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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긴 글을 썼다. 기사를 보니 어제 있었던 윤석열 기자회견에서 여자사회자가 “질문 받겠습니다. 손을 들어주십시오!”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조선일보 기자가 맨 처음 지명됐고 KBS, SBS, YTN, 경향신문... 등으로 진행됐다. MBC 기자는 배제됐다. 마치 자유롭게 회견을 하듯이 기자들이 손을 드는 식으로 진행을 했지만 기자들 질문 순서가 이미 정해진 쇼였다. 회견이 끝나고 윤석열이 기자들과 악수를 할 때, 마이크가 꺼지지 않은 것도 모르고 여자사회자가 이렇게 속삭였다. “접을 때도 잘 접어야 해... 잠깐만, 보고 있어서... 응? 응?”
무엇을 잘 접어야 한다고 했을까? 누가 보고 있어서? 지난 기자회견에서 질문할 기자 사진과 명단이 노출됐고 질문하는 기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번 기자회견도 지난번과 같은 형식의 ‘짜고 치는’ 식으로 보인다.
어제 한 기자가 지난 8.15 경축사에서 등장한 ‘반국가세력’이 야당을 지칭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윤석열은 “간첩활동 한다든지 국가 기밀을 유출한다든지 북한 정권을 추종하면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아주 부정한다든지 그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8.15 때 연설과 어제 기자회견에서 말한 ‘반국가세력’이 좀 달라졌다.
지난 8월 15일 윤석열은 2024년 올해 8.15 기념사에서 ‘반국가세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기이한 내용이다.
“...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습니다. ... 전체주의 세력은 자유사회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충분히 활용하여 자유사회를 교란시키고, 공격해 왔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 세력의 생존 방식입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정작 일본에 대한 언급은 간단하게 이렇다.
“일본은 이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입니다. 한·일 양국은 안보와 경제의 협력 파트너로서 미래지향적으로 협력하고 교류해 나가면서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기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윤석열이 말하는 ‘반국가세력’은 일본 국가주의 친일본우익극우익에 편승하고 대한민국 헌정체제를 파괴하고 권력욕에 눈이 멀어 검찰동원 다단계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정치검사 ‘윤석열과 그 무리’, 이들이 바로 ‘반국가세력’임은 눈뜬 시민 국민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사회 분열과 갈등을 획책하면서 탄핵파면을 모면하기 위한 안달은 반드시 적(敵)을 필요로 한다. 이는 양민학살 원흉 이승만이나 군사반란 독재자 박정희 전두환이, 그리고 이명박근혜의 상투적인 정치 수법이었다.
이런 방법이 21세기 2024년에도 과연 통할까? 윤석열이 말하는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는” “북한 정권을 추종하면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아주 부정”하는 자들이 어디 있을까?
44년 전이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부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당하자 정부는 국무총리 최규하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10월 27일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10·26 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합동수사본부장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취임했다.
10·26 박정희 피살사건을 계기로 긴급조치로 민주화 여론을 억누르던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18년 박정희 장기독재를 끝내고 개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의해 당선된 최규하는 12월 7일 0시 대통령 취임 직후 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면서 민주적인 헌법으로 개정을 약속하고 정치 억압을 완화한다.
하지만 12월 12일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고 군 주도권을 장악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등장한 하나회는 1980년 2월부터 보안사령부 내 폐지됐던 정보처를 부활시키고, 민주화 여론을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해 언론에 대한 회유를 핵심으로 하는 K-공작 계획을 실시한다.
같은 해 3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데 이어,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부총리급)를 겸직하며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하고 국내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19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 인사들은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본격적으로 정국을 장악하고 집권을 하기 위한 방안을 만든다. 5월 12일 보안사에서는 전두환의 지시를 받아 '비상계엄 전국확대'·'국회 해산'·'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지역계엄만으로는 신군부가 정국을 장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와 저항을 강력히 제압하고 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내각을 조종·통제하는 기능을 군부가 가지겠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걸림돌은 헌법상 계엄해제 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국회가 계엄해제를 요구할 우려가 있어 신군부에 의한 지속적인 정국장악을 담보하기 위해서 정치인 체포와 국회해산이 필요하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차규헌·유학성·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시국수습방안을 실행하기 위한 논의를 순차적으로 하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지휘관들의 지지결의를 유도함으로써 전군의 의사를 배경으로 시국수습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5월 15일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김대중·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을 연행하기 위해 '국기문란자 수사계획',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계획'을 마련해 전두환에게 보고하고,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검거 준비를 명령했다.
