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읽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나태주 <풀꽃2>에 나오는 말이다.
1961년부터 지방이 무너졌다. 서울에 와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0~3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서울로 왔다. 변두리에 가거나 빈터에 무허가 집을 짓고 안 해본 일이라도, 힘든 일이라도 가리지 않았다. 대부분 금속을 연결된 일고 먼지와 폐를 상하게 하는 환경이었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폐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에 일본인들이 먹지 않는 삼겹살과 족발을 먹으며 그 시절을 견디었다.
내가 살던 금호동은 이들의 가정이었고 내가 다닌 장충초등학교 나의 친구들은 그들의 자녀였다. 내가 청계천에 애정을 갖는 이유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어느 날 삼양동으로 전학을 가고 성남으로 이사를 간 까닭을 안 것은 한참이 지나서다.
60년 농민 인구의 3분지 2인 350만 명이 이농을 하여 서울로 몰려왔다. 지방에서 올라 온 농민들은 판자로 집을 지으며 살아냈다. 수출의 용사로, 경제성장의 희생자로...
박정희에게 두 명의 군대 호위무사는 전두환과 육사3기 출신 김현옥(1926~1997)이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전두환은 육사생도를 동원한 지지데모를 하여 여론을 돌렸고 30대 중반으로 부산 수송대 대장이었던 김현옥 중령은 부산에서 지지 시위를 함으로 지방의 모든 군대가 전부 박정희로 돌아서게 하는 일을 하였다.
박정희에게 기쁨을 준 김현옥은 대령으로 진급하며 동시에 경남 부산시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취임 1년 만에 경남도에서 부산을 직할시로 독립시킨다. 재선, 3선 개헌, 유신은 처음부터 박정희의 예정된 시나리오였다. 박정희와 김현옥을 소시오 패스라고 말하는 것은 소시오 패스의 정의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을 알고 있음에도 밀어붙이어 상대에게 손해를 주는 자를 말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권력을 계속 장악하려면 확실한 경제 성과와 조직을 유지하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본능을 알았다. 그의 멘탈은 일본 쇼군의 통치술이었다. 처음에 이농을 해서 서울로 온 사람이 고마웠지만 나중에 박정희는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판자촌 모습은 자신의 성공의 모습과는 다르고 이런 민중들이 서울 중심에 뭉쳐있는 것은 언젠가 민중의 반란이 된다고 생각하여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
그래서 오직 박정희에게만 충성하는 소시오 패스 40살 김현옥을 준장으로 예편시키고 불러 40살에 서울시장으로 1966년에 임명한다. 박정희는 김현옥에서 임명을 하며 두 가지 미션을 준다.
첫째 판자촌을 전부 철거하라! 둘째 건설하는데 두려움을 갖지 마라! 박정희가 종교인 김현옥은 서울시장에 취임하자마자 서울시 예산의 10%가 건설비인데 75%로 올린다.
그는 명동과 광화문지하도를 5개월 만에 완성하고 최초의 고가인 아현동고가를 7개월 만에 준공하고 수백 개의 육교를 만들고 남산 1.2호 터널을 만들고 2개월 만에 23만개의 도심 판자 집을 철거하고 1년 만에 세운상가 8개를 완공하고 최초의 현대적인 아파트를 6개월 만에 만든다. 이것은 불량식품 같은 것이었다. 자랑이 아니고 부끄러움인 것이다.
또 곡선인 한강을 다 파괴하며 직선으로 만들어 강변로를 만들고 봉천 신림 상계 단지를 만들고 여의도를 110일 만에 만들고 청계고가를 2년 만에 완성한다. 나열할 수 없는 모든 것까지 그는 아파트가 무너져 그만둘 때까지 4년 재임하는 동안 이 모든 일을 하였다.
박정희에게 김현옥이 없었다면 박정의 재선과 3선, 유신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불도저시장 김현옥이 박정희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지만 김현옥시장은 우리에게는 서울의 아름다움과 서울인의 정서를 파괴시킨 괴물이다 . 윤보선에게 간신히 이긴 박정희는 자신이 계속 집권하는 것은 민주주의도 아니고 오직 서울 시민들이 부자가 되어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지지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통치를 사용했다.
김현옥은 '돌격'이라고 쓰여 진 헬멧을 쓰고 다니며 빠른 서울,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이루어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조국의 과업, 민족의 예술이라고 믿은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불도저였냐면 미국 존슨대통령이 방한해 워커힐에 묵을 때 한양대에게 숙소까지 2차선이라 경호가 힘들다고 미 경호팀이 말하자 10일 만에 한양대서 워커힐까지 4차선을 만들어냈다.
그의 이런 과속은 전부 대가를 지불했다. 부실공사로 수시로 사고가 났다. 그럼에도 그는 박정희가 준 사명 "건설에 용감하라" 만 있었다. 청계천고가도로는 전문가들이 다 반대하였지만 그는 박정희가 수시로 워커힐에 가서 노는 것을 알고 박정희가 청계고가를 통해 속히 워커힐에 가서 놀도록 완성을 한 것이다. 이런 것이 군사정권의 정의였던 것이다.
빨리 빨리란 문화, 자연의 파괴, 인간성 상실인 군사문화의 피해를 우리는 그대로 받았고 우리 안에 이런 해로운 멘탈이 보이지 않게 지배하고 있다. 김현옥은 이의를 제기하는 서울시 임원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쌍욕을 하며 수시로 재떨이를 던지는 상명하복의 군사문화를 일반화하였던 것이다.
