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091]박은(朴誾)선생시-우중 유회 택지(雨中有懷擇之)
원문출처=속동문선 제6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雨中有懷擇之
[朴誾]
寒雨不宜菊。小尊知近人。
閉門紅葉落。得句白頭新。
歡憶情親友。愁添寂寞晨。
何當靑眼對。一笑見陽春。
우중 유회 택지(雨中有懷擇之)
박은(朴誾)
찬 비는 국화에 좋지 않은데 / 寒雨不宜菊
술 항아리 작으매 가까운 사람 안다 / 小尊知近人
문을 닫고 있노니 단풍잎 지고 / 閉門紅葉落
시를 얻고 나니 흰 머리 새로워라 / 得句白頭新
정든 친한 벗을 즐거이 생각나니 / 歡憶情親友
시름은 적막한 새벽에 더해진다 / 愁添寂莫晨
언제나 푸른 눈(정다운 표정)으로 마주 앉아서 / 何當靑眼對
한 벗 웃으며 따뜻한 봄을 본다 / 一笑見陽春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9
원문출처=挹翠軒遺稿卷三 / 五言律詩
雨中有懷擇之
寒雨不宜菊。小尊知近人。閉門紅葉落。得句白頭新。
歡憶情親友。愁添寂寞晨。何當靑眼對。一笑見陽春。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우중(雨中)에 택지(擇之)를 생각하며
찬 비는 국화에 걸맞지 않게 내리고 / 寒雨不宜菊
작은 술동이는 사람 가까이 있구나 / 小尊知近人
문을 닫으니 붉은 낙엽이 떨어지고 / 閉門紅葉落
시구를 얻은 건 백발에 새롭구나 / 得句白頭新
정다운 벗 즐거이 생각하지만 / 歡憶情親友
적막한 아침에 시름만 더하도다 / 愁添寂寞晨
그 언제나 반가운 눈길로 만나 / 何當靑眼對
한바탕 담소하며 양춘을 볼거나 / 一笑見陽春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6
읍취헌 유고
본관은 고령(高嶺).1479년(성종 10) ~ 1504년(연산군 10)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경상북도 고령 출신.
아버지는 한성부판관박담손(朴聃孫)이며, 어머니는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이이(李苡)의 딸이다.
박은은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았으며, 정신과 골격이 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속세에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4세에 독서할 줄 알았으며, 8세에 대의를 알았다.
1493년(성종 24) 1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申用漑)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박은은 1495년(연산군 1)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선발에 뽑혔다.
그 뒤에 곧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가 되고,
수찬에 있으면서 경연관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20세의 약관으로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함과
성준(成俊)이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탄하는 소를 올려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았다.
평소 직언을 꺼린 연산군은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시켰다.
박은은 1501년(연산군 7) 23세에 파직되어 옥에 갇힘으로써 생활은 불우한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파직으로 인해 경제적·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게 되자,
이때부터 스스로 세속 사람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과 시로써 세월을 보냈다. 1503년(연산군 9)에 어려운 가정을 힘겹게 꾸려나간
아내 신씨가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에 다시 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갈 뜻이 없었다.
박은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3년 뒤인 1507년(중종 2)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박은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를 냈다.
