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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묵상글.
1차(0705. 23:05), 2차(05:30 ~ 06:50), 3차(07:15)
7월 6일 묵상글, 5일 23시 05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 2차 공유 계획이였던 김찬선 신부님 글은 아직 -----
(05:35)
** 5시 35분 김찬선 신부님의 글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게재가 안되였고
저는 새벽미사 참례를 위하여 5시 40분에 집을 출발하여 미사를 마친 후
곧바로 귀가하여 6시 40분이 되였습니다.
김찬선 신부님의 글이 5시 53분에 게재된 것을 확인하고
이 곳에 공유하니 6시 50분이군요.
** 언젠가 한번 말씀드렸지만 김찬선 신부님의 묵상글은 5시 30분 이후
작은 홈페이지에 게재가 안 될경우는 오늘 처럼 6시50분 쯤 공유될 것이오니
직접 작은형제회 홈페에지에 들어거셔서 확인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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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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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9,18-26
오늘 복음은 두 이야기가 서로 얽혀 있습니다.
죽은 딸을 살려 달라는 회당장의 간청과,
그 길 위에서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 모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갑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여인의 ‘손길’에 깊이 주목합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일을 청하지 않습니다.
그저 옷자락 술, 곧 옷의 가장 끄트머리에
가만히 손을 댈 뿐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손길이
열두 해의 병을 낫게 합니다.
오리게네스는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닿는 손길은
아무리 작아도 결코 헛되지 않다고.
주님의 능력은
그 옷자락 끝에서도 흘러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십니다.
그 여인을 고친 것은
마술 같은 접촉이 아니라
그 손길에 담긴 믿음이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말씀을 만지는 우리의 모습으로 읽습니다.
거룩한 독서 가운데
믿음으로 한 구절에 손을 댈 때,
그 말씀에서 치유의 힘이 우리에게 흘러듭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시어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십니다.
사람들은 비웃지만,
주님께는 죽음조차 잠일 뿐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소녀를
죄와 절망에 ‘죽은 듯’ 누운 영혼으로 읽습니다.
주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듯,
그분은 죽은 듯한 우리 영혼도
당신 손길로 다시 일으키십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께서는
열두 해 지친 여인에게 “딸아” 하고 부르시고,
죽은 듯한 소녀의 손을 친히 잡으십니다.
돌봄이란 이렇게
지치고 꺼져 가는 것 곁에 다가가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먼저 그분의 손길에 닿은 우리가,
이제 누군가에게 그 손을 내밉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내 약함을 들고 그분께 손을 내미는가?
나는 작은 믿음의 손길조차 헛되지 않음을 믿는가?
나는 말씀의 옷자락에 가만히 손을 대고 있는가?
나는 죽은 듯 지친 이의 손을 잡아 주는가?
주님,
제 약함을 들고 당신 옷자락에 손을 내밀게 하소서.
그 작은 믿음의 손길에
당신의 회복이 흘러들게 하시고,
저 또한 지친 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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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에 ‘정의와 연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습니다. 정의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힘입니다. 연대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손을 잡아 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정의와 연대는 따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연대가 없는 정의는 자칫 차가운 판단이 되고, 때로는 독재와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정의가 없는 연대는 자칫 자기들끼리의 이익을 지키는 협잡과 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공동체에는 정의와 연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의식이 연대를 잃어버리면 다른 민족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게 됩니다. 정의롭다고 말하면서도 팔레스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이란을 공격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정의를 말하지만 연대가 없으면 평화가 아니라 폭력이 됩니다.
