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한 켤레의 시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 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 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 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 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 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5월시 1집>(1981)-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성찰적, 회고적, 감각적, 상징적
◆ 특성
① 구두를 의인화하여 표현함.
② 감각적 이미지의 빈번한 활용
③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 방식
④ 의성어의 변화로 화자의 심리를 표현함.
⑤ 친숙한 사물을 통해 화자의 마음이 향하는 공간을 환기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 공감각적 표현(시각의 청각화)
* 쑥골 상엿집 ~ 흐린 불빛 아래서도 →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의 전개
* 내 귀는 얼어 → 고향에 가서도 고향을 피상적으로 보고 온 외면적 자아
*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 고향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내면적 자아
* 구두는 지금 황혼 → 구두가 오래되어 낡은 상태임을 비유한 말. 의인법
*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 구두 뒤축을 몇 번 정도 수선한 듯함. 의인법
*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 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있을 법함.
* 누군가의 살아 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 → 지난 가을의 아픈 마음들 사이로
살아 남은 자의 부끄러움
*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았음을 알려줌.
*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 주지 않고 → 고향엔 아직 봄이 오지 않았음을
의미함.
* 내 낡은 구두
→ 과거(고향)와 현재(화자)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화자와 대비적으로 쓰여
성찰의 계기가 됨.
*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 강물의 '출렁출렁' 소리를 신발의 '덜그럭덜그럭' 소리로 바꿈(시적 상황을
생동감 있게 드러냄.)
◆ 제재 : 강물 소리(고향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 화자와 고향 사이의 심리적 매개물)
◆ 주제 : 고향을 다녀온 뒤, 피폐해진 고향을 인식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반성
[시상의 흐름(짜임)]
◆ 1 ~ 8행 : 고향에 다녀온 뒤에 들리는 강물 소리
◆ 9~23행 : 낡은 구두에 묻혀온 고향의 강물 소리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낡은 구두를 신고 오랜만에 고향을 다녀온 화자가, 고향의 이미지를
출렁이는 강물 소리로 떠올리고 있는 작품이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다녀온
화자는 자신의 낡은 구두에 고향의 모습을 묻혀 왔다고 인식한다.
이 시에서 '강물 소리'는 화자가 현재 있는 곳과 고향을 이어주는 심리적
매개 역할을 하는 소재이다. 즉, 현재의 공간에서 낡은 구두를 신고 다녀온
고향에 대한 인상을 지속적으로 지각하게 하는 대상이다. '~들린다',
'~꿈틀댄다', '~들려준다'와 같이 현재형 어미를 사용하여 고향의 풍경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이고, 시각과 청각 등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한 점, 강물의 '출렁출렁' 소리를 신발의 '덜그럭덜그럭' 소리로 인식하는
참신한 발상 등이 특징이다.
[작가소개]
곽재구 : 시인, 대학교수
출생 : 1954. 광주광역시
소속 : 순천대학교(교수)
데뷔 :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사평역에서' 등단
수상 : 201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학부문, 1997년 제9회 동서문학상
경력 : 2001~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정보 : 네이버[지식백과] - 들국화
작품 : 도서, 오디오북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연인들』에 이르기까지 초기 시 세계는 현실의 거대한 폭력에 대한
분노와 그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비루한
그들의 삶에 피어 있는 조그만 들꽃을 발견해내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다.
첫 시집 『사평역에서』에서 시작하여 『서울 세노야』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실에서
억압 받는 삶에 대하여 서정적으로 노래해왔다. 이들 시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80년대를 겪은 이들에게 분노는 근본 감정이다. 80년대를 노래했던 많은
시들이 그저 분노에 찬 절규와 외침으로 끝나버린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곽재구
시인의 시들은 그 분노를 아름다운 시어들을 통해 가슴에 와닿도록 절절하게
깊이 있는 정조로 노래했다.
민주화시대를 거치면서 『서울 세노야』 이후 곽재구의 시는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 인간 본래의 순수성과 사랑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남루한 현실, 힘겨운 현실을 노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현실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첫 시집 『사평역에서』(1983)를 비롯하여 『전장포 아리랑』(1985),
『한국의 연인들』(1986),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와온 바다』(2012) 등을 간행한 바 있으며,
시선집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2011) 등이 있다.
어린이용 동화 『아기참새 찌꾸』 이외에도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1993)을
비롯하여 기행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2002), 『곽재구의 예술기행』(2003),
『길귀신의 노래』(2013) 등이 있다.
1992년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1996년 제9회 동서문학상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곽재구 [郭在九]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