연산군 시대의 활동과 갑자사화
1495년(연산군 1)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1496년(연산군 2)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조에서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14인을 선발하였는데 이에 뽑혔다. 그 뒤에 곧 승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홍문관에 선발되어 정자(正字)가 되었고, 1498년(연산군 4) 윤11월에 홍문관 저작(著作)이 되었다. 1500년(연산군 6) 3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1501년(연산군 7) 4월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경연(經筵)에 5년간 있으면서 정사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불가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말하여 조금도 회피하지 않으니, 연산군이 상당히 꺼렸고 재상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20세의 약관으로 유자광(柳子光)의 음험하고 사특한 상황과 성준(成俊)·이극균(李克均) 등이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지탄하는 소를 동료들과 올렸으나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았다. 평소 직언(直言)을 꺼린 연산군은 다른 일로 얽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하옥(下獄)하였다. 옥관(獄官)이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백을 받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했으므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혼자 바른대로 대답하였고, 이로 인해 파직되었다. 이때부터 자신이 세속의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산수(山水)에다 뜻을 붙이고 주야로 글과 술을 즐겼다. 그가 지은 글은, 모두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어 마치 사물이 와서 도와준 것 같다는 평을 들었다. 그가 읽지 않은 서적이 없는데다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상하 고금의 인물을 평론할 때면, 기개의 고하(高下), 사업이 순박(醇駁), 문장의 정변(政變)으로부터 예문(禮文)의 손익(損益), 풍속의 이동(異同)에 이르기까지 두루 해박하게 알았는데, 마치 좌우에서 취하듯이 하여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시원스럽게 여겼다. 또 요량(料量)을 잘하여, 사람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난처해하는 것을 갑자기 물어도 잘 응답하였고, 그 말대로 시행해 보면 타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503년(연산군 9) 봄에 산관(散官)으로 학직(學職)을 겸임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봄에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갈 뜻이 없었다. 이 해 여름 4월 <갑자사화(甲子士禍) >가 일어나서 동래현(東萊縣)으로 유배갔는데, 귀양간 지 백일이 안 되어 한양의 옥사(獄舍)로 잡혀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6월 15일 결국 형장(刑場)에서 사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저서로는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가 있다.
박은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글을 잘 배워서 약관(弱冠)에 학문이 성취되었다. 마음 씀이 바르고 몸가짐이 간결하였으며 부모를 안색에 맞추어 봉양하고 여러 누이 동생과 처자(妻子)를 온화하게 대하였다. 벗과 사귈 적에 신의를 지키되 구차스럽게 하지 않았으며 남의 선행을 보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었고, 나쁜 것을 보면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하였다.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타고난 것이 높고 생각이 샘솟듯 하여 한 때의 글 잘하는 선비가 다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19년 10월 14일(신묘)조 기사를 보면, 정조가 그에 관하여 “우리나라의 시(詩) 가운데에서는 오직 고(故) 교리(校理)박은(朴誾)과 증이조 판서(贈吏曹判書)박상(朴詳) 두 사람의 시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또 『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7년 2월 25일(기묘)조 기사를 보면, 당시 대제학이던 정유길(鄭惟吉)은 박은에 관하여 “김종직(金宗直)은 학문이 정미하고 시문(詩文)도 모두 잘하였다. 김종직의 뒤로는 이행(李荇)의 시(詩)가 훌륭하였다. 박은(朴誾)의 시(詩)와 김일손(金馹孫)의 문(文)도 그 짝을 찾기가 힘들다.”라고 평하였다.
조선 5백년 중 제일의 한시인(漢詩人)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박은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의 시는 주로 파직된 1498년부터 1503년 아내가 죽기 전까지의 것이다.
내용은 현실세계의 온갖 고뇌로부터 벗어나 정신적으로 평화로울 수 있는
현실 극복에의 노력과 주변 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을 노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묘소와 비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 산 6-2번지관련항목 보기 일명 심근솔 동쪽에 있다.
묘갈(墓碣)은 1798년(정조 22)에 11월에 8대손인 현감 박경진(朴敬鎭)이 세웠다.
비문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이 지었으며, 이병모(李秉模)가 글을 썼다.
현재 묘소가 있는 양지면 식금리 마을 입구에는 전국 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1984년 6월 10일, 박은이 화를 당한 지 8번째의 갑자년(甲子年)을 맞이하여
세운 ‘읍취헌시비(揖翠軒詩碑)’가 세워져 있다.
[출처] 박은[ 朴誾 ] 연산군 ‘사사부실(詐似不實)’의 죄목 파직시키다.|작성자 참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