반대로 정의가 없는 연대도 있습니다. 기업들이 서로 가격을 담합(談合)하면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석유 가격이 오르지도 않았는데 전쟁을 이유로 주유소들이 함께 기름값을 올린다면, 그것은 연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의가 없는 담합(談合)입니다. 서로 손을 잡았지만, 약한 사람을 위한 손 잡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한 손 잡음입니다. 지난 5월 18일, 한국의 스타벅스코리아가 ‘5.18 탱크데이, 책상에 탁’이라는 이벤트를 기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5월 18일은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입니다. 무고한 시민들이 탱크와 총 앞에서 피를 흘린 날입니다.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한 날입니다. 또 ‘책상 탁’이라는 말은 1987년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관련된 아픈 표현입니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발표는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아픔을 모르고 상업적인 이벤트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이익은 있었을지 몰라도 연대는 없었던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아픔을 가볍게 다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정의와 연대를 함께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의를 말씀하시면서도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낡은 틀에 사람을 가두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하시며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으로 먹이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보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사람을 죽이는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사람을 살리는 정의였습니다. 예수님의 연대는 자기편만 감싸는 연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연대는 죄인과 병자와 가난한 이와 이방인까지 품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자비를 청하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들것에 실려 온 중풍 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간청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은 누구든지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내민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도 이 정의와 연대를 아름답게 보여 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없도록, 가난한 사람이 홀로 버려지지 않도록 함께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초대교회를 보고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정의와 연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 여인은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몸도 아팠지만, 마음은 더 외로웠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혈하는 여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 앞에 크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그리고 조용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참 따뜻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병에서만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부끄러움에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공동체 밖으로 밀려났던 여인을 다시 하느님의 딸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의입니다. 병든 이를 부정하다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세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연대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의와 연대를 통해 한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몸이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관계 때문에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도 있고, 부모 때문에 마음 아픈 자녀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주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조용히 주님께 마음을 드리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믿음도 귀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주님의 옷자락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뿌리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차갑지 않고, 연대를 말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구가 되고, 억울한 사람에게는 힘이 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손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피조물 위에 내리시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정의와 연대는 멀리 있는 말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시작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되 사람을 살리는 마음을 잃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함께 손을 잡되 불의한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손을 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읍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주님의 따뜻한 손이 되어 줍시다. 그때 우리 공동체는 정의가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공동체는 연대가 꽃피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다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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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 치유 장면’과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신 장면’입니다.
두 이야기에는 모두 이미 절망의 상태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은 이 불결한 병 때문에 이미 삶이 포기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겠지.”(9,20)라고 믿었습니다.
‘회당장’은 딸이 죽어 이미 생명이 끝나버린 상태에서,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이다.”(9,18)라고 믿었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을 끌어들였으며, 뒤의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의 손’이 회당장의 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이 앞 이야기에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9,22)라는 말씀이 덧붙여졌습니다.
사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 그것은 어찌 보면 주술적이거나 마술적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회당장의 믿음’ 역시 언뜻 보기에는 억지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 그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어라’는 말씀이요,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의 손은 대체,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자기 자신인가?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 9,18)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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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어떤 여자가 불결한 기간이 끝났는데도 피를 흘리면, 피를 흘리는 동안 내내 그 여자는 부정하다”(레위 15,25).
유다인들은 이 규정 때문에 하혈하는 여인을 부정한 존재로 여겼고 그와 닿는 사람조차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겪었을 사회적 단절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내면의 고통은 그가 겪은 육체적 고통을 훨씬 뛰어넘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고통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은 죽음과 같은 고독한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인은 아주 소심한 용기를 냅니다. 아니, 사실은 엄청난 용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여인의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질끈 감은 눈을 떴을 때,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자신을 바라보고 계심을 느낍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인을 구원으로 이끈 결정적 요인은 그분께서 입고 계시던 ‘겉옷’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여인의 용기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겉옷’에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참된 구원을 맛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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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놀라운 가르침!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과 성공을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진복팔단: 제1주간
놀라운 가르침!
2026년 7월 5일 일요일
앞으로 두 주 동안, "매일 묵상"은 산상설교(마태 5:1–16)에 담긴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인 진복팔단을 묵상할 것입니다. CAC의 교수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이 그 배경을 마련해 줍니다:
갈릴래아의 작은 어촌, 카파르나움 근처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새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며 내려앉습니다…. 아래로는 갈릴래아 호수가 맑은 한낮의 하늘을 비추며 푸른 빛으로 반짝입니다.
서른 살가량 되어 보이는 한 젊은이 곁에 작은 제자들의 무리가 둘러앉아 있습니다. 그는 당시의 랍비들이 그러하듯 앉아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작은 원을 넘어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마치 그분의 가르침을 엿듣듯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 그들이 기다려 온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메시지의 핵심을 그들에게 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방식으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복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며, 우리가 누구이고 또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 사람들이 복되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잘 새겨 들어라, 너희가 본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니라…"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저 사람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혹은 "저 사람들은 저주받았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곧 "유념하라, 너희는 결코 저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모두를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세상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고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공과 참된 행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십니다…. 그분은 연대와 감수성, 비폭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체성을 제시하십니다. 정의를 갈망하고, 자비를 실천하며, 진실성과 순수함을 드러내는 이들을 복되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유형의 영웅을 세우십니다. 그것은 전사나 기업의 경영자, 정치인이 아니라, 평화를 앞서 실천하고 정의의 예언자적 전통 안에서 그분과 함께 고통받기를 기꺼이 선택하는 용기 있고 굳센 활동가들입니다….
