과 물고기와 나무는 단순한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며, 그의 시작詩作이 갖는 의미는 세계와 대지가 순간의 느낌과 조화 속에서 하나의 존재, 하나의 음악이 되는 것이다. 자연과 사물 자체는 시보다 아름답고 완벽하다.
헤세는 스승으로 대변되는언어의 신神을 상정하여 그 신이 슬픔을 노래하면 모든 것이 다 슬퍼하고, 그가 스산함을 노래하면 모든 것이 다 스산해진다.헤세가 말하는 음악의 언어로서 시 또는 신은 그림자처럼 사람들의 외부에 존재하며, 우리의 내면을 파고 든다. 한훅처럼 시를 대하라는 헤세의 언명은 미완의 인간이 보다 완전한 세계로의 지향을 의미한다. 음악가가 자기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시인은 자신의 예술을 위한 독자적인 도구가 없다. 인간이 가진 언어 중 그 어느 것도 고양이의 긴 꼬리가 그려내는 유려한 곡선이나 오색 찬연한 날개를 펼치는 극락조가 보여주는 우아함과 재치, 광채와 명민함에 따라가지 못한다.
5. 음악과 춤의 미학: 조지훈,「승무」
오직 춤 안에서 나는 가장 높은 것들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안다.(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 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여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合掌이냥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조지훈,「僧舞」전문
승무는 바라춤과 달리 인간의 춤이다. 깊어가는 봄밤, 지훈의 시‘승무’를 읽고 있으면 탄사가 절로 나온다. 감탄이 가난한-순수한 마음에서 온 거라면, 미적 가치와 경험은 인간 심성의 근원이자 상실과 회의를 넘어선, 생의 경이로움에서 야기된다. 승무의 깊이와 멋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은 옷의 색감(질감)과 춤사위, 배경음에서 찾아진다. 숙고사熟庫紗로 만든 원단은 부드러운 질감이 마치 누에가 나비 되어 공중을 나는 듯하고, 흑백 대비에 붉은 띠를 두른 모습은 태극의 기를 연상시킨다. 긴 장삼을 허공에 흩뿌리는 모습과 치마 끝에서 보일 듯 말 듯한 버선코의 움직임은 승무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춤사위다. 정중동과 동중정의 그것은 경계를 초월한 자태이며, 이는 시간의 흐름과 소리가 있어 가능하다. 승무는 순수한 몰입이다. 관객에 등을 지고 머리에 고깔을 쓴 모습이나 무대와 춤이 분리되지 않은 장場이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고깔은 단군의 신교神敎와 불교가 습합된 문화로서 그 원형 이미지는 뱀의 머리, 즉 삼각형 이미지에 해당한다.“모든 씨앗이나 영혼이 뱀으로 상징되는 빛의 생명 이미지”(정형진,『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라면, 비밀의 피라미드 고깔 안에는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시가 갖는 우리말(‘나빌레라’,‘파르라니’,‘외씨보선’,‘아롱질 듯’등)의 아름다움과 그로 인한 정서의 깊이 또한 관심의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뿐 아니라, 차분하면서도 안정감이 있고 극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이미지 전개는 승무의 과정과도 잘 어울린다. 꿈에도 길이 있다면 춤에도 길이 있다. 춤의 길과 삶의 결을 따라 가을밤 오동잎이 진다. 어린 여승의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달빛에 빛난다. 복사꽃 고운 빰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아름답고 슬프며, 애잔하면서도 서럽기까지 하다.
