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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우도 이리농악 김형순 예능보유자가 장구를 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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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 태어난 한 소년은 7년 뒤 부안에서 벌어지는 굿판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바지
저고리 차림에 새끼줄을 꼬아 장구 끈으로 사용했던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생계를 위해 익산으로 넘어왔다. 삶의 터전이 바뀌었다고 해서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삶의
양식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해 그는 ‘
풍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평화동 25번지로 오라’는 단원 모집 공고문을 익산 곳곳에 붙이고 다녔다. 열흘 뒤 14명의 단원이 모였고 이
모임은 호남
우도농악의 대표 이리농악의 출발이었다. 1953년 풍물계로 조직된 단체는 이후 김제와 정읍, 부안 등의 전문적인 우도 굿잽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리농악단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11-3호 김형순(82) 보유자의 60여 년에 이르는 이리농악 외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 27일 오전 이리농악전수관에서 김 선생을 만났다. 그는 전북 농악의 전통을 코끼리 걸음에 비유했다.
“코끼리가 터벅터벅 걸어가도 그곳에서 미(美)가 나오듯이 전통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내가 항시 어른들에게 귀가 먹먹하도록 들었던 말이에요.
기술적으로 농악을 화려하게 흉내 낼 수 있지만 본질에서는 ‘멋’이 담겨야 해요.”
그는 전북 농악의 특징으로 ‘멋스러움’을 강조한다. 농악이라 하면 으레 현란한 가락을 떠올리지만, 농악은
무용과
음악,
연극이 어우러진 종합예술로 상쇠의 부포와 장구의 맵시 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락을 잘 내더라도 춤과 연주, 호흡을 통해 신명과 멋이 도출되지 않으면 살아 있는 농악이 아닌 게 된다.
“농악은 예로부터 농경
사회에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의 피로를 풀고, 풍년을 기원하는 등 농경 생활과 관련해 발달한 마을 단위의
축제였지요. 이리농악은 유군들이 치는 농악으로 신앙과 결부돼 축제 형식으로 치러지고, 무엇보다 느리고 섬세한 가락이 많아 춤이 발달했습니다.”
농악이 발달한 호남 지역은 호남 안에서도 호남우도와 호남좌도농악으로 나뉜다. 우측의 서부 평야 지대인 익산·김제·정읍·고창·영광·장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농악을 우도농악이라 칭하고, 좌측 내륙 산간지대인 임실·순창·남원·곡성·여수 등에서 전해지는 농악을 좌도농악이라 일컫는다.
“옛 어르신들은 종종 ‘논 한 필지를 갚는다’는 말을 썼지요. 똑같은 가락을 쳐도 멋있게 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었어요. 지방마다 농악의 특성이 다르지만, 이리농악은 장구 가락을 중심으로 하는 멋 중심의 공연이고, 임실필봉농악(중요무형문화제 제11-마호)은 산간에서 전승돼 전통적인 마을 농악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죠.”
특히 호남 농악의 상쇠들은 상모 위에 다는 날짐승의
깃털 장식인 부포에서 차이를 보인다. 호남우도농악의 상쇠는 뻣뻣한 ‘뻣상모’를 쓰고, 호남좌도농악의 상쇠는 부들부들한 ‘부들상모’를 착용한다. 소고춤은 모자에 따라 춤도 다르다. 우도농악의 고깔 소고춤은 상모에 꽃을 달고, 좌도의 채상소고춤은 상모를 돌리면서 추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또 이리농악은 비교적 느린 가락을 쓰고, 풍류굿과 삼채굿에서는 악절마다 맺고 푸는 리듬 기법을 쓰는 등 가락의 기교가 뛰어나다. 판굿(마당놀음) 가운데 꽹과리 가락을 치면서 둥글게 도는 오채굿은 이리농악만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판제는 첫째 마당, 둘째 마당, 셋째 마당과 뒷굿으로 각기 구분돼 있다. 특히 뒷굿으로는 도둑잽이굿, 상쇠놀이, 설장구놀이, 고깔 소고놀이, 채상소고놀이, 열두발 상모놀이, 기놀이 등이 펼쳐진다.
그는 1985년 1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됐다. 초창기부터 지역적 특성을 살린 것이 아닌 도내 전체의 우도농악 전문인들이 합세했기 때문에 단체는 전문 농악적인 성격이 짙었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때는 사는 것 같았지”라고 되새겼다.
“운이 좋았습니다.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만 해도 농악 공연을 찾는 사람이 많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이 변화하는 흐름을 피할 수는 없었죠.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소규모 연희인 농악은 점차 대규모 연희에 밀리고, 이후에는 농악의 변형된 형태인
사물놀이나 난타 등이 등장하면서 농악은 점차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북의 모든 농악은 ‘혼’과 ‘얼’이 담겨져 내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수제비 하는 사람이 칼국수도 할 수 있다는 말처럼 호남우도농악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다면 다른 농악도 연주할 수 있어요. 선조들이 전해 준 전통을 보존해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 저에게 남은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구성해 서로 협력하면서 일할 때 연주하는 음악으로 주로 마을 축제와 공동 노동에서 행해졌다. 꽹과리와 징, 장구, 소고 등의
타악기를 연주하는 민속예술로 굿, 매구, 풍장, 금고, 취근 등으로도 불린다.
전국적으로는 이리농악과 임실필봉농악, 진주삼천포농악, 평택농악, 강릉농악, 구례잔수농악 등 6개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 농악분야에 지정된 상태다. 지난해 11월에는 유네스코의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됐다. 한국에서 인류 무형유산 등재는 17번째로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한국 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했다는 것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출처:전북일보(2015. 1. 27)
첫댓글 늘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