갈릴래아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서, 또 서로 사이에서 삶을 바꾸는 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의 종교를 과거의 어떤 이상적 상태로 되돌리려 하시는 것도 아니고, 불안을 조장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듣는 이들을 자극하여,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가? 내 삶을 어떻게 빚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깊이 성찰하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메시지를 묵상할 때, 우리는 그 언덕 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함께합니다. 지금 내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씨름하며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각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깨닫습니다. "내가 이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인다면, 내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우리의 생각이 ‘내 방식 아니면 길이 없다’는 집착에서 벗어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내적 평화와 맑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맑음은 우리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소명으로 세상에 흘러가게 됩니다. 리처드 신부님께서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Dave A.
References
Brian D. McLaren, We Make the Road by Walking: A Year-Long Quest for Spiritual Formation, Reorientation, and Activation (Jericho Books, 2014), 127–13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nh Trí,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잎 위에 맺힌 빗방울처럼, 진복팔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방울씩 이루어 가는 처방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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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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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7.06 05:53
- 믿어버릇하는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마태오복음에서 회당장의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하는데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는 죽어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는 두 복음과 달리
마태오복음에서는 이미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무리한 청을 주님께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태오복음은 어쩌자고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저를 보면서
‘이 신앙 없는 인간아!’하고 저는 준엄하게 저를 꾸짖었습니다.
우리 대다수 인간은 그래도 숨이 붙어 있어야 살릴 가능성이 있다고,
죽은 다음에는 다시 살리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숨이 붙어 있을 때는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다가도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하고 의사가 선언하면 더 이상 매달리지 않지요.
그런데 오늘 회당장은 이런 저와 달리 이미 죽었는데도 살려달라고 하지요.
정말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그런 무리한 청을 하는 건가요?
아니면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무작정 매달리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살려달라고 하는 건가요?
제 생각에 회당장은 진실로 믿은 사람이라고 마태오복음은 얘기하고 싶은 것이고,
하느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또한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죽어가거나 죽었거나 다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죽었다고 못 살리실 분이 결코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얼마만큼 믿는지,
또 얼마만큼 믿을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인간만큼만 믿을 것인지
하느님만큼 믿을 것인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인간만큼만 믿어서 되겠습니까?
제가 자주 얘기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믿음은 도박이고 선택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안 믿기로 하면 내 믿음은 점점 쪼그라들어
내 안에 믿음이란 하나도 없을 수 있고,
그래서 내 안의 무신(無信)이 하느님께서 안 계신 무신(無神)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믿기로 선택하고 거기에 나를 다 걸어 버릇을 하면
믿는 만큼, 싹이 나고 자라듯, 믿음이 자라 하느님만큼 내 믿음은 자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수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저절로 자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주시길 청하는 동시에 믿어버릇하고 걸어버릇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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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회심"은 우리가 하느님의 따스하고 자애 깊은 마음을 읽고 품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대한 주석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한 회당장은 자신의 불행을 과장했을 수도 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 이들은 종종 자신의 어려움을 크게 말하곤 합니다. 그렇게 해야 더 효과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게 되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지혜가 매우 차갑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주석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마치 성경의 신비와 시적 아름다움을 벗겨내려는 현대의 "비신화화를 주장하는 사람들(demythologisers)"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히 껍질 속에 숨어 있는 알맹이만이 아니라, 그 껍질의 빛깔과 무늬, 곧 시와 신비 속에도 깃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시인(ποιητής - 포이에테스 - 만드는 이)"이시며, 예수님께서는 논리학자나 분석가가 아니라 시인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껍질 속에서만 찾으려는 충동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몰래 만져 치유를 얻으려 했던 여인의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그여인은 그저 익명으로, 즉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맺지 않은 채 그저 치유만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요청이 거부될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만, 관계성의 하느님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 익명성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과 군중을 향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물음은 친밀한 관계성을 가로막는 아주 두터운 벽을 깨뜨리시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단순한 은혜의 공급자가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도 우리는 기자나 탐정처럼 사실만 캐내려는 태도가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와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따스하고 맑게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바로 [회개]요 [회심]이라고 믿습니다. 진정한 "회심"을 선제적으로 제공해 주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회심"은 우리가 하느님의 따스하고 자애 깊은 마음을 읽고 품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맑고 아름다운 "꿈"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꿈"을 마음에 품고 살 때 우리 삶의 놀라운 변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꿈"은 한낮의 몽상과 같은 꿈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꿈"이어야 합니다.