1980년 4월 말부터 학생 운동권과 정치권에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전두환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철야회의 끝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장애로 정치 투쟁을 결정한다. 5월 초부터 대학생들은 전두환 퇴진·민주화 일정 제시 등의 시위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였다.
한편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고,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를 소집해 계엄 해제·정치일정 단축 등 정치 현안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5월 13일부터 대학생들에 의한 본격적인 가두시위가 시작됐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대학생 10만명이 집결했다. 이과정에서 전투경찰 1명이 시위대 버스에 깔려 사망한다. 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자 대학생들은 오후 8시까지 시위를 하던 중 자진 해산했다. 이날 신현확 총리는 정치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면서, 1980년 12월 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81년 양대 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는 5월 15일 헌법 전문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대해 여야가 합의를 이뤄내어 4년 임기에 1번 중임을 허용하는 대통령 직선제를 뼈대로 하는 전문 121조, 부칙 7조의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여 사실상 개헌작업을 완료했다.
5월 20일에는 국회 본회의를 개최해 계엄 해제·정치일정 단축 등 정치 현안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개헌안은 곧 본회의를 통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5월 16일 전국총학생회 회장단은 정상수업을 받으며 당분간 시국을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당분간 집회를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전두환이 접수한 중앙정보부는 당시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이었던 에비스 겐이치(惠比壽建一)의 첩보를 토대로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한다. 육군본부 정보참보부에서는 '북괴남침설'을 분석하고 이와 같은 첩보는 가치 없다고 결론내렸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북괴남침설'와 관련해 "우리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북한에서 평소와 다른 부대이동을 볼 수 없으며 한국에 대한 모종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과장해서 보고했다.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 당시 방위상 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5월 17일을 전후한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신군부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빌미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침 첩보를 악용했던 것이다.
대통령직에 있던 최규하를 압박한 전두환은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국회 폐쇄·국보위 설치 등의 조치를 내리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구금한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실권을 장악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는 정권 탈취를 위해 인권유린·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5·17 내란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신군부 쿠데타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전남 광주에서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두환의 폭동적 시위진압은 이어 시민학살로 이어졌다.
모든 언론은 통제되었다. 광주에서 진압군의 최초 발포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발생했다. 시민들에게 쫓기고 있던 장갑차에서 퇴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공수부대원이 총을 발사한 것이다. 이 일로 고등학생 1명이 중상을 입었다.
국회의원들 그 누구도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말하지 않았다.
1980년 5월 20일 황락주 의원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국회의원의 의사당 출입을 막고 있는 계엄군에게 호통을 치며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엄군에 의해 의사당 정문 밖으로 밀려나왔다.
국회는 이미 5월 18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진주하여 국회의원의 출입을 저지함으로써 5월 20일로 예정되었던 계엄령 해제안 임시국회는 무산되었다.
44년 전인 1980년 5월 17일 24시 보안사령관 육군소장 전두환 신군부 반란군에 장악된 국회는 2024년 8월 현재의 국회에 반면교사(反面敎師)를 요구한다.
현재의 군 방첩사령부 전신인 보안사령부는 1979, 1980년 보안사령관 육군 소장 전두환 주동 쿠데타를 일으켰고, 2016, 2017년 박근혜 정부 당시 보안사 후신 기무사는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하고 세월호 유가족 정보 수집에 나서는 등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 당시 기무사 사령관 중장 조현천은 박근혜 친위 쿠데타 계엄령 문건이 밝혀지자 미국으로 도피 5년이 지나 윤석열 집권 이후 귀국해 수사를 받다가 2024년 윤석열에 의해 내란음모 무혐의 처분을 받는다. 있을 수 없는 사태다. 국가 반란 획책 기무사 사령관이 해외 도피하고 돌아와 무혐의라?
최근 윤석열은 충암고 1년 선배인 김용현 경호처장을 국방장관으로 선임했다. 군 인사를 좌우지하고 해병 채상병 특검 반대를 획책한 경호책임자를 국방부 장관이라?
후진국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군 인사다.
이태원 참사로 국회탄핵 됐지만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어 행안부 장관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이상민 역시 윤석열의 충암고 후배다.
군 최고 정보 기관인 국군방첩사령부(옛 보안사령부, 기무사령부) 여인형 사령관은(육군 중장)지난해 11월부터 방첩사령관에 임명됐다. 그는 윤석열의 충암고 9년 후배다.