한 인간의 슬픔과 서러움, 남몰래 흐르는 눈물 방울이 별빛처럼 아름답고 고고하다. 깊은 마음의 바다 한가운데는 거친 세파에도 불구하고 번뇌라는 별빛으로, 보리심菩提心으로 너머와 여기를 가로지르는 무엇이 있다. 승무의 미학은 주름에 있다. 박사 고깔과 소매의 형태 변화(접다→접어 올리다→접어 뻗다)에서도 보듯이, 주름은 고통과 환희의 색실로 짠 아름다운 비단-옷이다. 흑백과 적청의 색조가 갖는 신비감은 물론, 휘어져 감기우며 감추고 드러나는 빛과 소리 앞에서는 그야말로‘거룩한 합장’이다. 그 어떤 슬픔도 서러움도 끈을 놓고 만다. 실솔蟋蟀이 지새우는 삼경, 먼 하늘이 다가서고 눈은 한 점 빛으로 모아진다. 점이 선으로, (춤)길로 이어진다. 맺고 푸는 점과 선에는 신체와 영혼이, 춤이 있다. 줄풍류와 대풍류가 하늘로 가는 꿈의 사닥다리라면, 한국 미학의 특징에는 이런‘신명’과‘멋’,‘신인묘합神人妙合’이 있다.‘접화接化’가 있다.(최광진,『한국의 미학』) 이 경우 접화는 사람이 사람을 포함한 만물을 사랑의 감정으로 가까이하여 이치로 변화시키는 특징을 말한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합장-접화(接化․接和)’에 있다. 승무의 시인 은 말한다.“언어 중에 가장 선지禪旨에 통하는 살아있는 언어 형식으로서 시와 선은 (결코) 다르지 않다詩禪一如.”
(참고) 천체의 음악 인간의 신비 / 루돌프 슈타이너
지상의 언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공존합니다. 그러나 정신세계로 올라가면 여러분은 자음들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모음으로 된 노래하는 세계에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노래 부르기를 멈추고, 노래 자체가 됩니다. 그 세계 자체가 우주의 노래가 됩니다. 자음의 정신적 대응물은 정신적-영혼적으로 물들여져 모음화되어 모음들 안에 존재합니다. 여기 지상에서는‘라’나‘도#’이 어떤 특정 옥타브의 음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정신세계로 들어서자마자‘라’와‘도#’은 특정 음계 안에 있지 않고 내적으로, 질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라’를 앙겔로이 위계의 존재가 발음하거나, 아르캉겔로이 위계의 존재나 또다른 존재가 발음하는 것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루돌프 슈타이너, 미하엘 쿠르츠 편(김현경 옮김),『천체의 음악 인간의 신비』, 무지개다리너머, 2021.
생명과 영성을 본위로 한 발도르프 대안학교의 창시자이며 유럽의 신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는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음악 애호가였다. 그가 생각하는 음악의 본질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정신적인 것에 있으며, 그것은 음과 음 사이에 있다. 그런 내면의 움직임을 중시하는 슈타이너에게 음악의 갈래는 우주의 음악과 인간의 음악과 악기의 음악, 즉 무지카 문다나(musica mundana, 천체의 음악), 무지카 후마나(musica humana, 음악으로서의 인간),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musica instrumentalis, 예술로서의 인간)가 있다. 자연과 음악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 관계도 없으므로 (인간의) 악기는 이들 양자를 매개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음악과 자모의 관계는 어떤가? 자음이 형태와 물질, 악기를 나타내는데 반해 모음은 노래와 정신, 영혼을 표상한다. 특히 현존재로서 노래는 지상의 이전을 경험하게 하며 모음을 그 본위로 한다. 자음은 모음에 대한 갈망이 있다.‘라’음 하나에도 자음(ㄹ)과 모음(ㅏ)의 결합이 있고, 각각의 자모에도 그 내부에는 무수한 차이가 발생하여 앙겔로이(일반천사), 아르캉겔로이(수천사), 또다른 존재 등의 위계가 존재한다. 음악은 말하자면 ‘코레-페르세포네의 신비롭고 비결정적인 형상’의,‘말할 수 없는 소녀’에 비견된다. 이는 한편으로, 노자 『도덕경』에서 말하는 이(夷,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와 희(希,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와 미(微,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의 세계와도 친연성이 있다. 이들 셋으로도 밝힐 수 없고, 이들 셋이 하나로 혼연일체를 이룬 상태야말로 음악의 참된 아름다움과 신비다.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하마단’에 두 귀를 열면, 중추가절이다. (대구일보〈문향만리〉19면. 2024.09.18.)
차시예고
18회(10.23.) 이태호 (철학박사/통청인문학아카데미 원장) 현과 황홀(2) 19회(10.30) 김상환 (문학박사/시인) 현의 사유이미지와 회화(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