이 꿈은 워싱턴 광장에서 인종차별 없은 세상을 꿈꾸며 "나는 꿈을 꿉니다!"라는 연설을 했던 것과 같은 꿈이어야 합니다. 그는 "언젠가 흑인 아이들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게 될 날의 꿈"을 확신을 갖고 마음에 품었고, 또 그 꿈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과 불평등이 극심했던 시대에,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정의의 꿈을 붙들고 세상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 꿈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려는 신앙인의 고백이었습니다. 식탁은 성경에서 늘 친교와 일치의 상징이었지요. 예수님께서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고,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새 계약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니 인종과 신분을 넘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꿈은 곧 하느님 나라의 식탁을 미리 보여주는 표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마르코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보다 더 인간적인 터치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오가 짧게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고 기록한 것과 달리, 마르코는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마르 5,41-43)라고 세밀히 전합니다. 얼마나 따뜻하고 인간적인 장면입니까!
또한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조롱하는 이들을 내보내시고, 부모와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을 데리고 들어가셨다고 전합니다(마르 5,40). 조롱과 불신은 하느님의 놀라운 일(기적)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이성적 분석이 아니라, 신뢰와 개방 속에서 하느님과(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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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가장 아름답게 피는 육화의 꽃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은 기도가 단순히 마음을 위로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육화의 신비가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존재 방식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키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는 형태를 갖도록 만듭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를 충만히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오래 무릎을 꿇거나 많은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존재 안에서 육화의 신비를 다시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삶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께 데려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생명을 살아내시는 자리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관계 안에서 다시 육체를 입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참된 기도는 반드시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듭니다. 그것은 감정의 흥분이 아니라 사랑의 불입니다. 이 불은 자신의 성공과 실패만을 계산하던 마음을 형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살아가는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던 손을 누군가를 붙들어 일으키는 손으로 바꾸며, 판단하고 단죄하던 눈을 상처 입은 존재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는 눈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는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람을 사랑 자체가 되게 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의 몸은 더 이상 자기만을 위한 몸이 아닙니다. 그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의 발걸음은 평화를 심는 발걸음이 되고, 그의 손은 용서를 건네는 손이 되며, 그의 입술은 생명을 살리는 언어가 되고, 그의 눈물은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자비의 샘이 됩니다. 그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란치스칸 기도의 불길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세상을 태워 없애는 불이 아니라,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을 녹이는 불이며, 미움과 폭력을 평화로 변화시키는 불이고, 차별을 형제애로 바꾸는 불이며, 절망을 희망으로 밝히는 빛입니다. 이 불은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되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되며, 갈라진 공동체를 다시 이어 주는 화해의 능력이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불이 그의 심장을 먼저 태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고통받는 인간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상처를 보면 이유를 묻기보다 먼저 다가가고, 눈물을 보면 해결책보다 먼저 함께 울며, 외로운 이를 보면 충고하기보다 곁에 머무르는 법을 배웁니다. 그에게 연민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 방식입니다. 그는 사람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사랑받는 형제자매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기다려 주며, 끝까지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또한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새들의 노래는 창조주의 찬미가 되고, 이름 없는 들꽃은 하느님의 미소가 되며, 작은 벌레 하나도 생명의 신비를 노래하는 형제가 됩니다. 산과 강과 바람과 햇빛은 더 이상 인간이 소비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형제요 자매입니다.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감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 안에 흘러가는 창조주의 선하심을 알아보는 영적인 시선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육화의 신비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존재 안으로 들어오셨고, 영원하신 분이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으며, 전능하신 분이 가장 작은 아기의 연약함을 선택하셨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바로 이 내려오심을 가장 깊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느님의 이 겸손한 내려오심을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 살아내는 일입니다.
인간이 되신 신비는 결국 갈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인간을 갈망하셨고, 그 갈망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그 갈망에 응답하도록 창조된 깊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원하지만, 그 모든 갈망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숨 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통해, 소유를 통해, 인정과 권력을 통해 그 갈망을 채우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허기를 채워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하느님 안에서만 안식을 얻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바로 그 갈망을 가장 순수하게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행위입니다. 기도할수록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조금씩 알게 됩니다. 세상이 붙여 준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불러 주신 이름을 듣게 되고, 내가 무엇을 소유했는가보다 누구를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이며,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어떤 조건이 완성될 때 찾아오는 결과가 아닙니다.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 이미 시작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으며,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다른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프란치스칸 기도의 완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기도하는 사람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우리의 손은 그리스도의 손이 되며,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의 자비가 되고, 우리의 발은 평화를 전하는 발걸음이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다시 육화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기도가 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혁명이며,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계속 이루고 계시는 살아 있는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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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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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슴치고 부끄러워하는 것, 참으로 좋은 표시입니다!
