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과 나와는 오래 전 추억이 있다. 2019년 6월 경이다(아래 기사 참조). 내가 <안익태케이스>라는 책을 낸 뒤, 꽤나 반향이 컷다. 내 책을 다루지 않은 언론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그 때 쯤 <안익태 기념재단>이란 데서 연락이 와서 모씨와 일대 일 토론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거다. 뭐 어차피 요청이 있으면 강연을 하던 차라 흔쾌히 수락을 했다. 토론 장소도 저 어디 가평이었고, 꽤 잘 정돈된 그런 곳이었다.
가니 나의 토론상대가 김형석이란 분이었다. 이미 2014년 경부터 안익태의 행적을 추적해 온지라 관련된 이름은 웬만하면 다 들어 봤지만 실로 금시초문이었다. 요즘 말로 ‘듣보잡’이라고 하던가. 토론은 정해진 시간만큼 서로 발제를 하고, 또 사회자의 진행하 상호토론 그리고 질의 이런 순서였다.
토론전에 잠시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그 중 한 분이 숭실대 전이사장이라셨다. 순간 드는 생각이 아하, 숭실대가 ‘숭실’출신 인물로 자랑스레 홍보해 온 인물이 바로 안익태인데 내가 안익태를 다루니 그래서 모종의 움직임이 있었겠구나 … 또 그 당시 숭실대에는 안익태관이라고 큰 건물도 있었다. 쉽게 말해 김형석이라는 분은 안익태 기념재단의 그 무슨 ‘연구위원장’이라는 내가 보기엔 급조된 자리를 만들어 일종의 용역을 받은 것이었다. 즉 수고비를 받고 당신이 나가서 이 사람이 쓴 책을 반박하라는 그런 용역말이다.
당연히 그의 발표는 어디서 안익태를 ‘애국자’로 비호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너절한 자료나 사진들, 해괴한 논리들을 잔뜩 늘어 놓았다. 게다가 프랑스 부역자 청산관련해서도 누구나 알만한 자료들을 왜곡해 짜집기해 놓은 것들을 우겨대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쓰는 과정에서 두 차례 독일연방기록원Bundesarchiv을 방문해 독일제3제국 즉 나치 독일시절의 문서철속에 있는 에키타이안(안익태)파일을 복사했다. 그대로 ‘네이버 카페 에키타이안’에 고스란히 공개해 두었다. 지금도 있다. (그 뒤 다시 연방기록원 영상원Filmarchiv에 가서 당시 나치선전성 괴벨스의 지시로 음반화된 에키타이안의 만주국건국 10주년 축전음악Festmusik도 내 휴대전화로 찍어와 일부공개하고 그 원본의 사본을 최근 공개했다. 영상은 아래 댓글 참조)
이 사료는 말그대로 1차 자료다. 에키타이안 파일은 <독일협회DJG>라는 상위 디렉토리아래에 있는 문서철의 일부이다. 이 단체는 독일선전성 즉 괴벨스가 지휘하는 그 프로파간다부서중 하나다. 나라별로 이런 협회란 이름의 일종의 공법단체가 나치시절에는 다 조직되어 있었다. 독일협회의 카운터 파트가 ‘일독협회’라는 이름으로 일본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 지금도 있는 거로 안다. 에키타이안이 당시 주베를린 일본음악인의 2진이라면 1진이 바로 고노에 히데마로(1898-1973)다. 고노에 파일 다음에 있는 것이 에키타이안파일이다. 그는 바로 고노에 후미라루, 전시 일본총리이자 패전후 자살한 그 고노에의 이복동생이자 일본의 화족이다. 본인은 자작이었다. 고노에 히데마로는 일본의 서양음악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인물이다.
그 뒤 광복회를 통해 이 관련 문서철 전부를 독일로 부터 입수해서 우리가 소장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야 나처럼 내돈내고 날아가서 숙소구하고 어렵사리 기다려 겨우 몇 시간 열람하는 이런 어마어마한 비용낭비를 줄일 것 아니냐고 했지만, 이후 에키타이안의 만주국 영상은 광복회가 입수했지만 여전히 저 문서철은 아니다.
