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리의 끝 - 김광만
Ⅰ
늦은 빗물소리 하나 떨어져 내려,
벗은 산, 붉은 허리 함께 건너갈 때
다리 저는 서울의 모든 꿈의 불빛
화양리의 끝 벌판에 집을 짓는다.
어둠 속에서도 쓰다 버린 물들이
눈에 익은 들꽃의 허리를 세우고
서울 밖으로 밀려난 새 울음 몇 마디
젖은 들을 건너간다.
오직 잡초들만이 모가지 우수수 떨구어
남은 캄캄한 세월을 준비할 뿐
질러오는 샛길이 흙탕물에 버려져 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山이 말을 삼키고
그대 화양리의 끝으로 겨울이 온다.
Ⅱ
너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 푸른빛으로 담긴 것들을
마른 강아지풀의 미미한 털로
쓸어보고, 혹은 만나서 불덩이가 되는
산천을 헤매는 너는 무엇인가.
때로는 침묵으로 사라진 것을 이루고
나의 마음에 깊숙이 들어와 젖는
너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모아온 삶만큼 부질없고 적막한 것이
철조망의 녹슨 못대가리로 꽂혀 있고
너는 맹세처럼 힘차게 지나간다.
말하지 않고 빈 들판 끝에서
서너 개의 견고한 가슴을 준비한다.
Ⅲ
누워있던 생애의 불꽃이 일어서고
무엇일까 기다림의 끝으로 흘러오며
눈부신 알라딘의 램프가 떠받치는
겨울 화양리의 확실한 목소리는
새로운 노래되어 스스로 다가오고,
밤의 수렁이 어둠만으로 침몰하지 않는다.
얼음 밑으로 더욱 강물이 세차게 두드리고
새 뿌리가 서로 비비며 뻗어난다.
내 발 밑에는 아직 귀뚜라미 울음이
피처럼 사위지 않고 휘감으며
남은 우리의 모든 눈물자국을 보내버린다.
날마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건너와
얼고있는 벽을 허무는 것은 무엇일까.
밤이라도 넋 잃고 잠들지 못하게 하는
화양리의 끝 그 뚜렷한 목소리는
무엇일까 이렇게 분분히 돌아오며
뜨겁게 언 손을 감싸면서
화양리의 끝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은.
19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