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이 그림을 그려봐야 뭐~~ 멋으로 그리는 것 아닐까 했다
유명세를 타고 그림을 그려 유명세로 그림을 팔아 돈을 벌려는 사업 아닐까 하는 세속적인 생각으로
그동안 연예인 누가 그림 전시회를 한다 해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다양한 매체에 소개된 인터뷰나 그의 그림을 보면서 박신양의 작품에 관심이 갔다
그래서 4월 30일까지의 전시기간에 혹여 놓칠세라 혼자서 달려갔다
이 전시의 기획이 매우 독특하다
화가 박신양의 작품만을 가져와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뜰리에를 통째로 옮겨왔다고 보면 된다
그가 사용하는 작품의 틀이나 틀을 제작하는 공구와 기계들, 캔버스를 붙이거나 색을 입히는 다양한 롤러,
각종 물감,유약 등 화가의 모든 작업도구들이 1층에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는 작가의 작품을 넘어 공간을 전시하는 프로젝트인 셈이다
아직 작업 중인 작품엔 물감이 마르지 않았으니 주의하라는 안내글도 붙어있을 정도다
수장고형 미술관인 청주 국립미술관에서 본 수장고의 모습도 살짝 느껴진다
이 수장고처럼 보이는 것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작품에 들어갈 틀을 짜 놓은 것 같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 대부분이 대작들이어서 작품완성기간이 꽤 길 것 같다
2층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공간이 있다
2층에서 보면 1층이 내려다보이는 독특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이 철 스크랩 제품을 생산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공장에서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이 공간이 참 투박하면서 멋지다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영국의 '테이트 모던'이 생각난다
자 이제 작품이야기를 해 볼까요?
대표적인 당나귀 작품이 아주 많다
짐꾼의 숙명을 갖고 태어난 당나귀에 자신을 투영해 보았다고 한다
평생 짐을 지고 다녀야 하는 당나귀가 짐을 지지 않으려 뒷발질을 한다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는가 생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연기생활을 받아들이고 꽤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는 배우 박신양.
아마도 그가 그린 수많은 당나귀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한 당나귀 그림
작가는 아버지가 무수히 그렸던 집 설계와 자신이 살던 동네의 지적도를 함께 넣어
당나귀를 해체하고 해체해 이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정말 복잡한 시골마을 지도도 들어있고 아버지가 수없이 그렸다던 집 설계도면도 들어있다
그 속에 해체된 당나귀가 너무나 또렷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색감도, 독특한 화법도 멋져 이 작품 앞에서 참 오래 서 있었다
나처럼 이 작품이 좋았는지 한참 서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나를 좀 기다리게 했던 여인들이 미안했는지 나를 찍어주겠다며 폰을 달라 한다
작품 앞에서 겸연쩍게 서있는 모습보다 걸어가는 모습이 더 맘에 든다
당나귀의 형체들이 또렷했다가 갈수록 흐려지기도 한다
당나귀도 힘을 잃은 걸까
지고 있는 짐 무게에 눌려 자꾸만 늙어가는 걸까
비교적 또렷했던 당나귀들이 이렇게 흐려지기도 한다
작가는 자꾸 희미해지는 당나귀를 그려가면서 짐 진자의 숙명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봐도
"어! 박신양이다" 하고 느낄 자화상이 있다
가까이에서 질감을 느껴보면
자신의 얼굴을 수백 번 수천번 붓으로 눌러 완성했을 화가의 시간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며 내면을 함께 담아내고 싶은 고뇌가 느껴진다
화가 자신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그리움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는데
그 그리움 속엔 함께 러시아에서 공부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친구 '키릴'이 있다
키릴은 현재 러시아 최고의 배우로 성장해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어려운 유학시절
한국에서 온 박신양이란 유학생에게 연기에 대한 철학을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친구라고 한다
그 그리움으로 그림을 시작했다고 하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독일의 현대무용가 '피나바우쉬'의 공연을 보고 감동받아서
한 분야에서 헌신해 온 사람들에게 존경을 담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춤이나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이 걸려있다
역동적인 춤사위가 멋지다
이 춤을 추는 무희(어쩌면 피나바우쉬 일지도)는 아마도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하늘 거리는 긴치마가 가녀린 다리에 휘감기도록 정열적으로 춤에 빠져있을 것이다
이렇게 강렬한 춤사위라니...
이번 전시회 특징 중 또 하나는
작가가 사용했던 종이팔레트를 하나의 작품오브제로 전시했다는 점이다
어떤 의도도 담기지 않은 팔레트의 의무를 다한 종이에 무심히 적어놓은 감정들이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그냥 버려질 운명에 처한 도구가 때론 멋진 작품이 될 수 있다
어느 성직자가 준 사과 두 알을 먹을 수 없어 쪼그라들고 상할 때까지 두고 보면서
사과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설명이 있다
편히 앉아보라 권하길래 사양하지 않고 앉아보았다
박신양의 작업의자다
화가 박신양 아뜰리에에 있는 휴식공간도 그대로 옮겨와 설치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감 묻힌 크록스와 운동화 그리고 티셔츠
이거 콜라보해서 생산판매해도 될 것 같은데.....
작품을 감상하고 나오는 출구에 관람자들이 방명록처럼 소감을 남기는 용지가 있기에
나도 적어봤다
"연기자 박신양이 아닌, 화가 박신양을 알고 갑니다"
진심 화가 박신양을 새롭게 만난 기분이다
그림이 좋아서, 어디서든 전시를 한다면 꼭 보러 가고 싶은 화가리스트에 담아두었다
꼬박 2시간 30분을 집중해서 관람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줄 몰랐다
미술관 건물의 카페에 들어가 메뉴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아인슈페너가 눈에 들어와 크로플과 함께 주문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클림트의 작품'키스'를 보려고 다른 일행들이 왈츠를 배우는 시간에 우리만 달려갔던 벨베데레 궁도 생각나고
비엔나커피가 사실은 아인슈페너 혹은 멜랑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던 그 여행이 생각나 주문했을 것이다
늦은 점심으로 아주 맛나게 즐겼다
낯선 곳에서 혼자 즐긴 이 시간이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