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구속사 강해
창조 언약과 에덴 동산의 통치자
천지 창조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1:1-2:3까지 창조된 순서에 따라, 창세기 2:4이하부터는 인간 창조와 에덴동산을 중심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천지 창조에 대한 기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 2장을 천지 창조에 대한 기사라고만 한다는 것은 본문을 기록한 의도를 간과할 뿐 아니라 이후 전개되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경을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만물의 근원을 밝혀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역시 천지 창조에 대한 의문을 밝히기 위해 기록되었다기보다는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 기록되어진 것이다. 그 목적이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세우신 목적과도 일치한다.
1. 행위 언약과 창조 언약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창세기 2:16-17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구절을 가리켜 행위 언약이라고 일컫는다. 선악과에 대한 행위가 중시된다는 점에서 행위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 언약을 가리켜서 은혜 언약이라고 한다. 이 은혜 언약은 누구에게나 값없이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에 행위 언약과는 그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을 행위 언약이라고 한다면 행위가 중시되어 구원을 얻고 못 얻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행위 언약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어진 언약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천지 창조에 대한 기사로, 2장을 행위 언약에 대한 기사로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 1-2장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 해결의 열쇠가 언약 사상이라는 것이다.
언약(covenant)이란 두 당사자가 서로 요구 사항과 의무 사항을 내걸고 맺은 계약의 행위이다. 그런데 서로 계약을 체결할 경우 어느 한쪽이 위반하면 그 대가로 의무 사항을 치러야 한다.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그 증표로서 동물을 두 쪽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두 당사자가 지나감으로 협정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위약 할 경우 동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처럼 위약자도 그와 같은 처벌을 감수할 것을 예표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계약을 히브리어로 베리이트(תירב)라고 하는데 이것의 어원은 “쪼갠다”는 뜻이다. 그런데 계약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은혜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약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은 약정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선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맺은 피의 약정이기 때문에 계약이라고 하지 않고 언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실하심과 영원하심 그리고 사랑에 근거하여 인류에게 의무만 지워준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야할 의무 즉 약속을 이루어 줄 책임을 스스로 지셨던 것이다. 만일 언약이 없다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의무만 지워주셨을 것이며 인류는 그 요구에 따라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에게 언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스스로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책임을 지심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한 차원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언약의 상대자로 삼으셨다. 이것이 계약과 다른 점이다. 따라서 창세기 1-2장을 언약 사상에 근거해 창조 언약으로 이해할 때 본문 안에 담겨 있는 풍성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세워진 인류
창조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최초의 언약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아담사이에 약정된 것이다. 물론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서 창조 언약을 약정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창조 언약은 지금도 우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창조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약정을 가지고 있다. 1) 안식, 2) 혼인, 3)노동 등이다.
① 안식(창 2:1-3)
이 날은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한 날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날만은 평안의 날로 구별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우리가 안식일을 계속 구별하고 있는 동안엔 결코 하나님의 약속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② 혼인(창 2:24)
혼인은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신비한 결합이다(마 19:6). 창조 언약에 따르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 존중하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 교합하지 아니하며 성적인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창조 질서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지하는 법칙이다. 이처럼 혼인은 신비한 연합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셨던 것이다(엡 5:22-33).
③ 노동(일; 창1:28)
하나님은 일주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하셨다. 그러나 그 안식일은 6일간의 노동이 없이는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6일간의 노동이야말로 인류가 힘써 지켜야할 조약이다. 그 일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며 지키는 일이다(2:15). 그러므로 6일간 힘써 일하지 않고서는 평안의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일반적으로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모두 지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치 행위 언약이라고 할 때는 그와 같이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 언약의 내용을 볼 때는 이상의 안식, 혼인, 노동에 대한 약정을 인류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즉 안식과 혼인과 노동은 곧 창조의 질서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질서인 것이다.
둘째, 창조 언약에 있어서 선악과는 하나의 규정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만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선악과는 언약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규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이상하게 생긴 과일이 아니다. 다른 과일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과일 중 하나일 뿐이다. 그 과일을 따먹었다고 해서 선악을 알게 되거나 눈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언약을 맺으실 때 특별히 정한 한 나무의 과일일 뿐이다.
처음에 인간은 선악을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도록 창조되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 자체가 선이었다. 그리고 에덴동산엔 악이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다. 단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제정해 놓으신 것은 이 과일을 먹지 않음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을 그어 놓자는 것이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밖의 모든 과일을 모두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태초부터 영원까지 창조의 질서를 지켜나가도록 하셨고 대신 인류에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것이다.
셋째, 창조 언약에 나타난 또 다른 증표는 생명나무이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를 두셨다. 언제나 이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이다.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함께 두신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는 여기에 있다. 아울러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의 증표를 이 우주에 새겨두셨다. 곧 사시사철 춘하추동이 어김없이 운행되며 밤과 낮이 바뀌지 않으며 수많은 별들이 운행하되 결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창조 때부터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에덴동산과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을 영원토록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신실한 언약의 증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약정하신 창조 언약을 기억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 이후 한번도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삼라만상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대로 운행되고 있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언약은 결코 변함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은 “네가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는 영원한 내 나라의 통치자가 되리라”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왕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인 것이다(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