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백인-非백인, 500년 불평등… 소득 격차 커지자 폭동 위험수위
아르헨 대선 한달 앞
〈하〉 ‘양극화 늪’속 좌우대립 격화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이 10일 수도 산티아고에서 군인 출신 우익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 치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진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산티아고=AP 뉴시스
아르헨티나의 경제난과 치안 불안은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중남미 전체의 공통 고민이다. 우선 원자재와 농산물 수출 등에만 의존하는 ‘천수답’ 경제 구조로 첨단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아르헨티나의 농산품 수출 비율은 전체 수출의 65.8%를 차지하고 있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여파로 세계 어느 지역보다 인종별, 계층별 양극화 또한 심하다. 이로 인해 정권 교체는 빈번하지만 정책의 지속성이 확보되기 어렵고 기존 문제점이 더 누적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각각 지난해와 올해 우파에서 좌파로의 정권 교체가 이뤄진 칠레와 브라질에서는 정치적 양극화에 따른 진영 갈등이 극심하다. 12월 17일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앞둔 칠레에서는 좌우 진영이 물리적 충돌마저 불사하고 있다.
● 500년의 뿌리 깊은 불평등
국제 통계조사 웹사이트 ‘스태티스타’ 등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중남미 주요국의 지니계수는 대부분 0.4를 상회한다. 소득 불평등의 척도인 지니계수는 0과 1 사이에 위치하며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 0.5를 넘으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 상태로 여겨진다.
마약 문제가 심각한 콜롬비아(0.542)가 가장 높고 브라질(0.489), 멕시코(0.454), 칠레(0.449), 아르헨티나(0.423) 등 주요국 또한 모두 0.4 이상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한국의 지니계수(0.339)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북유럽 덴마크는 0.275에 불과하다.
백인과 비(非)백인 간 소득 격차도 심각하다. 같은 해 유엔 자료에 따르면 중남미 원주민의 극빈층 비율은 18.5%였다. 백인 및 백인 혼혈의 극빈층 비율(7.2%)보다 배 이상 높다. 흑인 빈곤율(10.5%) 또한 백인보다 높다.
스페인에서 온 백인은 식민 초기인 16세기부터 금, 은, 구리 등 광산 운영을 독점하며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들을 착취했다. 이런 구조가 정착되면서 주요국 모두 소득 최상위에 백인이 있고 그 아래로 메스티소(백인과 원주민의 혼혈),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 흑인, 원주민 순으로 존재하는 일종의 카스트 제도가 형성됐다.
홍성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식민지에도 어느 정도의 경제 발전을 허용한 영국과 달리 스페인의 식민 체제는 수탈한 자원을 철저히 본국으로 가져오는 데만 초점이 맞춰졌다. 이로 인해 중남미 전체가 시장경제를 발달시킬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식민 지배가 끝난 후에는 포퓰리즘과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불평등이 500년간 고착화한 사회 구조가 됐다는 것이다.
● 둘로 쪼개진 칠레-브라질
좌우 진영의 대립도 심각하다. 지난해 3월 집권한 좌파 성향의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은 핵심 자원인 구리 및 철광석 기업의 국유화, 민간연금의 공영화, 기초연금 인상 등 사회보장 제도 확대를 주창하고 있다.
특히 그는 군인 출신 우파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73∼1990년 집권) 시절 제정된 헌법에 낙태 허용, 원주민의 재산권 인정, 공공기관 여성 할당제 등 진보 성향 정책을 포함해야 한다며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우파 또한 헌법에 낙태 금지, 의료 민영화, 재산세 철폐 등을 넣자며 보리치 정권과 대립 중이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2000만 명 칠레 국민의 과반이 찬성해야 한다. 지난해 9월 국민투표 때는 38%만 찬성해 부결됐다.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은 보리치 대통령은 “올해는 반드시 통과시킨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다만 이번에도 통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17일 현지 여론조사회사 카뎀에 따르면 응답자의 57%가 “국민투표 때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했다.
12년 만에 재집권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이끄는 브라질에서도 진영 갈등이 상당하다. 룰라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패한 ‘브라질의 트럼프’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정계 복귀를 노리고 있다.
박효목 기자, 김보라 기자