김 시장이 상식이 아닌 경사가 높은 현저동에 금화아파트를 질 때 당시 손정목 계획국장이 왜 이리 높은데 아파트를 세우냐고 하며 교통문제 등 여러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는 "야 미친놈아! 그것도 모르냐. 높은 곳에 아파트를 져야 청와대에서 박정희대통령이 보시지" 라고 답했다.
즉 그는 박대통령이 보는 것이 중요해서 무리하게 높은 곳에 지었던 것이다. 손 국장은 나중에 김현옥에 대하여 김 시장은 시장이 아니라 파괴자였고 도시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서울의 패륜아라고 하였다. 1969년 가수 패티 김은 어용 노래 서울의 찬가를 부른다. 김현옥은 언론인들에게 당근을 주어야 자신의 무리한 공사가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당시 집이 없는 기자들에게 주택 부지를 제공하기로 한다.
그래서 기자 임원들과 지금의 강남 논현동을 보여주며 평당 2000원만 내라고 하자 언론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냐고 하며 진흙 땅 논현동은 싫다고 하자 지금 은평구 진관외동을 보여주자 기자들이 좋아해서 그곳의 땅 한 평에 2천원을 주고 샀다고 한다. 이후 강남이 개발되자 기자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진관외동의 기자촌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김현옥이 서울시장이 되고 나서 일주일이 지나 종묘에서 필동까지 있는 판자촌을 본다. 박정희도 하기 어려운 만용을 부린다. 그는 박정희에게 이들을 철거시키고 또 35만 명이 이주할 새로운 도시를 광주(현 성남) 만들겠다고 한다. 박정희는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사냐고 하자. 옛날 왕들은 십만 명이 모여 살면 서로 뜯어 먹고 살았다고 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박정희 결제가 나자 두 달 만에 그는 이곳 판자촌을 다 철거를 한다. 그리고 전쟁에서 사용하는 거짓말을 가난한 민중들에게 하며 충무로에 있던 15만 명의 판자촌 빈민들을 성남으로 보낸다. 그 거짓말은 성남에 평당 2000천원에 20평을 팔 것이며 그 돈도 3년 거치 상환이라고 한다. 또 공장을 유치해 충분히 먹고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들이 서울로 오지 않겠는 서약서를 받자 바로 판자촌을 다 허물어 버리고 이들을 트럭에 태워 성남으로 보냈다.
그런데 가서 보니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다. 화장실 수도시설도 안 되어 있었고 생활편의 시설도 없는 그냥 맨땅이었다. 공장은 없었고 인구 15만 명을 이주시켰는데 서울로 가는 버스도 한 대이고 하루에 6번만 왕복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민중들을 정부를 믿고 참고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는데 강남 개발붐이 불고 지가가 오르자 평당 400원에서 사서 2000원에 불하해주고 3년 거치 상환이란 약속을 어기고 정부는 이들에게 평당 16000원을 내라고 하고 그것도 일시불로 내고 그러하지 않으면 30만원 벌금을 불린다고 했다.
이런 사실에 분노한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해도 일체의 대답을 하지 않자 1971년 8월10일 이 곳 분들을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올라온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김현옥은 그만두었고 새 시장은 성남주민에게 처음에 약속한 것을 지키겠다고 하고 간신히 수습했는데 이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이들을 폭도라 하며 구속시킨다. 국민이 정부를 무섭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유신을 예측하고 공포정치를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8.10 성남민권운동> 이다.
어제 이재명과 한동훈 두 사람을 보았다. 그 전에는 이재명과 윤석열을 보았고 그 전에는 이재명과 이낙연을 보았고 더 전에는 이재명과 문재인을 비교하며 보았다. 성남민권운동이 일어난 그곳에서 생존한 이재명의 간절함과 어려움가운데서 상승한 치열한 지식이 묻어남이 나는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 같았다. 내가 이재명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묘하게 비판하는 분들에 대해 예민하게 싫어하는 이유는 지성도 있지만 직관이다.
나태주는 풀꽃 3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풀꽃 3처럼 살아낸 청계천에서 어른들은 대부분 하늘로 가셨고 그 아들들이 권력자의 자리로 가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반백년 지금 이어가고 있다. 내가 산업생태계를 지켜 온 이들의 마음을 두는 이유다. 오세훈 시장은 김현옥 시장처럼 시장에 재선이 되고 나서 청계천 공중보행로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개발되지 못한 서울이라고...
위에서 보면 지저분하고 낡았고 없애야 한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그들이 지저분 한 것이 아니라 지저분 일들을 했을 뿐이다. 자동차 엔진 안에 인테리어 소품을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힘들고 오염된 일을 하는 이들에게 떠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건강을 위한 샤워시설을 해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곳에 젊은이들이 모였다. 그들은 산업생태계를 존중해 이곳에 서점을 만들고 공장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며 옥탑에 외진 곳을 찾아 코리아 힙지로를 만들었다.
불필요한 겉치레로 망하는 황새를 따라가지 않고 가난 그 자체를 부족함 그것을 장점으로 발전시키며 홍대나 가로수길이 하지 못하는 성공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목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신앙은 이들이 옳다고 기도하는 것이고 길 위의 인문학을 하는 나는 이 풍경을 보고 이 사람을 만난다. 당신이 옳고 당신이 소중하다고 말하며...
요즘 새벽에 사무실에 나와 초고를 정리하고 있다. 오늘 벌써 5시간을 넘게 일하고 있다. 내년부터 다시 이런 문화를 철거한다는 겉멋 부리는 오 시장에 대해 짜증이 나고 속상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