대북 특수정보 수집 핵심 기관인 777사령부 역시 올해 4월 사령관으로 임명된 박종선 소장도 윤석열의 충암고 11년 후배다. 이 부대는 대북 신호 정보 등 특수정보를 수집하는 곳으로 국군정보사령부와 함께 군내 대북 정보 수집 핵심 부대다.
이처럼 윤석열은 군내 핵심 정보기관 수장과 군 지휘 라인을 충암고등학교 출신 지휘 라인으로 채웠다. 군 장성·보직을 쓸어담는 윤석열 충암고 1년 선배 경호처장 ‘김용현 충암파’로 군내 ‘윤석열 친위체제’가 구축됐다. 특히 옛 보안사령부인 국군방첩사령부는 1980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처럼 계엄령 하 종합수사권을 가지게 되는 것에 있다. 경찰 검찰 등을 방첩사령관이 지휘하게 되는 것이다. 법 개정의 미비가 이렇다.
경호처장에서 국방장관이 되는 김용현은 대통령실 용산이전 TF 팀장을 하며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용산 국방부청사를 비우라고 강박하며 청사를 점령했다. 경호처 시행령까지 바꿔서 경호처를 군 위에 있는 조직으로 바꾼 것에서 박정희 때 차지철을 연상하게 한다. 이후 그는 군 인사를 쥐락펴락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윤석열은 취임 10개월을 갓 넘긴 군사반란 박정희 전두환을 찬양 옹호한 신원식 국방장관을 안보실장으로 영전시키는 형식으로 국방부에서 빼내고, 후임 김용현 경호처장에게 국방부장관 내정으로 군 인사권을 넘겨줬다.
다시 말하지만 경호책임자가 국방장관이 되는 후진국 나라들은 대개가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나라들로 그 특징이 있다.
윤석열이 김용현 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을 시키는 것에서, 탄핵을 대비한 ‘계엄령-위수령’ 발동 등 여러 말들이 지금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 김병주 의원이 '계엄 가능성'을 제기하자 "극단적 망상·선동"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 대변인은 "김 의원이 '대통령 탄핵 상황이 오면 계엄을 선포할 우려가 있다'는 황당무계한 의혹을 제기했다"며 "국민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정부를 부당하게 탄핵으로 전복하려는 시도야말로 비민주적이고 국민을 배신하는 행태"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대변인은 "헌법상 국회가 재적 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해제해야 한다"며 "민주당이 다수의석을 가진 상황에서 계엄 운운하는 것은 선동"이라고 했다.
과연 그러한가?
1980년 5월 20일 당시 국회는 전두환의 계엄령을 해제시키기 위해 임시 국회를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계엄군이 이틀 전인 5월 18일 탱크로 국회를 밀고 들어와 착검을 한 군인들이 국회를 이미 점령했다.
오늘 현재 헌법 77조 4항에는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고 단서를 두고 있고, 77조 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1980년 5월 당시에도 국회에는 계엄령 해제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총칼과 탱크로 무장한 군대가 국회를 무력화시켰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국회를 무시하고 국회 입법권 자체를 부정하는 대통령 직위에 있는 자는 이승만 이후 윤석열이다. 윤석열은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 직위에 있는 자다. 윤석열은 2년 임기를 이제 막 지났지만 21건이나 거부권 행사를 했다. 2등 노태우는 5년 임기 내내 총 7건의 거부권을 행사했고 노무현 4건, 이명박 1건, 박근혜 2건을 훨씬 뛰어넘는다. 헌정사 전체로 보면 이승만이 행사한 거부권은 45건이지만 윤석열은 이승만의 같은 임기 2년 동안 9건 거부권을 훨씬 뛰어넘어 21차례다. 이승만 11년 8개월 재임중 45건의 거부권을 행사하고 하와이로 망명한 독재자 이승만 2년 때 임기보다 윤석열이 거부권 행사가 더 많다. 완전 국회 무시이자 3권 분립 파괴 처사다. 박정희 전두환 이승만을 뛰어넘는 독재를 지금 윤석열은 하고 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너무 위험하다.
사진 - 1980년 5월 20일 황락주 의원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국회의원의 의사당 출입을 막고 있는 계엄군에게 호통을 치며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엄군에 의해 의사당 정문 밖으로 밀려나왔다.
국회는 이미 5월 18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진주하여 국회의원의 출입을 저지함으로써 5월 20일로 예정되었던 계엄령 해제안 임시국회는 무산되었다.
의사당 출입을 저지당한 이기택 등 국회의원들이 민관식 의장직무대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