내가 에키타이안 파일을 공개한 이유는 이 사안의 공론화를 위해서다. 그래서 적어도 이런 공개토론을 위해서는 특히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보의 실체를 논하는 자리라면, 이런 종류 1차사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는 출발이자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김형석이란 분은 ‘연구위원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등장해 말하는 내용중 이 필수 1차 사료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이 그저 주변적인 일화나 이미 반박된 허구적인 옛날이야기 따위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역사학자라고 했다. 그리고 어디 나중에 보니 목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알고 보니 이 사료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안되는 사람이었다. 왜냐 하면 독일어를 한 마디로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베를린시절은 안타깝게도 음악적 재능이 부족했다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던 ‘음악인’ 에키타이안 인생의 절정기였다. 전쟁말기 미CIA의 전신인 OSS가 일본 대본영 정보국의 독일총책이라고 신원을 밝힌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 2년 반동안 주소지를 두고, 그의 후견하에 추축국과 점령국 순회연주를 다닌, 그래서 그 뒤 다시는 이 ‘영광의 시절’을 맛보지 못했던 사람이 에키타이안 즉 안익태였다. 연주곡은 그의 필생의 역작?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전음악>이었다. 그리고 일본아악을 편곡한 <에텐라쿠(월천악)>였다. 그런데 이 시절, 그 절정기의 행적을 기록한 1차사료를 내가 수고해서 구해와 어디에 있는 지 알려 줘도 읽지조차 못하는 그런 처지에서 나와 논쟁을 하기 위해 나온 셈이다. 그런 뒤 무슨 안익태의 애국행적을 찬미하는 책을 썼다고 했다.
그 뒤에도 김형석은 또 다른 역사학자 한 분을 모셔다 나의 글에 대한 무슨무슨 구질한 반론을 펴도록 시킨 적이 있다. 무슨 말인지 보니, 이 분 역시 저 핵심적인 1차사료를 읽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런가 보니 프랑스에서 공부해 독일말을 모르는 것이었다. 주석에 단 것을 보니 번역기를 돌린 흔적이 역력했다. 지금은 번역기 수준이 몰라보게 좋아졌지만, 5-6년전 그것은 특히 한글번역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를 논쟁이라고 불러 학자로서 참거짓을 가려 안익태의 허구적인 혹은 좀 세게말해 반민족적 행위의 실체를 가리는 데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해서 이들의 소위 반론 어쩌구에 철저한 무시로 일관하기로 했다.
김형석이란 분이 독립기념관장이 되자말자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외쳤다. 안익태 친일과 친나치 부역행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일, 대나치, 대추축국에 선전포고한 뒤에 그 정점을 찍는다. 안익태 그는 우리 헌법에 임시정부의 법통이 존재하는 한 이적행위를 한 자다. 이 법통성을 독립기념관장 김형석이 부정하지 않는 한 안익태의 반역행위는 가릴 수 없다. 그래서 ‘건국절’을 만들어야 한다. 안익태의 명예!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임시정부 법통성을 지우는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조차 그럴 계획이 없다는 데 친일파여, 이를 어쩌면 좋은가.
그래 좋다. 에키타이의 명예를 회복시키자. 그래서 일본의 명절에 맞춰 에키타이안이 어느 날 아침 루마니아대사관저에서 그랬듯이 에키타이안의 반주에 맞춰 다함께 기립해 ‘기미가요’를 불러보자. 만주국 건국기념일이 되면 에키타이안이 베를린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함께 ‘축전음악’을 들어 보자. 여기에 전주곡으로 일본 ‘에텐라쿠’면 어떠냐.
우리 모두가 한 때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목숨을 불사하고 전선에 뛰어 갔듯, 한미일 3각 군사동맹을 위해 떨쳐 일어날 준비를 하면 어떤가. 김형석이 바로 독립기념관을 지키는 듬직한 역사학적 ‘총후’가 되줄 거로 믿는다.
참, 김형석이 역사학자라고 하니 다음 번 나와의 논쟁은 번역기가 좀 더 발전한 다음에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창피를 덜 당할 것이 아닌가. 부디 자리 보전 잘 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