연세가 조금 드신 분들 중에,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면서, 우울해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돌아보니 그 무엇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며 크게 자책하십니다.
그때 왜 내가 그랬을까?
가슴 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비참한 나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이런 내게 구원이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냐며 좌절합니다.
그럴 때 저는 늘 큰 확신갖고 강하게 말씀드립니다.
꼭 그렇게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자신의 지난 인생을 평가하셔야 하느냐고?
내가 나를 존중해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냐고?
내가 내 삶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데, 누가 내 인생에 후한 점수를 주겠냐고?
지난 인생 돌아보면 누구나 오점이 있고 흑역사가 있는 것이라고. 젊은 시절, 다들 혈기왕성하고
마음만 앞섰기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가슴치고 부끄러워하는 것, 참으로 좋은 표시라고. 큰 틀에서 바라보면 성장을 거듭한 표시가 분명하다고. 이 세상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살다가 세상 뜨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렇게 가슴 치는 것,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이라고.
저도 솔직히 얼마 전까지 제 지난 인생에 대해서 너무 박한 점수를 매겼습니다.
100점 만점에 30점. 그런데 한 작은 만남, 한 작은 계기를 통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너무나 부족했고, 실수투성이였고, 그래서 아직도 자다가 이불킥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를 통해 누군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한번 잘 해보고자 했던 내 진심을 누군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나 훈훈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관대하신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그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한 여자가 혹시나 하고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세상 작고 가련한 여인의 그 작은 터치 한번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찰나 같은 한순간의 접촉을 크게 보십니다.
즉시 돌아서신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보십시오. 그 여인의 작은 손짓 한번이 죽어가던 여인을 살린 것입니다.
지상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신음 하나, 작은 손짓 하나, 찰나의 눈빛 한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눈여겨보시고 귀여겨들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지상 생활하는 동안 지녔던 작은 선한 의지, 작은 사랑의 실천을 기억하셨다가 백배 천배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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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6.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 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18-26)>
1)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절망’에 초점을 맞추면 사실상 ‘같은 이야기’입니다.
야이로와 그 여인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에 빠졌다가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에서 성가 517장의 가사가 연상됩니다.
“내가 절망 속에서 주께 아뢰나이다.
주여, 나의 간구를 들어 허락하시고, 주께 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26).”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서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다.” 라는 말은, 재산뿐만 아니라 믿음과 희망까지 다 쏟아 부었다는 뜻이고, 그 여인이 믿음도 희망도 다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에 빠졌음을 나타냅니다.
글자 그대로,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였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절망은 누구든지 금방 공감할 수 있는 절망입니다.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고(마르 5,42), 여인이 병으로 고생한 기간이 ‘열두 해 동안’인데, 성경에서 ‘열둘’은 하느님과 관련된 숫자이기 때문에, 두 이야기에 있는 ‘열둘’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가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절망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마련해 주시는 것,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은 절망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겪은 환난을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힘겹게 짓눌린 나머지 살아날 가망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과연 그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고 앞으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또다시 구해 주시리라고 희망합니다(2코린 1,8-10).”
‘위대한 사도이며 선교사인 바오로 사도’도 절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을 통해서 더 큰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절망으로 약해진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지고 더 단단해진 것입니다.
그가 절망을 극복한 비결은 믿음과 기도입니다(2코린 1,11).
3) 야이로와 그 여인은 예수님 덕분에 원하는 것을 얻었고, 절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아마도 둘 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둘 다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구원의 완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만일에 지금의 치유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잊어버린다면, 그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4) 이야기에 나오는 여인보다 더 심한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간절하게 기도해서
치유의 기적을 얻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고, 끝내 치유되지 않고 그냥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누구에게는 기적을 허락하시고,
누구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시는지, 그 기준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모르지만(모르니까) 포기하면 안 됩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짜 희망은 이쪽 세상에 있지 않고 저쪽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라고 말합니다(콜로 1,27).
이 말에서 ‘영광’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광,
즉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병의 치유와 건강 회복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긴 한데, 그래도 그것은 지나가는 현세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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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프란치스칸에게 도움이 되는 묵상글
많이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