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식에 갈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는 강릉고를 다니다가 퇴학 당하고, 묵호종합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묵호종합고등학교 졸업 엘범과 졸업장을 친구가 갖다 주었는데, 찢어 버렸다.
대학교는 강원대를 다니다가 4학년 2학기 때, 일본 동경대로 유학을 가게 되어 졸업식에 갈 수 없었고. 졸업 엘범 사진도 찍지 못해 엘범조차 없다.
앨범 속의 졸업사진은 늘 슬프다.
흑백사진 한 장 속에 검은 교복, 어울리지 않는 꽃다발, 어색한 웃음, 순탄하지 않던 가족사까지 다 들어 있다. 1960~70년대에는 졸업장을 말아 넣는 원통형 케이스가 있었다.
졸업장을 귀하게 여길 만큼 학교를 졸업하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으로 졸업은 학교라는 억압에서 해방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머리 위에 있어야 할 모자가 허공으로 올라갔고, 빛바랜 교복에 밀가루를 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졸업은 끝이면서 시작이었고, 상승이면서 하강이었고, 단절이면서 연결이었고, 계승이면서 창조였고, 기쁨이면서 슬픔이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졸업식이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학교를 다니며 참으며 견뎌야 할 일이 그만큼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제 잔재인 군대식 체벌도 선후배 간의 칼날 같은 규율도 지금은 없다. 나라의 교육정책은 오로지 경쟁을 부추겼고 성적에 따른 서열만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학교 부근에 차가 밀리고 음식점을 예약하기 힘든 날이 졸업식 날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졸업하는 이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가 있다.
“눈을 밟으며 들길 걸어갈 때(踏雪野中去)/
모름지기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今日我行蹟)/
뒤에 오는 이에게는 이정표가 되리니(遂作後人程).”
백범 김구 선생이 1948년 남북대화를 위해 혼자 38선을 넘으면서 읊었다는 한시다.
졸업은 선을 가까스로 넘는 것이다.
프랑스 대학은 68혁명 이후로 졸업식은 물론 입학식 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